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상담]] 46고전 9;25-27 절제는 더 큰 선을 위해서 참는 것이다2Loading the player... [크게보기]
46고전 9;25-27 절제는 더 큰 선을 위해서 참는 것이다2_2c
2020. 10. 18. 주. 주일오후. 온라인 설교
*개요: 상담비전,
[고전]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고전]9: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오늘 살펴볼 그리스도인의 실천덕목은 ‘절제’입니다. 성경적 상담의 6가지 실천덕목 중에서 절제는 3번째에 해당합니다. ‘7실천: 충성, 온유, 절제, 경건, 덕행, 우애’ 절제는 ‘정도에 넘지 아니하도록 알맞게 조절하여 제한함’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어로 ‘self-control’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절제의 덕목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맛을 내기 위해 필요한 덕목입니다. 마치 요리사가 맛을 내기 위해서 소금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처럼 이러한 절제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맛을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검소나 검약, 혹은 절약정신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서 목표를 가지고 그 인생의 목표를 살고자 할 때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내는 모습입니다. 또한 그것은 성령 안에서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를 맺을 때 나타나는 덕목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래서 예수님을 정말 믿고 의지하기에 이러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러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 때문에 이러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절제의 열매를 맺게 되기를 소원할 때 우리는 가장 완전한 선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열매는 바로 그럴 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절제는 가장 큰 선을 위해서 참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절제의 구성요소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가 있습니다. *절제의 구성요소 1. 선을 주도함 2. 선에 동참함 3. 중립 4. 악에 동참하거나 주도함 이러한 네 가지 구성요소 속에서 절제의 의미를 생각하면 더 큰 선을 주도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과정이 바로 절제의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장 큰 선은 바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삶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행하면서 다른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던 고귀한 선을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선으로 이끌고자 노력하는 것이 바로 절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에서는 우리에게 바로 그 절제의 의미를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고전]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절제를 하지만 그것이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는 절제라면 그 절제는 썩을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썩지 아니할 것을 얻기 위한 절제라면 그 절제는 많은 것을 얻게 만들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썩을 면류관은 헬라어로 ‘φθαρτός στέφανος (phthartos stephanos) 라고 합니다. 고대 올림픽에서 월계수로 관을 만들어 우승자에게 머리에 씌워주던 그 면류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대 올림픽에 출전하는 자들의 절제를 생각해 보면 지금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의 준비와 절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종목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또 노력합니다. 준비하고 또 준비합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한순간도 쉬지 않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냅니다. 그러한 절제를 통해서 결국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겨냈다고 해서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언젠가 썩을 면류관 뿐이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운동경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이 모두 썩을 면류관을 향해서 나아가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사라지는 때가 될 때 우리의 삶은 허무하기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인생은 썩을 면류관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은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가장 큰 선인 그리스도께서 주실 면류관을 바라보며 절제하였습니다. 그 면류관에 대해서 성경은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벧전]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벧전]5: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벧전]5: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썩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자장이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면류관입니다. 그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나아갈 때에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온전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절제하면서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절제의 결실은 바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시들지 않는 영광스러운 면류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든 것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얻는 시간이 시작됩니다. 그 때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절제를 하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선을 주도함을 생각하기 어렵다면 그 다음에 선에 동참하는 것이라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계속해서 절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 세상이 주는 면류관을 바라보며 살아가면서 그 속에서 절제하며 또 절제하고 있지만 우리는 전혀 다른 면류관인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을 바라보며 절제하는 이유는 최소한 예수님이 이루신 그 구원의 길에 동참하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본질적으로 절제의 열매를 맺으면서 바로 예수님이 가는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이 바로 우리가 가야하는 길의 방향입니다. 그 방향은 예수님이 이루셨던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예수님의 선에 대한 동참을 위해서 우리가 행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하는 것으로서의 절제’입니다. “[고전]9: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절제란 향방 없는 것 같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허공을 치는 것같이 싸우는 것도 아닙니다. 절제를 위해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결과를 향해서 스스로를 절제해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싸움의 대상을 발견하지 못하고 허상, 허공을 향해서 혼자 하는 것도 무의미합니다. 그 절제는 자기가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발전과 성숙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들에게 간섭하거나 다른 일들에 참견하는 것이 절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절제를 말할 때 자신이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열심히 전파하였지만 사실 자기 자신의 준비가 미흡해서 그 스스로는 도리어 버림이 되어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고 하나님이 칭찬해주시지 않는 것이 되지 않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진정한 절제는 바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주장할 때에 그는 교황에 대해서 이를 악물면서 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는 자신의 두려움과 싸웠습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을 얻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가 말하던 ‘은혜에 의한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가 참된 진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정말 구원을 얻는 것이 참된 진리일 때 우리는 세상의 주장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을 구하고자 할 때 우리는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삶을 살고자 할 것입니다. 그 모든 절제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한 마리의 어린 양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주님은 절제하시면서 오직 세상에 공의를 이루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목표로 나아가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서 외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억울한 감정을 보이기 위해서 행동하는 자들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달리는 자들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그 모든 것을 절제하면서 우리는 오직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절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은 것이 되며 그로 인해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바로 자기 자신 속에서 나타나게 할 것입니다. 결국 그로 인해서 썩지 않는 면류관을 얻는 자는 바로 나 자신이며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자도 바로 나 자신입니다. 다른 사람의 성장과 발전이 아니라 나 자신의 성장과 발전이 결국 진정으로 이기기를 원하던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선에 동참하는 삶이 아니라면 절제는 중립이나 혹은 악에 동참하거나 혹은 악을 주도하는 삶에서의 의미가 생깁니다. 하지만 그 방향이 달라집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삶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나오고자 하는 삶이 됩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마술사 시몬은 사도 베드로에게 돈을 드려서 성령의 역사를 사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악한 생각에 대해서 베드로는 꾸짖었고 경계하였습니다. “[행]8:21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행]8:22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선을 따르지 않는 중립이나 적극적으로 악에 참여하는 모습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선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며 기도한다면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구원의 소망을 얻게 하십니다. 악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중립이고 이미 들어간 악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는 것이 악의 동참에서의 절제의 의미입니다. 악을 거부하고 그로부터 나오려고 할 때 절제의 의미가 나타나고 악을 수용하고 그 속에 머물고자 할 때 절제의 의미가 사라집니다. 우리는 이렇게 선과 악의 다양한 위치에서의 절제의 의미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절제의 의미를 깨닫고 더욱 큰 선을 추구하고 더욱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온전한 절제의 열매를 맺어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열매가 여러분의 삶에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으로 나타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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