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창22; 2-4 아들을 바치게 하시는 하나님_6
2025. 4. 15. 화. 고난주간 새벽기도회
찬양: 144. 예수 나를 위하여 / 147. 거기 너 있었는가
*개요:
[창]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창]22: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 고난이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창조 이후부터 예비된 사건이었습니다.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의 사역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왜 이루어졌는가를 설명합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고난도 마찬가지로 왜 그 고난이 있어야만 했으면 그 고난의 의미가 무엇이고 가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기억할 때 우리는 굳건한 신앙 위에 설 수 있습니다. 신앙의 내용을 이해하니까 유혹이나 시험에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창세기에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신앙 속에 그리스도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2절입니다.
“[창]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그것은 1절에 나오는 대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니 그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실행하도록 하신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무엇을 시험하고자 하셨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후의 16절에서 잘 나타납니다.
“[창]22:16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아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시험하려고 하셨던 것은 아들 독자를 아끼는가 아끼지 않는가를 보려고 했을 것이라고 예상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아브라함에 대한 시험이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독자를 아끼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대해서 하셨던 시험의 본질이었습니다. 또한 그 본질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고난 받으신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것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 히브리서에 나옵니다. 히브리서 11장 17절입니다.
“[히]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히]11: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히]11: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는데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이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정말 번제로 바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급하게 아브라함을 말리셨고 이삭을 죽이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근처 수풀에 걸려 있었던 숫양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숫양으로 대신 번제를 드렸습니다. 바로 그 대신 번제로 드려지는 숫양이 그리스도의 예표가 됩니다. 그리스도는 그 숫양처럼 대속제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시험의 핵심은 이삭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이삭을 다시 살리시는 것을 믿는가 였습니다. 죽으면 끝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주님께서 우리가 죽어도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바로 하나님이 시험하셨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나타내 주십니다. 그러한 믿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 당하셨고 고난 당하고 죽으심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모습 속에서 하나님께서도 그리스도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셨음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모습을 통해서 그 고난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놀라운 구원의 여정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셨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은 숫양을 예비하셔서 이삭을 살리신 것처럼 그리스도를 예비하셔서 성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대신 지신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게 되었다면 우리의 인생은 다른 의미로 펼쳐집니다. 다음 구절을 보십시오.
“[창]22: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창]22: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삭을 번제로 바쳐야 하는 아브라함으로서는 그를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가는 길은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살리심을 소망한다면 그 일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하나님께서는 다시 살리시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으로서 이삭을 죽이지 않게 하셨고 제물은 숫양으로 대치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으로 나아갔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을 기억하며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어려운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지경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고 소망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신 것이 얼마나 큰 혜택이요 감사가 되는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가 또한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셨고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마음에 품을 때 하나님과 예수님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이루셨는지를 알 수 있고 우리가 얼마나 귀한 사랑을 받았는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앞으로 더욱 그리스도의 고난이 구원을 위한 것이었음을 기억하며 주의 약속을 더욱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