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2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상담의 비전을 가지고 성경적 상담학 내용의 한 부분인 감정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역사적인 스토리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감정에 대해서, 그리고 욕구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중심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때로는 인간의 중심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속담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사람속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감정과 욕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감정을 알아야 하고 그 다음에는 욕구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1.
절망은 바라볼 모든 희망이 끊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미움과 분노에 이어 세번째로 살펴보는 감정은 ‘절망’입니다.
절망이란 무엇일까요? 절망의 사전적인 정의는 ‘바라보는 모든 희망이 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간 순간 소망이 끊어질 때 절망을 느낄 것입니다.
양육문제에서, 신앙문제에서, 학업문제에서, 연애문제에서 등등, 삶의 각 부분 부분에서 소망이 사라질 때 우리는 절망을 느낍니다. 그리고 삶의 모든
소망이 끊어질 때 우리는 죽음의 절망을 생각하게 됩니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살맛이 안난다’ ‘괴롭다, 죽고싶다’ 등등의
말들은 다 절망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밉다, 싫다, 화난다, 열받는다 등의 표현과는 달리 절망은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서 죽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워죽겠다, 화나죽겠다라는 말을 쓰기는 하지만 그로 인해서 정말 죽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절망은 다릅니다. 죽고싶다, 죽을 것
같다, 죽는 것이 낫겠다 등의 절망의 용어는 진짜로 죽음으로 나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절망의 감정들 속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소망이 사라졌음을 아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절망에 빠져있다면 그의 가지고 있던 소망이 없어져 버렸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소망이 사라져 버렸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절망이 가득 넘쳐나는 것이 아니라, 소망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절망감을 버릴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소망을 되찾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개의 사람들은 이러한
감정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절망감을 버리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하고 결국 더 큰 절망감에 빠져들어 버립니다.
예를 들면, 물에 빠졌을 때 중요한 것은 물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물에 자꾸 뜨려고만 하다 보니 결국에는
더 깊은 물로 들어가서 마침내 나오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엘리야는 절망가운데 죽음을 선택하고 살 소망을 잃어버렸다.
오늘 본문 가운데 엘리야는 바로 이러한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그가 절망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배운 대로 하면, 그는 소망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왜 절망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려면, 그가 왜 소망을 잃어버렸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던 소망이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면 비로소 왜 그가
절망했는가가 나타납니다. 그의 절망의 이유가 4절에 나옵니다.
“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그는 죽고자 했습니다. 절망감이었습니다. 그 이유로 그는 자신의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열조보다 낫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죽고 싶었던 것입니다.
조금 더 들어가봅니다. 그러면 왜 그는 자신의 열조보다 낫지 못하다고
생각했을까요? 그 앞서 있었던 사건때문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2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바로 이세벨이 자신을 죽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왕의 부인인
이세벨이 자신을 죽인다고 해서 두려워서 죽고 싶었던 것일까요? 사실은 그보다 더 이전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1 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이스라엘 왕이었던 아합왕은 엘리야가 기도하여 비가 온 것과 그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죽인 것을 아내인 이세벨에게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그런 일들로 인해서 아합왕이 회개하고
이세벨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나라를 다시 만들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변화도 없었습니다. 이세벨은 더더욱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였고 아합은 여전히 이세벨과 결탁하여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와같은 변화되지 않는 모습이 그로 하여금 절망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3.
절망의 이유는 즐거움을 추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엘리야가 왜 절망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소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소망은 무엇이었나요? 그것은 변화와 발전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망을
잃어버렸을 때 엘리야는 절망했던 것입니다. 이제 엘리야가 왜 절망했는지를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엘리야는
죽고자 했을까요? 그런 절망감 때문에 일부러 죽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절망은 그냥 일반적인 절망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소망도 일반적인 소망이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개인적이고 너무나 자기 중심적인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 소망이 사라졌을 때 절망했고,
너무나 절망한 나머지 죽고 싶었습니다. 그 소망 속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바로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애초에 그는 즐거운 소망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에 대한 근거가 바로 9,10절에 있습니다.
“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그는 고백하기를 자신이 가지고 있던 특별한 열심이 있어서 이모 저모 노력했지만 이스라엘 자손은
전혀 변화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자기만 남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도 죽이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죽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호렙산에 한번 와본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열심이 있었습니다. 자기 자신의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열심과 그런 계획으로 이루게 될 미래의 모습에 대한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지자였지만 죽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이부분은 절대로 미화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열심이 아니라 자기의 열심이 있었고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라 자신의 계획으로 똘똘 뭉쳐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원했던 것은 그런 열심과 계획이 이루어지는 즐거움을 원했던 것 뿐입니다. 그러다가 그게 안된다 싶으니까 이젠 ‘죽고 싶어’ 졌던
것입니다. 아무도 그를 죽일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처럼, 절망의 시작은 자기 중심적인 소망을 갖는데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다가 그 소망을 잃어버릴 때 절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절망을 극복하지 못하면, 다시 말해 진실된 소망을 다시 찾지 못하면 그는
그냥 절망에 빠져 버리게 됩니다.
4.
우리는 즐거움을 추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해야 한다.
이러한 절망에
빠졌던 엘리야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면서 다시 일어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소망이란 보잘것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엘리야처럼 열조보다 낫고자 하는 마음, 내가 사역하면 달라야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소망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하시는 말씀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내려주십니다.
“15 여호와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로 말미암아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하나님은 엘리야가
자신의 소망을 따라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도 역시 그러한
뜻을 받아들였을 때에 로뎀나무 밑에서 죽는 자가 아니라 살아서 병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유명
사립대인 하버드대에 있는 종합 도서관인 와이드너 도서관(Widener Library)의 설립 배경은 특히나 감동적입니다.
와이드너는 부잣집 출신인 하바드 졸업생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07년 하버드를 졸업하고 5년 뒤 타이타닉에 승선하게 됩니다. 행복할 것 같던 크루즈
여행이었지만 타이타닉의 결과처럼 슬픈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타이타닉호가 침몰하면서 와이드너가 함께 최후를 맞은 것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하버드 사랑을 떠올리며 모든 재산을 하버드에 기부하게 된다. 그렇게 설립된 것이 바로 와이드너 도서관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부 당시 와이드너 부인이 조건을 달았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하버드 입학생은 졸업 전까지 25M 이상 수영을 할 수 있을 것'이었다고
합니다. 구조선까지의 25미터를 수영을 하지 못해서 아들이 죽었기 때문에 수영을 조건으로 내세웠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생애의 자포자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 어머니에게는 또다른 아들같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그 마음이 너무나 귀하여서 오늘날의 명문대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자신의 절망은 때로 부끄러운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가질 때 절망은 사라지고 새로운 소망을 갖게 되며 이로 인해 놀라운 유산과 결실이 맺혀질 것입니다.
절망이라는 감정에
빠져서 하나님의 뜻을 버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으로 더욱 새로워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