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19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충만은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에게 (충만)하게 하시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보려는 하나님의 은혜는 ‘충만’입니다. 충만이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기는 하는데 막상 충만의 은혜가 무엇인가 하면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충만충만이라는 표현도 많이 있기는 하지만 정작 무엇으로
우리가 충만하게 되는지, 충만하다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본문말씀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충만이란 ‘하나님의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에게 충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표현이 나올 수 있을까요? 성경구절을 함께 살펴 봅시다. 19절입니다.
“19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가 흔히 아는 충만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그것은 ‘높이’일 뿐입니다. 혹은 ‘넓이’일 뿐입니다. 한 부분의 충만이 전부라고 생각하였지만 사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을
생각한다면 그 충만은 계속 이어집니다.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도 끝도 없다는 것을깨닫는 것입니다. 비로소 그것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다를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에게 바다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사막을 한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에게 사막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진정한 바다는 사막은, 산은 한도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그 무한함을 이해할 때 비로소 본질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충만도 그와 같습니다. 그것이 비로소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2.바울은 하나님의 (은사)로 충만하게 하심을 받았다.
바울은 자신의 신앙적인 은혜를 충만하게 받았음을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3장에서
그는 자기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후3: 1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그가 정말로 본 것은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히 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 감히 전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니, 그것은 감히 그것을 전하는 말에 비하면 더욱 엄청난 말입니다. 종종 천국에
갔다오고 지옥에 갔다 온 사람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감히 전할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바울은 그보다 더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고
그의 이야기는 전하지 못하게 하시는 허락하지 않으시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만큼 그는 하나님의 은사에 충만함을 얻었습니다. 그럴 때 그 모든 것을
경험하고서 고백하는 것은 그와 같은 한도 끝도 없는 하나님의 충만함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충만 속에서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깨닫게 됩니다.
3.충만을 사모하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심을 기억하자.
진정으로 충만을 경험하고 진정으로 충만을 사모하는 자는 그 무한함을 깨닫는 자입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한번 성령의 능력을 맛본 다음에 돌아서는 자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단 한번의 경험만으로
모든 것을 해본 사람처럼 말하는 자는 진정한 충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사기를 치는 사람들은 보면 전혀 경험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듣고 본 약간의 경험이 있습니다. 중퇴를 했거나 동종업계에 종사했었거나 뭔가 경험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것을 부풀려서 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유익을 추구합니다. 그러한 연약한 자들과는 달리 진정으로 충만한 자들은 그 충만의 무한함에 기뻐합니다. 그 속에서 새로운 가치관을 얻게
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16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7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결국 그 풍성한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그 마음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의 시각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세상을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불쌍하게 바라보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눈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마음에 대해서 우리는 야고보서의 증거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그 긍휼하심을 깨닫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충만속에서 강팍함을
얻는다면 진정한 충만이 아닙니다. 충만속에서 연약한 자들을 불쌍히 여길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관점과 시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4.(스데반)은 충만함으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을
보았다.
충만함을 받아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을 깨달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 주님의 긍휼을 이해했을 때 천사의 얼굴 처럼 되었습니다.
그는 바로 스데반입니다. 진정한 충만이 그의 천사의 얼굴처럼 된 모습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럴
때 그는 자신을 죽이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 7: 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러한 말은
그가 성령에 충만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속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긴다면 그것은
우리가 충만하기 때문이지 결핍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할 때 비로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 충만하게 채워져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자는 배가
부르면 동물들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격동시켜도 우리가 은혜로 충만하면 우리는 꿈쩍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은혜가 충만하게 차기를 사모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그 충만함으로 하루종일 충만할 것입니다. 한주 내내 충만할 것입니다. 그 충만을
계속 사모하고 바라고 구하는 자들이 됩시다. 그래서 그 무한하심에 빠져봅시다. 그 속에서 온전한 은혜를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