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요20; 11-16 뒤에 서 계신 예수님_1
2025. 4. 20. 주. 주일오전예배.
*개요: #55동행,
[요]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요]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요]20: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요]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요]20: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요]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부활절이 되었습니다. 여러 종교들이 나름의 기념일을 지키지만 기독교의 부활절처럼 부활을 기리는 절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알아서 만들기라도 하면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만 애초에 부활의 개념 자체가 없기 때문에 억지로 만들고 싶어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특별한 점은 기독교에 창조와 타락과 구원의 기독교적 세계관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는 그 구원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십자가의 고난과 삼일 후의 부활과 40일 후의 승천이 있습니다. 이러한 구원의 과정을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고 구원에 합당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에 없는 오직 유일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들로 이 예배에 나아왔습니다. 특히 이 부활절은 지난 한 주간 고난주간을 보낸 다음에 찾아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더욱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고통당하심이 있었기에 구원하심이 있었고 죽으심이 있었기 때문에 살아나심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 인생의 귀한 의미와 가치이기도 합니다. 우리 삶도 고난과 괴로움과 죽음이 있지만 주님을 따라갈 때 부활과 생명과 영생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것을 믿을 때에 우리에게는 믿음이 생기고 소망이 생기고 사랑이 생깁니다.
이러한 부활의 의미와 소망을 생각할 때 우리가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때는 언제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부활이 기쁨이 되는 때가 언제인가를 보여줍니다. 부활의 기쁨을 경험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통해 우리도 부활이 기쁨이 되는 때를 알 수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요]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요]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마리아는 3일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무덤에 왔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함께 무덤에 갔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에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시신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무덤에 돌이 굴려지고 막혀 있었지만 왠일인지 무덤의 돌은 옮겨져 있었고 그 안에 있어야할 예수님의 시신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애를 써서 향품도 가져오고 많은 용기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 모든 노력은 헛되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시신 자체가 없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대신 무덤 안에는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있었고 하나는 머리 편에 다른 하나는 발 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리아도 처음엔 이들이 누구인지 잘 몰랐습니다. 다만 자기 처럼 볼 일이 있어서 예수님의 시신에 나아왔던 것인가 보다라고 생각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명이 마리아에게 도리어 질문을 던졌습니다.
“[요]20: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요]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그들은 마리아에게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천사들이었고 당연히 마리아가 왜 우는지를 알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대답을 마리아로부터 듣고자 했습니다. 그 때 마리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누가 옮겨다가 둔 것 같은데 어디다 두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자신의 생각대로 시신의 모습으로만 예수님을 찾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 보지 못했고 예수님 앞에서 그녀는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은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님을 간절히 찾았는지를 보여주는 진실한 말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냥 단순히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러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모하며 지키고 보존하기를 원했습니다. 비록 그녀가 부활을 생각하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은 생각했습니다. 그럴 때 그 마음 속에 예수님은 사라지고 잊혀진 분이 아니라 존재하고 기억되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을 때 눈물을 흘렸으며 예수님을 다시 찾을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마리아 뒤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서 계셨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럴 때 나타난 그 진실한 모습을 보십시오.
“[요]20: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아까 천사들처럼 마리아에게 재차 물어보셨습니다. ‘왜 울며 누구를 찾고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몰라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알지만 다시 그 대답을 듣고 싶어서 물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예수님을 찾고 있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님을 예수님에게서 찾는다는 것이 다소 아이러니 했지만 핵심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간절히 찾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을 떠나신 분이었지만 여전히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간절히 바라고 절실히 사모하며 온 힘을 다해 찾는 분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주님을 찾고 있었던 마리아에게 주님은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이 나타나실 때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단 1초만에 나타나셨습니다.
“[요]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예수님은 ‘마리아야’ 하셨고 마리아는 그 순간 방금까지 동산지기인줄 알았던 그분이 바로 자신이 찾던 예수님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1초만에 대답했습니다. ‘랍오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인지 모릅니다. 인터넷 영상에는 미군 군인 가족들이 재회할 때의 모습이 있습니다. 오랜 기간 떨어져 살다가 다시 만나는 가족들의 모습인데 무척 뭉클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사랑이 넘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견주들이 오랜 만에 자신의 사랑하는 개를 만나는 장면도 있습니다. 얼마나 그 마음이 이해되는지 모릅니다. 너무나 보고 싶었지만 죽음으로 인해서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된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그런 다시 만남을 이루어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없었다면 결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자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우리는 다시 만날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다시 만난다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들이나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이란 무의미한 것이겠지만 모든 부활을 기다리고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너무나 기쁘고 감사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인해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절 뿐만이 아닙니다. 삶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기뻐하고 감사하게 될 순간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주님은 바로 마리아 뒤에 서 계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간절히 찾았을 때 주님은 우리 뒤에 계십니다. 주님께 기도했고 주님께 찬양했으며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관련해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만이 이루실 수 있고 주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그 놀라우신 은혜와 사랑을 다시 부활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나타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간절히 주님을 찾을 것입니다. 그럴 때 바로 우리 뒤에서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실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나타나실 때 그 주님을 깨닫게 되기 전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그 즉시로 주님의 임하심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이 우리의 이름을 불러 주실 때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고난에 참여했던 우리가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고난에 참여하고 부활에도 참여했던 우리는 주님의 영광에도 참여할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를 원했던 자들로서 그분을 다시 만나는 부활의 기쁨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 영광에 동참하면서 살아가는 거룩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