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1.예수님은 말세에 될 일을 보여주신다.
본 비유는 말세에 될 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셨을 때에 모든 민족을 분별하는데,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오른편과 왼편으로 양과 염소를 구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른편 양으로 구별된 자들은 하나님께 복받은 자들로서 그들을 위해서 예비된 나라를 소유하게 됩니다. 하지만 왼편 염소로 구별된 자들은 저주를 받아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서 예비된 영영한 불로 들어가게 됩니다. 오른편과 왼편으로 구분되는 것은 그들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 심각성과 최종 심판성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한 복음에 관한 내용은 빠져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오른편과 왼편으로 구분되는 중요한 기준이 예수님을
믿는가 안믿는가라는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적은 소자에게 선행을 베풀었는가 아닌가에 의해서 이러한 구분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오른쪽과 왼쪽, 양과 염소의 구분은 우리로 하여금 심각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게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천국에의 기준을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두어 왔습니다. 이신칭의라는 말로 대별되는 이러한 기준은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로마서의 대원칙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행위로
구원받음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 진리 때문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았었고, 그 진리를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 복음의 핵심으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믿음의 중요도는 이 비유에서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오직 적은 소자에게 어떻게 했느냐만 최대의 중점이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난점은 바로 이 말씀을 예수님 자신이 하셨다는 것에서 좀처럼 이해되지 못하는 어려움이 됩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2.예수님은 믿음의 여부가 아닌 실천의 여부를 말씀하신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오른편으로 구별된 자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합시다. 그들에게 주어진 칭찬은 이런 것입니다.
“마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이 얼마나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며
그들에게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을 자격이 있는 자들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행한 사람입니다. 먹을 것을 준다는 행위를
했습니다. 마시게 하는 행위를 했습니다. 영접하는 행위를 했습니다. 옷을 입히는 행위를 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는 행위를 했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는 행위를 했습니다. 이러한 행위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그들이 그러한 행위를 했겠습니까?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자신의 일에만
신경을 쓰지 않고, 그들이 애써서 몸을 일으키며, 수고로이 일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가 바로 주님께 속한 자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와같은 실천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좀더 밝혀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41절 말씀입니다.
“막9:41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누군가 제자들을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대접하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공경하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결코 상을 받지
못하게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상을 반드시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자들에게
행한 선행과 수고와 봉사에 대해 그것은 자신을 위해 한 일이라고 간주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무슨 일인가 한 자들을 주님께서는 칭찬하시는
것입니다. 상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오른편으로 구별하시고 그들에게 약속된 유업을 상으로 내리십니다.
3.주님을 믿는 자들은 올바른 실천을 한다.
그들이 그러한 선행을 하게 만든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속한 자들에 대한 수고는 예수님에 대한 수고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표징이나 증거도 없었지만, 그들은
오직 이것이 주께 대한 봉사요 수고요 헌신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먹이고 입히고 영접하였으며, 나중에 이에 대한 보상을 주님께서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행위를 하게 만드는 원인이었습니다.
왼쪽에 있는 자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이러한 냉혹한 심판의 말씀에 대해서 그들은 항변했습니다. 언제
주님을 그렇게 모멸차게 대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전혀 그러한 행위를 한 적이 없다고 변명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행위를 한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먹을 주지 않았습니다. 마시게 하지 않았습니다. 영접하지
않았으며, 옷 입히지 않았고, 어려울 때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그렇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자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먹을 것을 달라고
마실 것을 달라고 돌보아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습니다. 주님의 상주심을
믿는 자들이라면 무엇인가를 해야했습니다. 그분의 상을 바라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다면, 돌아오는 것은 상을 받지 못함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돌아오는 것은 심판과 저주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인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어서 말씀합니다.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여기에 나타나 있는 미세한 부분에 집중해 보십시오.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주님께 하지 않은 자, 주님께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자, 그러한 자에게 영생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한 자에게는 오직 영벌만이 주어질 뿐입니다.
혹시 그러한 죄인에게도 믿음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믿음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행위를 하게 만드는 원인이 믿음인데, 그는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믿음일까요? 먹이든지, 마시게 하든지,
돌아보든지, 최소한 입술의 고백만이라도 했어야 했는데 그것마저 없다면, 그것이 과연 믿음일까요? 그것이 정말 주님이 적은 소자로 나타나심을 믿는
믿음입니까? 주님이 나를 위해 죽어주시고 내 생명을 구원해주셨음을 감사하는 믿음입니까? 정말 그에게 조금이라도 믿음이 있었다면, 사람의 마음을
판단하시고 들여다 보시는 주님이 그 믿음의 진위여부를 알지 못하실까요?
하지만, 주님은 그에게 가차없는 정죄를 명하셨습니다. 그는 애꿎은
희생자가 아닙니다. 그는 불쌍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신앙의 테두리 안에서 흉내만 내고 있던 자일뿐입니다. 주님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공의로운
판단 앞에서 그들은 주님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자들이며, 주님을 믿지 않은 자들이며, 마귀와 그 사자들과 동일한 자들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영원한 형벌이 내려졌습니다.
4.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나타내어야 한다.
믿음의 기준과 행위의 기준은 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여기에서는 믿음의 기준을, 저기에서는 행위의 기준을 내리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과 행위의 오묘한 조화를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에서 행위의 기준을 말씀하시고, 저기에서 믿음의 기준을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통해서 서로 상충하는 기준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오묘하게 결합하는 기준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두 가지 모두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놀라운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마치 딱 들어맞지 않는 조각맞추기라고 생각되었지만, 궁리하고 연구한
끝에 그 사이에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다른 조각이 들어가야 하고, 그 조각을 넣었을 때에 비로소 정확히 조각이 맞아들어가는 것을 발견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믿음은 행위를 일으킵니다. 행위를 일으키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참된 구원의 기쁨은 눈물을 흘리게 하고, 헌신을 하게 하고, 봉사를 하게 하며, 주를 위한 그 어떤 수고를 감당하게 하는 것입니다.
행위가 일어났는데 그 원인을 알지 못하는 것은 맹목적인 행위의 경우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은 한,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이에 따른 분명한 행위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 행위가 무엇이다고 말하는 것은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오류가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특정한 행위를 지정하지 않습니다. 단지 믿음에는 행위가 따른다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그 행위가 무엇인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습니다. 그저 믿음의 자연스러운 결과로 행위가 일어난다는 것만을 알 뿐입니다.
그러나, 행위가 없다면 믿음 자체를 의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행위를 동반하지 않는 믿음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신앙인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귀와 사단과 동일한 선상에 서는
자들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어떤 일도 하지 않은 자들은 주님의 방해꾼이요, 훼방자요, 대적자들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바로 믿음의 정직한 성격을 보여줍니다. 이신칭의의 복음에 입각한 온전한 의미의 믿음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모든 면에서 일관적이고 합목적적인
하나님의 복음인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주를 위하여 무슨 일이든 하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서 그 자신의 믿음을 무효로 만드는 자들이 되지 말고 주를 위해서 어떤
일이든 하십시오. 특별히 주를 위해 일하는 자들에게 도움과 힘이 되십시오. 결코 그 수고와 노력에 대한 상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영생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합리적으로 생각해도,
이생에서 평생동안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놀고 먹고 쉬면서 살다가, 저생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그 영원한 삶을 누리려고 하십니까? 어떻게 그렇게 자기
멋대로 자기 입맛대로 신앙생활을 하려 하십니까? 주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주를 위해 수고와 봉사를 하십시오. 그래야 여러분들이 맞이하시게 될
영생이 복될 것입니다. 주님의 칭찬이 있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여러분의 상이 크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