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상담]] 38갈 3; 10-14 극본적 해석을 통한 은혜의 깨달음2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크게보기]
38갈 3; 10-14 극본적 해석을 통한 은혜의 깨달음2_2b
2019. 11. 17. 주. 주일오후.
*개요: 성경비전, 극본적 해석 [갈]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갈]3: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오늘 극본적 해석을 통해서 성경말씀을 연구하려고 합니다. 극본적 해석은 여섯 가지 상담적 성경해석 방법중의 하나입니다. 극본적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본문 속에서 기승전결의 네 가지 극본적 과정을 찾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중요한 하나의 결말을 발견할 수 있고 그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각 단계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구성요소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입니다. ‘1) 발단(기), 2) 전개(승), 3) 절정(전), 4) 결말(결)’ 오늘 말씀에서 가장 시작이 되는 첫 번째 발단(기)에 해당하는 부분은 10절의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라는 말입니다. “[갈]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이란 궁극적으로 처벌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법을 만들어 내면 낼 수록 그것은 죄를 대응하기 위한 것이고 그 죄에 대해서 결국은 저주를 주기 위해서 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행위에 속한 자들은 자연히 저주의 대상이나 아니냐의 문제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삶 속에서도 생각해 보십시오. 법이나 규칙을 만드는 이유는 처벌을 받을 것이냐 받지 않을 것이냐를 결정하기 위해서입니다. 법이나 규칙을 만드는 이유가 상이나 칭찬을 줄 것이냐 안줄 것이냐를 결정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좋은 쪽은 사실 아무런 법이나 규칙이 필요 없습니다. 그런 것이 없어도 마음만 전달되면 충분히 상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날이건 어버이날이건 선물을 주면서 당부를 할 수는 있어도 행동의 조건을 달면서 선물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런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우스꽝스럽습니까? 그런 대화는 전혀 있을 수 없는 대화입니다. 하지만 사실 행동이나 규칙에 관한 것은 모두 심판이나 처벌에 관한 것입니다. 이런 의미가 있기 때문에 율법 행위에 있는 자들은 항상 우울합니다. 왜냐하면 잘해도 본전이기 때문입니다. 잘하면 저주를 받지 않을 수 있을 뿐이고 그나마 잘못하면 저주를 받게 되어버립니다. 이것이 모든 삶의 시작입니다.
그 다음 두 번째 전개(승)는 11절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라는 말입니다. “[갈]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앞으로의 전망을 생각해보면 이런 식으로는 결코 의롭게 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최소한의 수준에까지는 이를 수가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정에서 단지 쫓겨나지 않으려고, 단지 맞지 않으려고, 단지 밥을 먹을 수 있으려고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냥 그 수준에만 머무를 뿐입니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을 것입니다. 더이상 성장과 발전이 없습니다.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도 그저 퇴학당하지 않고 사직당하지 않을 수준으로만 살아간다고 하십시오. 너무나 무의미하게 되어버립니다. 그 시절이 얼마나 의롭지 않을 것인가는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우’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기씨의 고민이라는 뜻인데 중국에 살았던 기씨라는 사람은 항상 하늘이 무너질까를 걱정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우라는 표현이 생겼습니다. 너무 많은 걱정이 삶을 괴롭게 만듭니다. 그런 것처럼 율법의 행위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기우가 됩니다. 걱정하는 것 만으로는 결코 의롭게 될래야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해야 한다, 혹은 해서는 안된다라는 행위의 목록으로는 결코 의로움의 경지에 이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형상을 닮은 자들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의로움으로 올라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여기에 대한 특별한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이 죄의 저주를 끊어버려야만 했습니다.
이제 세 번째 절정에 해당하는 말씀은 바로 13절의 ‘그리스도께서…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라는 말씀입니다.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심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그 저주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영영 돌이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에 그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의 저주를 풀어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속량’이라는 말을 주목해 보십시오. 속량이라는 말은 ‘redeem’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빚을 청산하다, 현금으로 교환하다, 돈을 주고 되찾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속량이라는 말이 쓰이는 모든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모든 율법의 저주를 모두 자신의 피로써 갚아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다시는 그 저주를 받을 필요가 없게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완전한 자유가 이루어졌습니다. 빚 갚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빚이 남아 있으면 또 빚이 됩니다. 빚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 빚을 완전히 청산해주는 것은 완전한 자유로움을 의미하게 됩니다. 영화 레미제라블 에서는 빵 하나를 훔치고 탈옥을 거듭하여 오랜 기간 복역하다가 가석방으로 나온 ‘장발장’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가석방기간 동안 또다시 잠적해버림으로써 여전히 신분을 숨기고 살아가는 그에게 진정한 대속이란 불가능하게만 느껴집니다. 그래서 인생의 많은 부분을 오해와 어긋난 만남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마지막에는 희생과 헌신을 통해 비로소 참된 사랑과 화평함으로 살아가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속량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도 여전히 숨어다니고 피해다니고 속이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의 죄를 온전히 사해주셨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온전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진정한 자유자가 된 것입니다.
이제 네 번째 결말은 14절의 전체 문장입니다. “[갈]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그렇게 변화된 우리들에게 주님은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었던 것입니다. 그 계획은 성령의 약속으로 이루어집니다. 성령의 약속은 우리를 충만케 하시고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는 약속입니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자녀를 다시 찾은 부모가 그 자녀를 이제는 결코 버리지않고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채우시는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우리나라 드라마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내용은 ‘출생의 비밀’과 그로 인한 ‘신분상승’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특히나 더 6.25전쟁 이후에 이러한 출생에서의 혼란스러움과 그로 인한 새로운 변화를 많이 겪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더욱 이러한 주제는 우리 마음에 와닿습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혹시 우리 아버지에게 뭔가 숨겨놓은 비밀이 있지 않을까? 우리 가족에게 놀라운 신분상승이 생기지 않을까? 그런데 그런 출생의 비밀을 알아내는 조건들은 결코 행위가 아닙니다. 더 깊은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부르실 때에도 행위로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부르십니다. 그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성령의 약속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자신을 부인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부인하지 않는 것처럼 성령께서도 자신을 부인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을 믿고 나아갈 때에 우리는 ‘저주에서 축복으로’ 나아갑니다. 율법의 행위는 저주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감격은 우리가 ‘축복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성령의 약속으로 더욱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약속은 우리에게 변치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루게 하십니다. 이러한 은혜를 기억하며 더욱 하나님께로 나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2교육설교 관련글[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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