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상담]] 46고전13; 4-7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사랑2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크게보기]
46고전13; 4-7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사랑2_2c
2019. 12. 29. 주. 주일오후.
*개요: 상담비전,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13: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고전]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결심의 첫 번째 주제로서 가장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얻게 되는 새로운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가질 수 있는 결심의 마음은 다음과 같은 총 6가지가 있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인내, 긍휼, 양선] 이 모든 결심이 다 좋지만 그 중에서 사랑은 가장 우선적으로 가질 수 있는 개인적인 마음가짐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뭔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랑이라는 말은 단지 성경에서만 나오는 말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사는 세상사람들도 사랑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사랑은 성경이 보여주는 사랑과 다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성경이 보여주는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성경은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이와 같이 오래 참고, 온유하고, 투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성경에 보여주는 사랑이란 전혀 세상이 보여주는 사랑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의 사랑은 자기 중심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보여주는 사랑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에 근거해서 갖는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은 절대 감정적으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욕구에 흔들리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이 세상에 대해서 갖는 마음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러한 성경에서의 사랑을 잘 보여주는 것이 시편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시]109:4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다윗은 자신은 사랑하였지만 오히려 대적하는 자들에 대해서 앙갚음을 하지 않고 참았습니다. 그는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가능하였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한 것이기 때문에 그 반대와는 전혀 다릅니다. 투기하거나 자랑하거나 교만한 모습이 아닙니다. 세상에서의 사랑은 투기하고 자랑하고 교만하지만 하나님의 은혜 속의 사랑은 오직 오래 참고 온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의 대적들을 이길 수 있었고 그 속에서 악해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스데반도 이러한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저가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랑의 마음은 진실로 하나님이 보좌에 서계신 것을 보았을 때에 가능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이 바로 5절의 말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고전]13: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특별히 5절은 사랑의 이름으로 행하여 지는 모든 악한 일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사랑은 오히려 더욱 무례히 행해야 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해야 하고 성내야 하고 악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욕구와 욕정일 뿐입니다. 삼손과 들릴라의 관계에서 삼손은 들릴라를 사랑하고 있었고 들릴라도 삼손을 사랑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도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도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무엇을 한 것일까요? 단지 자신들의 원하는 것을 향해 나아갔을 뿐입니다. 거기에서 나온 쾌락과 즐거움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하나의 목표를 가집니다. 6절에서 그 목표는 진리입니다. “[고전]13: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사랑은 단순한 상태도 아니고 조건도 분위기도 아닙니다. 그것은 의지입니다. 그 의지는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나오는 온전한 것입니다. 그럴 때에 만이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요한1서 3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일]3: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 그렇다면 과연 그 사랑이 무엇일까요? 그 사랑은 우리에게 그냥 나타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결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는 그 사랑을 이렇게 말합니다. “[엡]2: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엡]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엡]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그러므로 성경이 보여주는 사랑은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러한 의지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또한 그 사랑을 경험한 우리도 단지 표현으로만 끝나지 않고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7절말씀이 바로 그 사랑을 아는 자들이 행하는 일들입니다. 받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고전]13: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러한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 사랑 속에서 우리는 가족을 대합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대합니다. 그 사랑으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사랑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를 사랑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모습이 아름답거나 보기 좋거나 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랑으로 우리는 이 죄악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진리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게 됩니다.
룻기에서 모압여인이었던 룻은 남편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서 모압을 떠나 이스라엘로 들어왔습니다. 그속에서 그는 진실로 시어머니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말을 들으며 순종하며 하루 하루를 살았습니다. 시어머니인 나오미도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자신을 버리지 않고 함께 이스라엘로 들어와준 룻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룻이 잘되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결국 룻은 그 사랑 속에서 보아스를 만났고, 보아스는 룻을 자신의 아내로 삼았습니다. 룻은 진정한 사랑 속에서 온전한 사랑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뜻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사모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하루 하루를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참음과 모든 믿음과 모든 바램과 모든 견딤은 결코 헛되지 않고 마침내 결실을 이루게 됩니다. 바로 그러한 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바라보면서 진실한 사랑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을 가졌던 자들이 누리게 된 그 온전한 사랑을 경험하게 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2교육설교 관련글[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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