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상담비전에 이어 우리가 함께 보려고 하는 비전은 전도비전입니다.
전도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의 최종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상담도 역시 전도와 연결이 됩니다. 불신자들에 대한 진실한 상담이 결국은 하나님께 마음을
여는 데로 연결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성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더욱 성화되는 것도 역시 더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데
영향을 줍니다. 반대로 우리가 발전되지 못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생전에
100명을 주님께로 인도했다 하더라도 우리 때문에 1000명이 예수님을 믿지 않으려고 하게 된다면 결국 우리는 악한 일을 한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전도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더욱 성숙한 자가 되기를 소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소원을 가지고 사람이
어떻게 전도되어지며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가를 이해한다면 더욱 성숙한 자가 되어질 수 있습니다. 단지 전도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도의 의미를 깨닫고 그 의미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은혜 밖에서 헤매던 한 사람을 전도하신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전도하기를 명해주신 분이 아니라 전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친히 사람들을 전도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전도를 어떻게 하는 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의 모습은 우리에게 전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하는 좋은 방법이 됩니다. 그것은 주님이
여리고로 들어갈 때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1,2절입니다.
“1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주님이 여리고에 가시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에 동반하는 것은 그곳에 구원받을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모두가 다 여리고에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하셨지만 유독 삭개오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그 바램이 간절했습니다. 그는 비록 세리장이어서 대중의 멸시를 받았고, 부자라서 믿음과도
거리가 멀어보였습니다. 지금 당장은 복음에 거리가 있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했다는
것입니다.
“3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왜 그는 예수님께 관심이 있었을까요? 그는 말 그대로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도 그는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키가 작고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아서 그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단순히 예수님을 보는 것에 대해서
간절한 마음이 있었을 뿐이었지만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삭개오를 그냥 두시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씀을 사모하며 복음을 간절히 추구한 것도 아니었지만
예수님은 그를 눈여겨 보셨습니다. 그는 그저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뽕나무에 올라간 것 뿐이었지만 예수님은 그것이 귀한 믿음이라고 보셨습니다. 그
믿음은 그저 예수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 뿐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우리 삶속에서 바로 그렇게 하나님께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용기를 내지도 않습니다. 삭개오가 키가 작아서 사람들에게 보이기 어려웠던 것처럼 하나님의
일들에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숨어있는 자를 찾아내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여리고로 가실 때 뽕나무에 올라가 있던 삭개오를
눈여겨 보시는 것처럼 우리도 그러한 자를 눈여겨 보고 그런 사람들에게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다니는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 표를 보십시오.
[1관계인식]
질문1.교회 다니세요?
질문2.어느교회 다니세요?
<비교인>
<교인>
이럴 때 가능한 첫 번째 질문은 교회 다니는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인지 혹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인지가 결정됩니다. 좀더 정확한 확인을 위해서 우리는 두번째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어느 교회에 다니는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욱 확실하게 교회를 다니는지 아니면 다니지 않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교회가 작은 교회인가 큰 교회인가를 물어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교회가 복음에 충실한 기독교의 교회인가 아니면 이단이나 혹은 이교의 교회인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관심을 가지고
질문을 한 그 사람이 비교인의 위치에서 출발하는지 혹은 교인의 위치에서 출발하는지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시작된 복음에의 과정은 우리의 삶속에
아주 중요한 기회를 얻게 합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만나느냐 못만나느냐를 결정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삭개오에 대해서 나중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구원이 삭개오에게 임했습니다. 삭개오는 잃어버린 자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놀라운 구원을 통해서 그는 아브라함의 자손임이 나타났고 인자의 오심이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신 것도 바로 이러한 의미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것이 이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한 사람들을
통해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임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구원이 나타났을 때 우리는 너무나 기쁩니다. 인자의 오심이
의미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오신 것이 의미를 갖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가치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우리 자신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 속에서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은 바로 자신의 구원의 의미를 나타내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전도한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전도한 경험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찾아내려고 했던 노력들 조차 우리에게 너무나 귀중한 일이 됩니다.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 애쓰는 때가 있습니다. 산에서 조난당한 어떤 사람을 찾기 위해서 수색대가 그를 찾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길을 잃어버려서 헤매는 아동을
찾기 위해서 여러 사람들이 동원됩니다. 때로는 집을 나간 가족을 찾기 위해서 온 가족과 친척들이 여기 저기를 헤매며 다닙니다. 자신이 찾지는 못했고
어디선가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일에 동참한 모든 사람들은 간절함과 안타까움을 가지고 함께 협력하였고 그 자체로도 잃어버린 사람의 가족이나
부모에게는 너무나 큰 감사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찾기 위한 노력 그 자체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일을 한번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간절함을 품고 있었던 삭개오를 눈여겨 보시고 그를 부르시는 것처럼 우리도 숨어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찾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들은 불신자일 수도 있고 신자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찾는 것입니다. 묻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기를 시작하게 만듭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잃어버린 한 사람의 하나님의 자녀를 찾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도 하나님이 증거되고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서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성취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한 사람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기뻐하심이 나타나게 되는 그 경험을 하게 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