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1.원리: 용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 중에서 ‘용서’의 은혜는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가장 접하고 싶지 않은 것이기도 합니다. 기도원이나 수련회나 부흥회에 은혜받아서 눈물 콧물을 쏙 뺐다고 한다면 대개의 경우
이 ‘용서’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가장 친숙하기는 하지만 또한 가장 어색하기도 한 이유는 이 은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련회나 부흥회등과 같이 특별히 준비된 상황이 아닌 때에는 쉽사리 이 은혜를 사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속에서 이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나를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생각하게 되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가 힘들기는 하지만 일단 그렇게 해서 은혜를 받게 되면 우리 삶 속에는 놀라운 용서의 은혜가 흘러 넘치게 됩니다.
특별히 용서의 은혜가 본질적으로 어떤 은혜인가를 깨달으면 그리 어색한 은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용서의 은혜는 하나님께 더욱 본질적으로 나아가게 되는 길이 됩니다. 마치 목욕하는 것이 처음에는 불편하게 느끼지기도
하지만, 한번 맛을 들이면 날마다 목욕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씻을 수 있다는 것이 더할 나위없이 기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13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하나님은 범죄함과 육체의 무할례로 인해서 죽었던 우리들을 주님과 함께 살리셨습니다. 그 살리심은 그냥 살리심이 아니라 모든 죄를 사하셨기 때문에 살리신 것입니다. 병이 낫게 되는 것은 병을 모두 치료하였기
때문에 나은 것이고, 교도소를 나오게 되는 것은 그 죄값을 다 치루었기 때문에 나오는 것처럼, 다시 살아난 것은 죄를 다 사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것이 용서가 가장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2.원리: 용서는 또한 죄사함 이후의 (죄)의 (습관)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용서의 은혜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죄사함을
받고 난 다음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의 습관을 버리고 의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게 합니다. 용서는 죄의 습관의
반복을 허용해주는 장치가 아닙니다. 다시 새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죄를 지어도 된다는 허용의 의미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용서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죄성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는 14절에 그 의미가 잘 나와 있습니다.
“14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우리를 거스리고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라는 것은 율법을 의미합니다. 율법에 의해 우리는 모든 죄의 범죄자가 됩니다. 법이 없다면 범법자도 없지만 법이 존재하기 때문에 범죄자가 생깁니다. 이러한
범죄의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그 율법을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시는 것으로 해결하십니다. 도말하신다는 것은 영어로 ‘cancel 취소하다’의
의미가 되고 제하여 버리신다는 것은 ‘take it away 가져가 버리신다’로 해석됩니다. 이제 이렇게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신 그 율법이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님에 주목하십시오. 그것을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으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용서받을 만한 자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온전한
용서를 행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용서의 은혜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율법이 완성되어 집니다. 완성되기 때문에 사라지게 됩니다. 용서의 은혜는 결국은 과거의 죄의 습관을 변화시키는
것이 됩니다. 율법까지만이 아니라 율법을 넘어서는 온전한 십자가로 나아가게 됩니다. 입양을 온 자녀들이 양부모의 규칙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양부모의
사랑속에서 살때 진정한 자녀가 됩니다. 애플 컴퓨터를 설립한 스티스 잡스는 양부모밑에서 자랐지만 친부모보다도 더 큰 사랑과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의 진짜 부모는 양부모님밖에 없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회고하였습니다.
3.방법: 우리는 용서의 은혜 속에서 (죄)에 대하여 (인내)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율법을 만족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행하고자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율법까지만 행하는 삶은 사라졌습니다. 새마음과 새언약으로 우리는 십자가를 따르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온전히 십자가를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한 삶은 우리에게 진정한 인내를 이루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용서를 바라보면서 인내로 나아가는
삶을 이렇게 말합니다.
“살후3:5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또한 히브리서에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가 바로 용서의 은혜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그리스도의 인내를 생각하고 그 인내의 마음을
본받을 수 있습니다.
4.사례: 빌레몬은 오네시모에 대해 자신의 (권리)를 버리고 (자유인)으로
맞이하였다.
빌레몬서에서
빌레몬은 사도 바울의 간곡한 부탁을 받았습니다. 바로 종 오네시모에 대해서 그를 용서하고 받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빌레몬서1장입니다.
“9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10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
16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17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찐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하고
18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율법으로 하면
바울은 빌레몬에게 그저 억지로 오네시모를 용서하게 할 수 있을 뿐이었지만 십자가의 도의 은혜로 할 때 빌레몬에게 그를 형제로 받아들이는 것을 권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 십자가 은혜 속에서 도말된다는 뜻입니다. 정말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용서한 뒤 잘 대해주었습니다. 진정한 용서를 깨달았기 때문에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용서의 은혜를 사모하여 그 은혜를 통해 진정한 인내의 마음을 갖는 자들이 됩시다. 그리스도께서 용서를 통해
모든 백성을 얻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용서를 바라보며 인내할 때 많은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