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3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14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18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1.원리: 희생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것이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하나님의 세 번째 은혜는 ‘희생’입니다.
하나님이 이 놀라운 은혜는 우리에게 희생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진심으로 깨닫게 해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희생을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게 합니다. 구체적인 하나님의 희생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이러한 희생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 대신에 살아날 수 있었으며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원리를 예수님께서는 선한 목자와 양의 관계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11절입니다.
“11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왜냐하면 이리가 달려들
때 선한 목자는 죽을 힘을 다해서 양들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서 삯군들은 그냥 도망가 버립니다. 양이 죽던 말던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양이 자기의 사랑하는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 사랑하는 것은 자기 생명입니다. 그래서 삯군들은 그냥 도망가버리고 양들은 이리에 의해서
늑탈을 당합니다. 이러한 삯군의 모습이 반하여 선한목자는 목숨을 다해서 양들을 지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선한 목자가 바로 자기 자신임을 말씀하십니다.
“14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행하시는 이유는 양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양도
목자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아시고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 진실한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의 관계가 바로 예수님과 그 사랑하시는 양과의 관계입니다. 희생이란 단지 얼마나 희생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깊은 관계였는가를
보여줍니다. 희생하시는 예수님이 얼마나 고생했고 얼마나 힘들었으며 얼마나 괴로움 당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사랑했고 얼마나 관계가 깊었으며 얼마나
친밀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이 진정한 희생의 의미입니다.
2.예화: 선한 목자는 (양)들을 (돌아보)며 (인도)하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선한 목자는 바로 이러한 의미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단지 희생을 통해 목숨을 버릴 뿐만 아니라 다시 희생을 통해 그들을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16절입니다.
“16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주님은 이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며
양들을 또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저 모든 것을 포기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취하시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모든 것을 다
얻기 위해서입니다. 결국은 양들을 돌아보시며 인도하시기 위해서 이 모든 희생을 감당하시는 것입니다.
희생이라는 것을 단지 고통당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예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희생이 인도하고 돌보는 것임을 기억한다면 비로소 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감당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내와의 갈등을 회복하기 위해서 한 남편이 마라톤 대회에 출전한다고 해보십시오. 등산 대회에 출전한다고 해보십시오. 나름 고생과 어려움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로 인해 아내와의 갈등을 회복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희생은 단지 고통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죽으셨고 또한 인도하셨습니다.
정말로 자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3.방법: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 속에서 (화평)을 누릴 수 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화평’입니다. 하나님은 선한 목자로서 우리를 그렇게 돌보시고 인도하시는데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움과 절망에 빠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희생을 너무나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속에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마음은 ‘화평’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돌보심을 기억하면서
우리를 지금도 돌보시고 인도하시며 지키심을 믿고 그 속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절을 함께 봅니다.
“롬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이러한 믿음이 우리에게 있을 때에 우리는 진정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화평은 확신입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확신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우리를 지키시는 선한 목자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한 할머니가 시골길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승용차 운전자가 차를 세우고 할머니를 태워드렸습니다. 그러나 차 속에서도 할머니는 여전히 짐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동차를
얻어타는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어떻게 짐까지 신세를 지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만약 화평을 누리지 못한다면 마치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그 속에서 화평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화평까지 누려서 되겠느냐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4.사례: 베드로는 (사단의 시험)을 이기고 (양)들을 돌아볼 수
있었다.
베드로는 양을
돌아보는 일에 있어서 사단의 시험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예수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했는데 어떻게 다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겠느냐고 자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세번 시인하게 하시고 다시 양을 맡겨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사탄의 시험이란
자책감에 못이겨 그만두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희생은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와 눈물과 생명이 다함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부족함으로 인해서 쓰러지거나 어려움 당하는
것에 대해서도 주님은 희생을 보여주십니다. 그 희생을 통해 우리는 절망과 두려움이 아니라 화평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희생을 보여주시는
진정한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희생의
은혜를 생각하며 하나님께로 더욱 나아가는 우리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화평이
우리 삶속에 더욱 넘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