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상담]] 44행19; 21-27 복음의 전파와 우상의 약화2Loading the player... [크게보기]
44행19; 21-27 복음의 전파와 우상의 약화2_2e
2020. 11. 15. 주. 주일오후. 온라인설교.
*개요: 전도비전
[행]19:21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행]19:22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행]19:23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행]19:24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행]19:25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행]19:26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행]19:27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전도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처음으로 오셨던 목적이자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주신 목적입니다. 모든 신앙생활은 전도로 시작해서 전도로 마칩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한 사람의 신앙생활은 전도받음으로 시작해서 전도를 하는 것으로 끝이 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 전도를 위한 복음의 이해의 삶이 있고 그 복음의 실천의 삶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실천 가운데에 하게 되는 것이 또 다른 전도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삶은 전도로 시작해서 전도로 끝납니다. 전도의 이러한 과정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전도에 전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이의 과정 중에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전도를 하기 위해서 복음의 이해와 복음의 실천이 필요한데, 복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나 혹은 복음의 실천이 부족할 때 우리는 전도의 동력을 상실해 버립니다. 우리가 상담전도라는 방법을 통해서 전도의 길을 마련하고는 있지만 정작 전도의 기회를 얻으려 하지 않고 전도의 활동을 행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쉬운 전도방법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의 가장 초기 단계에서부터 성경말씀을 통해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이렇게 맨 처음의 전도의 단계에서 필요한 전도의 동력을 생각해 볼 때 조금씩 전도의 각 발전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먼저, 상담전도법에 따를 때 전도는 네 단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단계는 ‘문제인식’입니다. 여기에서 알아야 하는 전도의 의미는 ‘전도란 과거의 한 대상만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서 바울은 전도의 대상을 기존의 자신의 전도대상자들에게만 국한하지 않았습니다. 21절입니다. “[행]19:21 이 일이 있은 후에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기로 작정하여 이르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하고 [행]19:22 자기를 돕는 사람 중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기는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있으니라” 이 일이 다된 후라는 것은 에베소에서 복음전파가 왕성하게 이루어진 후라는 의미입니다. 에베소에서 복음전파가 이루어졌을 때 그들 가운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여 바울로부터 많은 말씀을 들을 수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력을 행하게 하셔서 귀신이 떠나가고 병이 떠나가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에서 주의 말씀은 힘이 있게 역사하였고 흥왕하여 놀라운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그랬을 때 바울은 에베소에 안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마게도냐와 아가야와 예루살렘과 로마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전문적인 사역자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전도의 가장 기본적인 이 원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스스로 고립되어 버립니다. 전도는 물 흐르듯 흘러 가서 새로운 곳으로 퍼져가게 하는 것인데 우리는 아무 곳으로도 퍼져가지 않고 예전 있던 곳에 계속 고여 있게 되면 그러면 그 속에서 썩게 되고 냄새 나게 됩니다. 복음의 전파가 목적이 아니라 복음의 수호만이 목적이 되어 스스로 변질되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하려는 몇 사람들이 있어서 그 사람들에게만 정성을 쏟았었지만 그 사람들이 불가능해지고 나니까 전도를 하려는 의욕을 상실해 버리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전도하고 싶은 사람만 전도하려고 할 때 우리들의 마음은 아무래도 낙심하게 됩니다. 이상하게도 내가 전도하려는 사람들은 잘 전도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사람들에 대한 전도에 눈을 열어야 합니다. 내가 준비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준비가 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내가 꼭 전도하고자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를 통해 전도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그 무엇인가를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관계를 위해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교회에 다니세요?” 이 질문이 무척 중요합니다. 그가 나를 통해 전도될 수 있는 관계인가 아닌가를 알아보는 방법입니다. 내가 그사람의 종교적인 상황을 알아야만 그런 관계가 되도록 도와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종교적인 상황을 알지 못하면 평생 가도 그런 전도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교회이야기를 하지 않는 한 나를 통해 그 사람은 복음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용기를 내어서 그냥 교회에 가는지를 물어보면 됩니다. 그러면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아닌지를 빨리 알 수 있습니다. 혹은 신앙주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 다니는가’만 물어본다면 약간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 나아가서 교회에 다닌다면 ‘어느 교회에 다니는지’도 물어 보아야 합니다. 그 교회에 관심을 갖는 것이기도 하고 그 사람의 신앙생활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그 교회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교회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고 신앙적인 대화를 여는 좋은 계기가 됩니다.
그 다음에는 ‘2단계 원인이해’입니다. 교인에게나 비교인에게나 모두 전도과정이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때에 비로소 복음을 적용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그 사람과의 나눔의 단계가 필수적입니다. 그래야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복음을 전하기만을 위해서 전도대상자의 상태를 알지 못하고 무조건적으로 나아가려고 하다 보면 복음은 너무나 거칠고 딱딱하게 전해질 뿐입니다. 그 사람의 상태를 이해하고 복음을 전하면 복음의 가장 귀한 의미를 정확하고 알기 쉽게 전해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첫 번째 단계를 진행할 때에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전할 수록 세상은 싫어하고 거부한다는 점입니다. 잔잔한 호수에 배가 지나가면 배로 인한 물결이 파문처럼 커져갑니다. 조용한 삶 속에 커다란 변화가 시작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인 것입니다. 그와 같이 복음을 전할 때에도 복음 자체가 아주 급격한 변화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거부반응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장 복음이 왕성하게 전파되었던 에베소에서 가장 극렬한 저항이 일어났습니다. 23절입니다. “[행]19:23 그 때쯤 되어 이 도로 말미암아 적지 않은 소동이 있었으니 [행]19:24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은으로 아데미의 신상 모형을 만들어 직공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행]19:25 그가 그 직공들과 그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여러분도 알거니와 우리의 풍족한 생활이 이 생업에 있는데”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무리를 선동하여 자신들의 유족한 생활이 위협받고 있다고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결코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았고 오직 자신들의 생계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만들어서 팔고 그로 인해서 먹고 살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우상을 불태우고 마술책을 불사르는 분위기에서는 결국 자신들이 먹고 살 수가 없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과 복음에 대해서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행]19:26 이 바울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전 아시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을 권유하여 말하되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 하니 이는 그대들도 보고 들은 것이라 [행]19:27 우리의 이 영업이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신전도 무시 당하게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 하더라” ‘그들의 영업이 천하여지는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위엄이 떨어질까 한다’는 말은 사실은 자신들의 영업이 천하여지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아데미 우상은 가슴에 유방이 24개가 달린 풍요와 다산의 여신상이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이 우상을 섬기면서 축제를 즐겼고 축복을 기원하였습니다. 자신들의 믿는 것과 자신들의 얻는 것의 상실은 그들로 하여금 복음과 하나님에 대해서 거센 저항과 핍박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바울에게 다음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행]18: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행]18: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하나님에 함께 하시기에 그 모든 박해와 방해를 이겨낼 수 있고 그럴 때 놀라운 하나님과의 동행을 이룰 수 있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저항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싫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다니는 것을 말하지도 못하게 하고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도 꺼내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저항 속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나가고자 합니다. 아무런 반대가 없는 곳에서의 복음전파는 아니지만 그 반대 속에서의 복음전파를 통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관계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기존 대상에 대한 끈질긴 복음이 아니라, 새로운 대상에 대한 새로운 복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속에서 또 다른 누군가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있습니다.
전도는 우리 신앙생활의 열매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성장시키고 발전시켜 온전한 신앙생활의 열매를 맺는 저와 여러분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세상에 오셨던 목적을 이루고, 다시 오실 그날 까지 그 목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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