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상담]] 42눅 23; 39-43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
42눅 23; 39-43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_2c
2019. 8. 18. 주. 주일오후.
*개요: 상담비전, 하나님의 여섯 가지 은혜, [눅]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눅]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눅]23: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눅]23: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눅]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는 우리가 너무나 많이 들었던 내용입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그 용서의 은혜에 기반해서 믿는 자가 되었습니다. 용서가 아니라면 우리는 믿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용서가 아니라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용서가 아니라면 천국을 사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고 구원의 확신이 없으며 천국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은 대개 용서의 은혜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더욱 악순환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그 용서의 은혜를 잘 이해하고 깨달으며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용서의 은혜를 설명할 때 다음과 같은 도형을 통해서 잘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삼각형의 계층 구조에서 가장 상위로 올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용서가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은 상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중위나 하위에 머무르게 될 때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우리를 하위에 머무르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중위에 있게 하시려는 것도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용서는 상위에 오르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다 누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의 은혜를 깨닫지 못할 때 그 아래로 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용서의 크고 넓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이 나타납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을 비방하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사람을 꾸짖고 예수님을 옹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눅]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눅]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이러한 입장의 차이는 각각이 자신과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나뉘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자신이 억울하고 죄가 없고 예수님은 그리스도라고 말하지만 무능력하고 구원할 수 있을 것도 같지만 그렇지 못할 것도 같은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에서의 구원으로 신비한 능력이나 기적적인 능력으로 십자가에 나가게 하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했고 정죄를 받는 자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임을 자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는 첫 번째 강도를 꾸짖을 수 있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이와 같은 입장 차이 속에서 그들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죄수에게는 자신은 제일 억울하고 그 다음이 다른 죄수이며 제일 당연한 사람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용서의 은혜를 깨닫는 자도 아니고 그 은혜를 구하는 자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첫 번째 죄수처럼 용서의 은혜를 알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항상 하나님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잘 채워주지 못하는 집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정말 깨달아야 하는 것은 보상이 아니라 상급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상급을 지금도 허락해 주십니다.
그러나 두 번째 죄수는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자각했습니다. 또한 그런 면에서는 자기 죄를 알지도 못하는 다른 죄수로와도 달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위치를 올바르게 이해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살펴봅니다. “[눅]23: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눅]23: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님의 행하심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고백하면서 예수님이 참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시인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되심 때문에 죽으시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인정하고 시인하는 사람이 바로 이 죄수였던 것입니다. 그럴 때 그는 예수님 아래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보다 더 높은 분이셨습니다. 그 높은 분이신 예수님께 그는 용서를 구했습니다. 나를 기억해 달라는 것은 나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응답하셨습니다. “[눅]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이 죽어가시면서 고통 중에서 말씀하셨던 말씀들이 몇개 없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이와 같은 용서의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죄수를 낙원으로 받아주셨습니다. 낙원 밑의 연옥에 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낙원 밑의 림보에 오게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낙원 밑의 그 어떤 장소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은 그를 낙원에 자기와 함께 있게 하셨습니다. 온전한 용서를 해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용서를 우리가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용서는 우리를 예수님이 계시는 가장 높은 곳에 올리시는 용서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우리는 또한 그러한 용서의 은혜를 사모하고 그 은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죄인이고 예수님은 항상 옳지 않은 것이 없는 분이십니다. 용서의 은혜를 누리는 방법은 그 예수님의 용서를 기억하면서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절벽을 올라가는 방법을 끊임없이 연습하면서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고 올라가려고 할 때 비로소 올라갈 수 있습니다. 탕자도 아버지의 용서를 구하려고 할 때 아버지에게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 용서를 구할 때에 우리는 예수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용서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승리하신 분이십니다. 그 승리 속에 함께 있는 자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용서의 은혜 속에서 날마다 살아야 하고 그럴 때 예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항상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용서의 은혜가 얼마나 귀중한가를 깨닫고 그 은혜를 항상 묵상하고 사모함으로 용서 속에서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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