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눅22; 39-44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심_5
2025. 4. 18. 금. 금요철야. 우림교회. 고난주간.
*개요: 53희생
[눅]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눅]22:40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눅]22: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눅]22: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눅]22: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눅]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부활절 전에 지키는 고난주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일주일 기간을 의미합니다. 고난주간의 시작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청결하게 하셨습니다. 예비된 다락방에서 마지막 만찬을 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가룟 유다가 와서 예수님을 배신하였고 군병들에게 끌려가 대제사장에게 재판을 받으셨고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후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 모든 일이 고난 주간에 이루어졌고 그리스도인들은 고난 주간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묵상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때를 기념하는 것이 바로 부활절입니다. 부활은 죽으심 다음에 오는 것이기 때문에 부활을 기뻐하는 것은 죽으심을 슬퍼하는 것과 함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을 슬퍼할 때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고난주간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오늘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모습입니다. 죽으심을 의식하지 않았다면 그 모습은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적인 모습이었지만 사실 그 다음에 죽으심이 있었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가장 처절하고 절박한 기도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서 예수님은 온전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39절부터 함께 읽어봅니다.
“[눅]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눅]22:40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눅]22:41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예수님께서 감람 산에 가신 것은 습관을 따른 것이었지만 거기서 기도하시는 모습의 수준은 두 번 다시 없을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일생일대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주님을 의지하려는 마음의 기도였습니다.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는 것은 제자들을 다가올 고난의 시간에 준비시키시려는 의도이기도 하였지만 예수님 자신도 그 고난의 시간을 준비하시는 목적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중요한 시간에 유혹에 빠져서 잘못 결정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기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던 내용이 성경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유혹과 씨름하고 있었고 기도를 통해서 어떤 유혹에 빠지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셨는가가 나타납니다. 42절입니다.
“[눅]22: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내용은 아버지의 뜻이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아버지의 뜻대로 이 잔을 마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내내 기도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과 나의 뜻 사이에서 기도하시는 것이었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우며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우리가 고난주간에 묵상해야 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는 것도 좋지만 그 전에 겟세마네의 기도를 묵상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아니 어쩌면 십자가의 고난보다 겟세마네의 기도가 더 절박하고 간절하며 치열합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자주 이러한 선택의 순간에 놓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기만을 바란다면 아버지의 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바라는 마음보다 아버지의 원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클 때 우리는 아버지의 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이 잔을 거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 잔은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일이었습니다. 이 잔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원대로 마시고자 하셨을 때 정말로 예수님께 주어졌고 예수님은 그 잔을 마셨습니다. 다음 구절을 보십시오.
“[마]27: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예수님은 잔 형태가 아니라 해면 형태로 신 포도주를 드셨습니다. 그 포도주를 마신 곳은 십자가 위에서 두 팔과 두 다리가 못에 박혀서 고통과 괴로움에 울부짖는 곳이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십자가 위에서 그 신 포도주를 마시면서 온몸에 임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잊을 수 있게 하는 잔을 마시게 될 것이라는 것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원함이었고 그 잔을 마시겠다고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아버지의 원함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 속에서 아버지의 원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마음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 신 포도주를 드셨습니다. 이로 인해서 예수님은 시69:21에 나오는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의 예언을 이루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원하심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끊임없이 내 원과 하나님의 원이 충돌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내 원을 따르고자 하면 그 고통스러운 잔을 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원을 따르려고 하면 고통스러운 잔을 마셔야만 합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바로 그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고통의 잔보다 더욱 가치 있었고 귀했던 것은 아버지의 원함이었습니다. 그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고 그 원함을 따를 때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영광에 동참할 수 있다면 고통은 잠시였고 그로 인한 가치는 영원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그 길을 갈 때 예수님과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아버지 하나님의 원하심을 선택했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눅]22: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눅]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천사가 예수님께 나타나 힘을 더했고 예수님의 기도는 더욱 간절해지고 절실해져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승리하여서 예수님은 마침내 아버지의 원을 이루는 잔을 마실 수 있는 마음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고난주간에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더욱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내 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원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신 예수님을 본받을 수 있습니다. 그 예수님의 기도를 따라갈 때 우리도 예수님이 보셨던 놀라운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를 묵상하면서 예수님과 연합되고 예수님을 본받으며 예수님의 희생과 헌신을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