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3: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3:1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3: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3: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 구원의 확신이란 시간에 관한 것이 아니라 감정에 대한
것이다.
제가 대학 때 한 기독교 써클에 들어갔었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어떤 강사분을 초청해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었는데, 그분은 구원의 확신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강조하시면서, 우리들에게 당신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느냐고 물으시더군요.
저는 모태신앙으로서 오랫동안 교회에 나가던 터라, 특별한 계기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저 수련회때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던 것이 구원의 확신인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사실 그 이전부터 주님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꼭 눈물 콧물 흘리면서 기도했던 때가 딱히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된 때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결국,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언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고, 다른 사람들은 자신만의 어떤 계기나 사건이나 경험을 이야기하는데, 저는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어서 답답하였고 꽤나 낙심이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면서 구원받는 순간을 기억하고자 하고, 그
순간을 의미있게 생각하려는 시도는 사실 오래 전 부터 시도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늘 구원받는 그 순간을 강조하는 복음전도자들은 따로 ‘구원으로의
초청’이라는 시간을 두면서, 소위 ‘콜링(calling)’이라는 것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도 한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
주님을 영접하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라든지 ‘주님을 영접하고자 하시는 분을 오른 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명한 구원으로의 부름을 통해 인도자는 그 순간을 특별히 강조하여 모월 모일 모시 누구에
복음전파에 의해서 나는 구원을 받았다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만들었고, 사람들도 역시 자신의 구원의 순간을 기억하게
되었고, 그 순간을 잊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만약, 정말로 그 순간의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누구나 다 그렇게
구원을 받게 되었고, 그 고백이 정말로 진실하여 모두 다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 되었다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리고 누구나가 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모월 모일 모시에 어떤 방법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을 다 기억하고 있다면, 얼마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며 힘이 될
것입니까? 의미도 있고 분명한 확신도 생기고....그래서 많은 복음 전도자들이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면서 분명한 이러한 계기를 기억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많은
성도들이 자신이 어떻게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계기와 순간이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늘 기억하며 사는
사람들도 없습니다. 때론 간략한 사건과 상황은 기억날 지 몰라도, 그 날이 모월 모일이며, 몇 시이며 무슨 자세한 상황이었는지는 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제 세례일도 언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세례받던 날은 대충 생각이 나는데, 구체적인 일시나 감정 같은 것들은 이미 잊어버린지 오래입니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요? 육의 생명도 태어난 날짜와 시간이
중요하기 때문에 평생동안 그 날짜와 시간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데, 왜 영의 생명은 그와 같지 않습니까? 왜 그리스도인으로 새로 태어난 날짜와 시간은
있다하더라도 별로 기억되지 못하고, 저같이 심지어 아예 없는 경우조차 생길까요?
이 모든 것은 모두 다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다는 것의 의미를 바르게 깨닫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육으로 태어나는 것과 영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을 동일시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거듭나게 된다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영으로 태어나는 것도 육으로 태어나는 것처럼 날짜와 시간에 치중해야 한다고 잘못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통해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하는 것,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났다고 하는 것의 의미를 다시 분명히 깨달아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만 구원의
날짜에 집착하고, 그 날짜의 경험이 없으면 잘못 신앙생활한 것 같이 느끼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서 그러한 획기적인 경험을 해야만 한다는 잘못된
교훈을 가르치게 되고 말 것입니다.
2. 거듭났다는 것은 하나님을 따라가기로 결심한다는 것이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영으로 새로 태어났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그 참된 의미가 무엇일까요? 8절 말씀을 함께 보십시다.
“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이 구절 한 말씀 속에 우리가 구원의 확신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받음은 바람이 불 때에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언제 바람이 불었고, 언제 바람이
그쳤는지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어느 새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의 구원하심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구원하심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하심을 스스로 받았음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새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을 믿는 사람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과 마찬가지로 알지 못할 때에,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일어납니다.
저 자신의 신앙생활도 그랬습니다. 부모님을 따라 어려서부터 교회에
가던 시절, 그냥 예수님이 그렇게 믿어졌습니다. 그 말씀이 다 진실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주심을 감사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 그렇게 스르르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한 두번 교회에 왔다 갔다 하다보니
예수님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게 되었습니다. 믿게 되는 일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그것이 어려웠으면, 지금도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복음이 그대로 믿어졌습니다. 바람이 불듯이 그 바람을 느끼듯이 말입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조금씩 조금씩 듣게 되던 복음이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믿었습니다.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 사실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로써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3.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주님을 붙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구원받았는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의 구원의 변화는 어떤 사건이나 계기를 통한 것이라기 보다는 바람이 불듯이 그렇게 되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와 같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구원받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새로 태어남을 경험하는 자입니다. 육으로 태어나는 것처럼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했던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을 때, 그 거듭난다는 것이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으로 오해하였습니다. 육의 태어남과 같이 그렇게 영도 태어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무지와 오해를 바로잡아주십니다. 영의 태어남은 육의 태어남과는 다르기 때문에, 사건이나 계기나
결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자연스러운 사역과 부드럽게 이끄시는 그 인도하심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지 못했을 때에는
거듭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지만, 그러한 자연스러움을 깨달았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이 놀라운 새로운 거듭남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거듭난다는 것 하나를 이해하는 데에도 이렇게 오해가
많고 받아들임 없고, 잘못된 나름대로의 억측을 하게 됨으로써 문제가 생기는데, 그보다 더한 것을 말할 때에는 얼마나 더 커다란 오해와 무지가 개입될
수 밖에 없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땅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이러한 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이렇게 잘못된
오해를 하게 된다면, 하늘 일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는 얼마나 제대로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육을 가진 자로서 영이 새로워지는 것에 대해 이정도의
오해가 생긴다면, 새로워진 영에 맞추어 육이 바뀌어지는 하늘의 일에 대해서는 얼마나 큰 오해가 생길 수 밖에 없을까요? 이러한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들의 상상하는 바를 뛰어넘기 때문일 것입니다.
육을 가진 인간의 영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땅의 일이라고 한다면, 새롭게 태어난 영을 가진 인간의 육이 바뀌어지는 것은 하늘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늘의 일은 정말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아무도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단지 그와 같은 하늘의 일에 대해서
이렇게만 말할 뿐이었습니다.
“빌3: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이러한 하늘의 일에 대해서는 더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육이 그대로 있고, 영이 새로워지는 것보다. 새로워진 영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맞추어 육이 새롭게 되는 것은 정말로 놀랍고 신비로운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바라보며 사는 자들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 이러한 변화를 우리에게 일으키실 것입니다.
4.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을 따라나가는 자들이 되자.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거듭남의 변화가 이처럼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과 같다면, 그 거듭난 자가 성숙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장하는 것은 성경책을 몇 번 읽었다든지, 무슨 프로그램을 마쳤다든지,
기도를 몇년 했다든지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이 이처럼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과 같이, 우리들의 믿음의
성장도 이처럼 자연스럽게 찾아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장은 결코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예년이나 지금이나
나의 신앙적 공급과 순종이 동일한데 믿음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성숙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겉사람은 그렇게 자랄 지도 모르지만, 속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인 성숙에는 반드시 영적인 공급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속사람은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부지런히 교회의 인도를 따라 예배로,
봉사로, 경건생활로 영적인 공급을 만족시켜 줄 때에, 어느 순간엔가 보면 그 사람은 상당히 성숙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라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물을 뿌려주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잘 돌보아주는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의 신앙은 잘 자라게 됩니다.
앞으로의 신앙생활에서 성령으로 난 자는 다 이와 같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늘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후닥닥닥 이루어내는 겉으로의 성숙이 아니라, 속사람이 날로 강건하여 지고,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의 커다란 성장을 이루어 내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 거듭남을 얻은 여러분들이 어떤 방식인지는
모르지만 또다시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 부지런한 성숙을 이끌어나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