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상담]] 23사 11; 1-9 우애는 그리스도를 통한 기쁨의 연합이다2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23사 11; 1-9 우애는 그리스도를 통한 기쁨의 연합이다2_2c
2021. 2. 14. 주. 주일오후. 온라인 설교
*개요: 상담비전, 우애,
[사]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사]11: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사]11: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사]11:4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사]11:5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사]11: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사]11: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사]11: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사]11: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성경적 상담비전으로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성경적 상담주제를 하나씩 살펴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주제는 '우애'입니다. 7실천단계의 여섯 가지 주제 중 하나로서 우애는 성도가 맺을 수 있는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7실천: 충성, 온유, 절제, 경건, 덕행, 우애] 이 우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이전에 있었던 갈등이나 거리감을 없애고 친밀하며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애를 생각해 볼 때 이 우애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났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고 인간과 인간 사이를 친밀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우애의 근본과 기초는 바로 예수님께 있습니다. 그것을 이해할 때 우애의 열매를 더욱 풍성하게 맺을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사야에서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과 그분이 오셔서 지금 살펴보는 큰 우애를 어떻게 누리게 하시는가를 보여줍니다. 1,2절을 함께 읽어봅니다. “[사]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사] 11:2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서 결실한다는 것은 이새의 아들인 다윗의 자손이었던 예수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 위에 여호와의 영이 강림하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을 때에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임하신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냥 인간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성령께서 그분을 친히 증거하기 위해서 임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미 충만하신 하나님의 현현이지만 그것을 모르는 자들을 위해서 예수님께 임하여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영광스러우신 분이 바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예수님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영광을 통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로 즐거움을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사] 11: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예수님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즐거운 일로 생각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여호와를 사랑하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섬기고 경외하는 것은 얼마나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이었겠습니까? 그럴 때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이루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어야 할 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기쁨이 되니까 우리에게 그 기쁨을 가르쳐 주실 수 있고 그것이 우리의 기쁨이 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기쁨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더이상 두렵고 무섭고 피하고만 싶은 분이 아니라 그분의 계획과 그분의 능력과 그분의 지혜와 그분의 은혜를 누리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고 그로 인해서 기쁨을 얻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알게 되고 그로 즐거움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으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분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요 하나님의 현현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즐거워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지만 하나님을 즐거워하던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죄가운데 속한 자였고 그로 인해 멸망받을 수 밖에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될 때에 비로소 우리도 예수님을 닮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알게 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즐거움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 즐거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나누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6절 말씀을 보십시오. “[사] 11: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이리는 어린 양과 살 수 없습니다. 표범은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울 수 없습니다.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은 결코 함께 있을 수 없고 그 짐승들이 어린 아이에게 이끌리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결코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이리에게 표범에게 어린 사자에게 진정한 즐거움을 알게 하셔서 어린 양과 어린 염소와 살진 짐승을 잡아먹지 않고 함께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린 아이에게 이끌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사자와 같이 강퍅하는 자가 양과 같이 순해진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동물의 세계를 평화롭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인간의 세계를 평화롭게 서로 우애하게 하셨습니다. 진정한 우애는 바로 즐거움을 함께 나눌 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즐거워하는 요소가 서로 다르다면 결코 우애할 수 없습니다. 즐거울 수 있는 등산길도 서로에 대한 미움과 분노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즐거울 수 있는 운동도, 공부도, 일도 그 즐거움의 요소가 다르다면 서로를 해칠 수도 있는 지극히 악한 것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로 이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치심 속에서 우리는 그것이 바로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즐거움은 계속 나아갑니다. “[사] 11: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사] 11: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그럴 때 암소와 곰이 함께 먹을 수 있습니다. 같이 풀을 먹는 것입니다. 그 새끼가 함께 놀 수 있습니다. 사자가 채식을 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이 먹을 수 있는 것들은 이 세상에 널려 있습니다. 풍성하게 먹고도 남음이 있는 것입니다. 가장 위험하리라고 생각되는 어린 아이와 독사의 관계일 지라도 독사는 아이를 물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즐거움은 단지 함께 있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먹으며 함께 장난하며 함께 즐거워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진정으로 함께 우애할 수 있게 하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에게 주신 은혜였습니다. 그것은 즐거움을 함께 나누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천사들이 찬송한 내용 속에서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땅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순종하며 따르는 그들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평화였습니다. 그들이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기뻐하신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이고 그들이 하나님의 기뻐하신 사람들이 된 이유는 그리스도를 기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해서 즐거움을 삼은 자들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관계의 평화와 기쁨에 진정으로 동참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루어 주신 진정한 기쁨의 연합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최종적인 모습이 늘 우리 마음 속에 소망이자 즐거움이자 우리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으로 아로새겨져야 하겠습니다. 9절 말씀 다같이 읽어봅니다. “[사] 11:9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그리스도의 나심을 말씀하면서 성경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이 내용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세상에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즐거움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우리 자신을 온전하게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업고 상함도 없을 것임을 예수님은 알게 하십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갚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될 것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알려주셨고 그분을 어떻게 섬기는지를 보여주셨기 때문에 바로 이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고 주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그 연합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우애를 알게 됩니다. 경험속에서 갖게 된 깨달음이 더욱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 우애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의 삶을 채워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할 때 그분이 우리에게 주셨던 이 기쁨의 깨달음을 다시 한번 알게 되고 그로 인해서 더욱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러한 기쁨을 알게 하셨음을 기억하며 더욱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채워져 가고 진정한 우애를 알아가게 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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