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우리는 요나의 이야기를 통해서 문제가 되는 '상황'과 그에 따른 '결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요나의 모습은 악순환되는 양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문제상황과 그에 따른 나쁜 결과를 살펴보기에 아주 좋은 사례가 됩니다. 이제 그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본격적으로 마음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마음은 '감정과 욕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감정을 먼저 이해하고 그것을 벗겨내면 그 안에 욕구가 나타납니다. 이 감정과 욕구를 이해할 때에만이 우리는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면 그 마음을 어떻게 돌릴 수 있을지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지도 알 수 있습니다. 원인을 알면 그 원인에 따른 변화방법을 적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요나의 모습속에서 그의 감정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봅니다. 그는 성을 내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나님은 지금 요나가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우리가 봐도 지금 요나는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의 반응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그는 화를 내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삶에 그는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막 그는 하나님께 죽여달라고 하였고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겠다고 서슴없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화가 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의 감정이고 반응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고 싶어 했으며 죽여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대해서 즉시 어떤 반응을 보이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라고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좀더 그의 마음을 드러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그의 분노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취하시지 않고 기다리신 이유는 그의 마음 속의 욕구를 나타나게 하시기 위해서 이며, 그의 진정한 마음의 변화를 이루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반응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말 뿐만 아니라 행동에서도 나타났습니다. 그는 5절에서 보는 것처럼 성에서 나가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고 하였습니다. 때로 사람의 분노는 말로 나타나지 않고 행동으로도 나타납니다. 어떤 때는 말로 감정을 나타내는 것보다도 행동으로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 더 분명하고 구체적입니다. 그 5절 말씀을 잘 살펴보면 요나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그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읍을 용서하신다고 하셨을 때 그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니느웨성에 뭔가 다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뭔가 다른 일이 일어나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밖으로 나가서 자기 자신은 위험을 피하면서 성의 동편에 앉아 자리를 깔고 초막을 지었습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예전에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처럼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비록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기다리다 보면 니느웨가 멸망하지 않을까라는 한줄기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행동에는 니느웨에 대한 적개심이 그대로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앗수르에 대한 증오와 함께 그 증오를 니느웨 사람들에게 그대로 표출하고자 하는 악한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겼던 것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엄밀히 말해 앗수르에 괴롭힘을 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악행과 불순종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맨처음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경고하신 바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며 패역하게 되면 다른 민족이 그들을 괴롭힐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적은 앗수르요 그 나라의 성읍인 니느웨는 자신의 원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또한 니느웨에 대한 그분의 구원계획을 깨닫지 못하는 한 그가 니느웨의 멸망을 바라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니느웨 성 동편에 초막을 짓고 앉아있는 요나의 감정은 '분노'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이해할 때에 그가 나타내고 있는 행동도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가 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박넝쿨을 보면서 크게 기뻐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침 그늘에 앉아 있는 그에게 박넝쿨은 너무나 안성마춤인 환경이었습니다. 이전에 다시스로 가려고 욥바에 내려갔을 때에 그곳에서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지 않았습니까? 그 때에도 그는 얼마나 기뻐했을까요? 그는 늘 그렇게 기뻐합니다. 자기의 목표를 이룰 수 있게 되는 과정에 대해서 기뻐합니다. 자신의 계획을 이룰 수 있도록 이루어지는 환경에 대해서 기뻐합니다. 그것이 도리어 자신에게 슬픔이 되고 괴로움이 되리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그가 기뻐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것만 기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문제에 대해서 접하게 될 때 가장 먼저 '상황'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상황이 가장 괴로운 것인가를 주목해보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결과'를 보아야 합니다. 그 결과 속에서 어리석음의 악순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악순환의 패턴과 양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나면 어려운 상황이란 한 두번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여러 번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을까요? 악순환이 일어난다는 것은 이해하겠는데 그런 것이 일어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 살펴보려고 하는 것이 그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해야 왜 그런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시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시계가 자꾸만 시간이 안맞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꼭 10분 빨라지거나 느려집니다. 그러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시간을 맞춰주어야 하고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시계를 고쳐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속을 열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계 전문가라면 더욱 쉽게 그 안을 이해하고 고치겠지만 그렇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밧데리는 갈아낄 수 있지 않습니까? 혹은 정말 심각한 문제이면 시계방에 맡길 결심을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속을 들여다 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문제도 속을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속을 들여다 보기 전에는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도 그것을 모르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아무리 사람들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만든 분이 자신의 창조물을 모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통해 하나님의 가르치심 속에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할 때 그 때 비로소 온전히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적 상담학이고 성경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는 방법입니다.
이제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그의 감정을 살펴봅니다. 그리고 그의 '나쁜 열매'가 무엇인지 생각해 봅니다. 그 '나쁜 열매'는 말과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단지 말로만 보여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행동으로도 나타납니다. 또한 행동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말로도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의 말과 행동을 다 잘 살펴보아야 그의 마음이 어떠한 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요나의 경우에도 우리가 그의 말로 분노하는 것만 보면 안됩니다. 그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도 보아야 합니다. 그가 하나님께 대해서 언급한 말도 보십시오. '주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겨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기에는 좋은 말만 나와있지만 사실 그가 화가나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결코 좋게 보이지는 않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자리를 깔고 앉아서 성이 무너지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모습들은 그의 나쁜 열매들입니다. 그의 강퍅하고 분노에 찬 모습입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그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마음은 유독 니느웨에 대해서만 그랬습니다. 그가 전반적으로 항상 분노에 차고 용서하지 못하고 강퍅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오직 앗수르와 니느웨에 대해서만 그렇게 흥분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의 마음에 자라난 악한 가시는 마음 전체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부분, 한 영역에서만 자라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격 전체를 이러한 감정으로 인해 다 매도해버릴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른 부분에서는 은혜롭고 충성스러우며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선지자였을 것입니다. 오직 이 니느웨에 관해서만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 전체를 다 문제시 할 필요가 없고 국소적으로 한 부분만 그렇다고 이해를 해야 합니다.
마음에 나타나는 이러한 악한 가시에 대해서 설명하다 보면 어떤 사람들은 강하게 저항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쁜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자신에게는 좋은 부분도 있다고 항변합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몇몇의 가시가 나타났다고 해서 문제를 전체로 확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분으로 축소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가시만 사라지고, 그런 반응만 없으면 나머지는 너무나 좋은 마음입니다. 그렇게 약간은 비틀어지고 왜곡된 생각만 하지 않으면 나머지는 너무나 온화하고 온전한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악한 가시, 감정, 반응은 그 사람을 더욱 낫게 만들려는 관찰입니다. 이러한 관찰 속에서 마음 속에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를 찾고 그 잘못된 부분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을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분노하고 있는 요나에게 벌을 내리시지 않습니다. 무례하게 대답하는 그에게 오히려 친근하고 자상하게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또한 상황을 만드십니다. 그에게 박넝쿨을 보내 주시는 것도 모두 그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한 깨달음은 앞으로 다음에 우리가 보고자 하는 그의 욕구에 관한 것입니다. 그가 스스로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를 깨닫기 전까지 그의 모습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의 뿌리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기 전에는 결코 열매로써의 가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의 뿌리를 드러내십니다. 또한 그것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조금씩 그의 마음에 다가가시는 것입니다. 사랑과 인내로 주님은 요나의 마음에 다가가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방법을 따르십시오. 우왁스럽게 거칠게 그 마음을 다루지 말고 조심스럽고 사랑하면서 그의 마음을 다루십시오. 그의 분노도 그의 무례함도 그의 비뚤어진 태도도 모두 용납해주면서 그의 마음 속에 있는 뿌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의 태도와 감정에 불편해 하지 말고 과연 그 속에 무엇이 있는가를 더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요나 마음 속에 있던 뿌리를 깨닫게 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어떤 뿌리가 들어있는지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부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자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놀라운 방법을 알려주시고 그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자들 되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