[[9전도]] 42눅 10; 29-37 우리의 이웃에 대해서 해야 하는 일2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pdf]
42눅 10; 29-37 우리의 이웃에 대해서 해야 하는 일2_2g
2018. 4. 8. 주. 주일오후.
*개요: 전도비전, [눅]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눅]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눅]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눅]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눅]10: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눅]10: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눅]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예수님을 믿는 자일 때 구체적으로 우리의 고민은 누가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인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때 우리의 신앙은 단지 말로만 그치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이 말로만 그치는 사람들로 인해서 상처를 받고 그들의 한계를 보게 되었다면 우리 자신은 그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유효기간이 지난 유제품은 빨리 버려야 하듯이 우리에게도 종교성으로 가득찬 모습이 있다면 그런 모습을 버리고 이론에만 그치지 않는 실천하는 신앙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이웃은 과연 누구일까요? “[눅]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이 질문 속에서 율법사는 이웃인 사람과 이웃이 아닌 사람을 구분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웃이 아닌 사람들을 배제하려고 하면서 가능한 누구든지 이웃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은 자꾸만 자신이 사랑해야 하는 이웃을 멀리서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와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도 자꾸 특별한 것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결국은 내심 사랑해야 하는 이웃을 찾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 때문에 가장 옆에 있는 이웃을 외면합니다. 영적인 환상과 욕심때문에 영적인 맹점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자신이 사랑해야 하는 이웃은 그리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 이웃을 발견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들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중심으로 이웃을 한정하려는 율법학자의 어리석음을 깨우치시고 도움이 필요한 자를 중심으로 해서 그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31절에서 그 구체적인 내용이 나옵니다. 제사장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갔습니다. 그는 자신이 보고자 하는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서 강도 만난 자를 피한 것입니다. 또한 32절에서 한 레위인도 역시 그를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눅]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눅]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강도 만난 자를 피하던 자는 제사장이며 레위인이었고 자기 스스로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기준을 가지고 나아갔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도 반드시 도움이 필요한 자를 외면하게 됩니다. 언제든 자기 앞에 있는 도움이 필요한 자를 피하여 지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와 다르게 사마리아 인이 강도 만난 자를 도와준 것은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다가가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과연 이렇게 한 행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었으며 자비를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을 하시면서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눅]10: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10: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주님은 또 다시 율법학자에게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종교생활을 하느라 도움이 필요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믿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불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피하지 말고 그를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자신께서는 이일에 분명한 모법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셨습니다. 그럴 때 그 여인의 반응을 생각해 보십시오. “[요]4: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요]4: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요]4: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예수님은 보통 유대인이 상종하지 않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다가가서 물을 달라고 하면서 상종하였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은 전도의 한 발걸음을 내디신 것입니다. 물을 달라고 하면서 전도를 위해서 나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전도가 끝이 났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4:33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요]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우리가 전도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이웃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번 한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증거 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겉으로 보이기 위해서 하는 종교생활에만 빠지지 말고 다른 사람을 정말로 불쌍히 여기면서 전도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2교육설교 관련글[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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