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에 존재하는 어려운 ‘상황’과 그로 인해 생겨나는 ‘악한 결과’를 삶 속에서 접하다 보면 우리는 얼른 그 ‘상황’을 바꾸어 주고 싶어지고 재빨리 ‘악한 결과’를 없애버리고 싶어합니다. 그러다보면 자연히 그런 방법에 몰두하게 되고 원인에 대한 이해 없이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아무 거나 막 실행하게 됩니다. 다행히 그중의 어떤 것이 효과가 있다면 다행이지만 이런 저런 것이 효과가 없다면 도리어 문제는 더욱 심각해져 갑니다. 상황은 상황대로 더욱 나빠지고 악한 결과도 더욱 심각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앞마당에 사과나무를 심었습니다. 몇 해동안 나무는 무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나무는 아주 말라비틀어진 이상한 사과를 맺었습니다. 주인은 이상하게 생각을 해서 이 나무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가지고 오래 고민을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상점에 가서 크고 아름다운 사과를 여러개 사가지고 왔습니다. 그런 다음에 일일이 사과나무에서 병든 사과열매를 떼어내고 새로 사온 사과를 달아놓았습니다. 다시 사과나무에는 그득한 사과열매가 열렸고 주인은 흡족하게 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때로 우리는 문제를 이렇게 해결하곤 합니다.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하기 보다는 그냥 현재 상황만 눈가리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물론 쉽기는 합니다. 하지만 매번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더 큰 문제가 반드시 찾아올 것입니다. 지금은 억누르고 무시할 수 있지만 계속 그렇게 하면 도저히 억누르지 못할 그리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문제로 커져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중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문제의 원인을 이해하는 단계로 들어서야 합니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인식하는 것이 상황과 악한 결과를 생각해 보는 단계였다면 이제 원인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감정과 욕구를 다루는 단계입니다. 쉽지는 않지만 결코 손해는 아닌 중요한 과정인 것입니다. 원인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때 파인애플 껍질을 벗기는 것을 생각하시면 마음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지를 쉽게 이해하실 것입니다. 맛있는 파인애플은 딱딱한 껍질 속에 있습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표면적인 감정 안에 내면의 욕구가 있습니다. 감정은 거칠고 딱딱하지만 그 속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감정을 이해하고 벗겨내야 합니다. 그리고 나면 그 안쪽에 있는 욕구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계속 보고 있는 요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그의 ‘악한 반응’을 살펴보았습니다. 그의 악한 반응은 너무나 분노에 가득한 것이었고, 스스로 죽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괴로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실패하는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선지자였지만 전혀 선지자 같지 않았고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전혀 하나님 사람 같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심판을 불쌍히 여겼어야 했지만 오히려 심판 받지 않음을 억울해 했고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대해서 순복해야 했지만 오히려 그 용서하심에 대해 저항하고 비판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된 것은 그의 마음 속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 문제가 감정적인 언어와 감정적인 행동 속에 그대로 표출이 되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그냥 외면할 수 없는 마음의 문제 속에서 이제 우리는 그의 욕구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표면적으로야 당연히 니느웨의 멸망을 원하는 것이었지만, 내면적으로 그의 원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 껍질을 다 벗겨내었을 때에만 그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하나님과 요나의 마지막 대화를 보여줍니다. 요나서는 이 대화로서 끝이 납니다. 이 대화 이후에 요나가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대화 속에 요나가 무엇을 원했으며 그것을 왜 원했는지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짧지만 깊은 이 대화 속에서 요나의 욕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성경적 상담학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비추어서 그 속에 감취어진 깊은 의미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이르셨습니다. “네가 이 박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주님은 이전에 요나가 왜 니느웨 성을 용서해주시냐면서 강하게 항의하며 차라리 죽겠다고 했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는 이전에는 니느웨 성을 인하여 성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박넝쿨로 인하여 성내었습니다. 이전에는 왜 니느웨 성을 용서해 주시냐고 성을 내었고 이번에는 왜 박넝쿨을 죽이시느냐고 성을 내었습니다. 이전에도 성을 내면서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하였고 이번에도 역시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죽여달라고 하였습니다. 동일한 패턴 속에서 그의 욕구가 보이지 않습니까? 그는 도대체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요? 니느웨는 가차없이 죽이면서 박넝쿨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리려는 모습이 있습니다. 니느웨가 용서될 바에는 차라리 죽여달라고 하며 박넝쿨이 죽을 바에는 차라리 죽여달라고 억지를 부리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는 니느웨로 인하여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고 물으시는 하나님께는 대답도 안하고 이 박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고 물으실 때에는 거침없이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볼 때 그가 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지배’를 원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가 기대하는 대로 되어지기를 원했습니다. 니느웨를 심판할 것인가 말 것인가하는 문제도 박넝쿨을 살릴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도 다 자기 뜻대로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는 정말 ‘지배’라는 욕구로 가득한 자인가, 모든 것을 다 자기 뜻대로만 하려고 하는 안하무인의 사람인가 할 때에는 완전하지 않은 그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욕구를 더 들어가 보아야 합니다. 일단 ‘지배’라는 욕구를 이해하고 났다고 해서 그것이 끝은 아닙니다. 주님이 그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해주시는 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마음의 뿌리는 하나가 아닙니다. 그 뿌리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병든 뿌리, 악한 뿌리를 찾고자 한다면 하나만 찾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어느 정도 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참고할만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른 뿌리도 찾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과 생각에서 조금 더 나아가야 합니다. 바로 주님께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주님은 그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판단하는 요나로 끝내지 마십시오. 우리의 생각보다 주님의 생각을 더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보다 훨씬 더 요나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 아들을 아는 것 보다 우리가 우리 딸을 아는 것보다 우리가 우리의 배우자를 아는 것보다 우리가 우리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아는 것보다 더 그를 잘 아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그가 가지고 있는 욕구를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십니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여기에서 중요한 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 한 마디가 요나의 욕구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하나님께서 한 인간에 대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정확한 그의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것은 바로 ‘네가 아꼈거든’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아꼈습니다. 그는 박넝쿨을 아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아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민족을 아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가 문제입니까? 그것은 차라리 좋은 장점이 아닙니까? 아끼지 않는다면 얼마나 허비하겠습니까? 얼마나 무성의하겠습니까? 얼마나 매정하겠습니까? 어떻게 그것이 ‘욕구’가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것이 ‘악한 뿌리’가 될 수 있습니까? 이것이 겉보기에는 괜찮은 것 같지만 진짜 문제인 이유는 그 다음에 있습니다. 주님은 그 ‘네가 아꼈거든’이라는 말은 다음의 이 말과 대치시키고 있습니다. 바로‘내가 아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요나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가 네 것은 아끼지만 내가 아끼는 것은 아끼지 않는구나’ 그렇습니다. 요나는 자신의 것을 그렇게 아까워하면서 하나님 것은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박넝쿨은 죽는 것을 아까워하면서 하나님의 아끼던 니느웨는 죽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물건은 그렇게 챙기면서 하나님의 것은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망가지길 바랬습니다. 자기 자식은 그렇게 잘되기를 바라면서 하나님의 자녀는 차라리 죽어버리기를 바랬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자신의 유익을 누리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희생보다 자신의 마음의 유익을 더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요나의 마음 속에 있던 궁극의 욕구는 이 ‘유익’입니다. 박넝쿨이 있어 유익한 것이 더 좋았습니다. 니느웨가 사라져버려서 마음속의 응어리가 사라져버리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그 유익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뜻도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는 것보다 그분의 사랑을 바라보는 것보다 그분의 희생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보다 그는 차라리 죽고 싶었습니다. 그냥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습니다. 너무나 자신의 유익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니느웨를 아끼는 것은 합당치 않고 자신이 니느웨를 미워하는 것은 합당했습니다. 동일한 니느웨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이 다르니 그는 죽고 싶었습니다. 살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르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너무나 악했습니다. 그의 마음의 뿌리는 너무나 악한 뿌리였습니다.
그는 어쩌면 정말 죽는 것이 나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정말 애초에 죽어버리는 것이 더 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그가 살아서 물고기 뱃속도 들어가고, 왜 그런 사람이 니느웨를 변화시키고, 왜 아직도 살아서 초막을 짓고 언제 니느웨가 무너지나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은 죽고 싶다는 그를 죽여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그냥 죽이시지 왜 그런 악한 사람을 살려서 이 험한 꼴을 당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도 아끼고 사랑하시지만 요나도 아끼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아무도 죽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이런 갈등 속에서 니느웨가 죽든지 요나가 죽든지 하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은 아무도 죽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죽으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니느웨를 대신해서 죽으십니다. 거역하며 거세게 반항하는 요나를 위해 죽으십니다.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시지 않으시고 그에게 천벌을 내리시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그리고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얼르고 달래십니다.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분입니다. 그렇게 아끼시는 분입니다. 그렇게 기회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저와 여러분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바로 요나를 대하시듯이 우리들을 기다려주시고 기회를 주시며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 마음 속의 악한 욕구를 깨달아서 그것을 버리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아무도 죽음에 이르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그 사랑을 깨닫고 우리는 주님의 아끼시는 것이 얼마나 합당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마음 속의 욕구를 버리고 주님의 은혜로 나아가야 합니다. 나는 합당치 않고 주님이 합당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시인해야 합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도와주기를 원할 때에 이점을 기억하십시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이해하고 분석하고 그런 다음 그것을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멀쩡한 사람이 죽어갑니다. 아무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죽고 싶어 합니다. 어떻게 이런 병이 있을 수 있습니까? 모든 의술과 모든 처치법과 모든 치료약을 무색하게 해버리는 것이 바로 이 스스로 죽고자 하는 병입니다. 그것은 심각한 마음의 병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악한 마음의 뿌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보다 더 커질 때 이 병은 시작됩니다. 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그를 잡고 있는 악한 생각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버리게 해야 합니다. 요나의 악한 생각을 아시고 하나님은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주님은 진정으로 그의 마음이 바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잔잔히 그의 마음 속에 오셔서 그 마음을 변화시켜주십니다. 우리도 그러한 하나님의 손길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아끼는 것보다 주님이 아끼시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알게 해야 합니다. 주님의 계획이 얼마나 더 큰지 주님의 능력이 얼마나 더 큰지 주님의 희생이 얼마나 더 큰지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의 마음이 변화되고 악한 마음의 뿌리가 은혜로 덮여집니다. 진정한 치료와 변화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어떠한 자들입니까? 우리가 혹시 요나같은 자들은 아닙니까? 내가 아끼는 것보다 주님의 아끼시는 것을 더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우리가 아는 어떤 사람이 요나와 같은 상황에 있습니까? 그의 마음이 변화되도록 도와주십시오. 그가 자신이 아끼는 것보다 하나님이 아끼시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알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자신의 삶을 파멸시키지 말고 주님의 계획과 능력과 희생을 통해 새로워지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아끼시는 또 한 사람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은 우리가 천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한 하나님의 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놀라운 변화의 도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