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 삶속에서 진로의 문제는 합의의 문제이며 의견을 일치시켜야 결론이 나오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상담의 비전을 가지고 나아갈 때에 알아야 하는 것은 상담에 대한 내용입니다. 우리 교회가 상담에 비전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 교인이 상담에 지식이 없다면 이 비전을 이룰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함께 해나가면서 비전에 동참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비전에 동참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상담주제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반드시 필요하게 될 때가 있으니 잘 들어두시고 나중에 유익을 얻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는 6가지 영역이 있고 그 영역에는 6가지 분류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분류중에 지난 주 [순위]를 보았고, 이번 주 [합의]를 보려고 합니다. 합의라는 분류는 말 그대로 의견을 일치시켜야 하는 문제에 해당합니다. 예를 들면 가족간의 의견을 일치시킬 때, 혹은 친구들 간의 의견을 일치시켜야 할 때, 이러한 합의의 분류가 사용됩니다. 뿐만 아니라 진로 문제를 결정할 때에도 합의의 분류를 사용합니다. 하나님과 타인과 자신이 모두 원하는 것을 찾는 것이 바로 합의의 문제입니다. 복잡한 문제라고 하더라도 좋은 관점을 가지면 효과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도구 중에도 망치가 있고 펜치가 있어서 용도에 따라 사용이 달라지는 것처럼, 문제도 어떤 분류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결과가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2. 바울은 분명하지 않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속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러한 [합의]의 문제를 잘 볼 수 있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나온 사도바울의 경우입니다.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진로의 문제를 겪고 있었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6절에 보면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여기서 아시아라고 하면 동아시아가 아니라 소아시아입니다. 그래서 지중해 연안 지역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안디옥에서 전도여행을 출발했는데 루스드라에서 소아시아지역을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다른 곳에 뜻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일을 막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계속해서 소아시아지역을 향해 씨름하고 있었습니다. 그 안타까운 갈등을 7절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
이때 생겨나는 고민은 누구의 뜻을 따를까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원하는 바로 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영, 즉 성령께서는 막으시고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성령님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성령의 기뻐하심 속에서 일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따르는 것은 아무 소원도 갖지 않는 것일까요? 멍한 상태에서 일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우리가 그 뜻을 찾고 구하며 따를 수 있도록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빨리 우리의 뜻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3. 우리가 자신의 원하는 것만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의 원함을 생각한다면 지혜로운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갈등 중에 있을 때에 바울에게는 새로운 전환점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가 꾼 꿈의 내용이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들의 간청을 들었습니다. 소아시아에서 더 나아가 더 멀리 있는 사람들인 마게도냐 사람들이 자신을 부른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소아시아정도로 머무르고 싶었지만 더멀리 있는 사람들이 그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런 꿈을 꾸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다른 사람들의 소원을 알게 하십니다. 그들의 간절한 부름을 듣게 하십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자는 하나님 만이 아닙니다. 내가 있어야 하는 곳, 내가 도와주어야 하는 사람들, 내가 섬겨야 하는 대상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바라볼 때에 나의 갈 길이 정해 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두가지를 염두에 두면서 결정을 내리고 있습니다. “10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여기서 ‘인정함이러라’를 주목해 보십시오. 그는 확실한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의 자발적인 결정을 원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상황과 그 의미를 기억하면서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이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셨구나!’ 그것이 바로 결론이었습니다. 그럴 때 바울은 가장 좋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바로 나도 좋아하고,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사람들도 원하는 결론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찾을 때 가장 열매가 넘칩니다. 언제나 모든 의견이 종합되었을 때 가장 합리적이고 현명한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합의]의 문제를 이렇게 해결하기를 원하십니다.
4.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간 위대한 사람들을 본받는 자들이 됩시다.
미국의 메사추세스 노드햄토 공동묘지에 가보면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무덤과 그 옆에 데이비드를 사랑했으나 일찍 죽었기 때문에 결혼하지 못한 아름다운 여인 제루사 에드워드의 무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를 위한 데이비드의 원대한 소망과 기대는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한 채 그는 죽어 보잘것없는 무덤 속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그의 노력과 일의 결과는 지금 거의 남은 것이 없고 그의 헌신적인 선교의 기억과 수십 명의 인디언 신자들이 고작 그가 이루어 놓은 전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진정 그는 한 알의 밀알처럼 썩어져 그의 이름조차도 잊혀가고 그의 사업도 모두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교도의 성자라고 일컫는 요나단 에드워드가 데이비드를 자기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그의 짧은 인생을 조그만 책으로 만들었을때 이 책은 미국 전역에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불러 일으켰고 전도의 불을 붙였습니다.
영국의 캐임브리지 대학의 학생이었던 헨리 마틴도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캠브리지의 수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습니다. 그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읽고 난 후의 감동을 받아서 하나님께 헌신하였습니다. 또한 브레이너드의 희생적인 선교사역에 큰 자극을 받고 캐리의 인도사역자 모집에 적극 응하게 되어 해외선교를 인생의 유일한 목표로 삼게 되었습니다. 31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던 헨리는 그 자신이 말한 그대로 인도를 위해 자신의 삶을 불태웠습니다. 동인도회사의 전속목사로서 커다란 선교적 업적을 이룬 사람이 바로 헨리 마틴이었습니다. 그는 1806년 인도에 도착하여 1812년 죽음에 이르기까지 매우 짧은 기간 동안만 사역했으나, 중앙아시아에서 활동한 선교사 중 최고의 성경번역가 되었습니다.
이 둘의 동일한 점은 위대한 일로 나아간 자들이 아니라 작은 일로 나아간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오히려 위대한 일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일로 나아가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 합의의 문제를 해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상담적인 모든 문제에서 [합의]의 문제를 잘 해결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의 뜻을 이루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a적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