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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계획] 1창 4;9-15 죄인의 죽임을 면케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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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창 4; 9-15 죄인의 죽임을 면케 하시는 하나님_1


2011.1.16.주일오전, ‘창조의 명령’

[창]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창]4: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짐을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창]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이번 1월은 우리에게 한 해를 시작하는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비록 2월 구정이 다가오면서 또 한번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하는 부담감이 있지만 공식적으로 새해가 되었고 모든 일정에 새로운 해가 기록되면서 느낌이야 어떻든지간에 분명 1월이 새로운 해의 시작임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여 우리는 계속해서 창조의 명령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1월이 지나고 나면 더 이상 이러한 의식 없이 바쁘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창조의 명령을 묵상하면서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존재명령인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를 수행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이 창조의 명령이 우리의 삶 속에서 왜 수행되지 못하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이 의미는 어쩌면 공식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충만하지 못하는가, 죄 때문에. 우리가 왜 정복하지 못하는가, 죄 때문에, 우리가 왜 다스리지 못하는가, 죄 때문에. 너무나 단순한 대답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답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정말 죄때문인가, 다른 대답이 없는가, 이런 생각으로 열심히 답을 찾아 보았지만 결국에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정말 죄때문이었습니다.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시작한 탐구과정은 오히려 이 공식을 증명하는 과정이 될 뿐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들께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왜 현재의 환경과 상황에서 충만하지 못하고, 정복하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죄때문입니다. 저는 이제 그것을 증명해 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왜 충만하지 못하는지를. 그 이유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이유를 왜 가지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그속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것이 바로 죄가 됩니다. 죄는 몸으로 행한 것과 마음으로 품은 것 모두를 말합니다. 심판은 몸으로 행한 것에 대해서만 적용되지만 성화는 마음으로 품은 것에 대해서도 적용됩니다. 그래서 죄의 개념은 몸과 마음에 대한 포괄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죄를 몸으로 지었을지라도 다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은 그 즉시 죽지 않았고 비록 이전보다는 더 열악한 조건이었지만 여전히 창조의 명령을 받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창조의 명령을 지키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악보다 더 큰 죄악을 저지른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먹지 말라는 과일을 먹었고 그로 인해서 모든 처벌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심판을 받았는데 이보다 더 큰 죄악을 다시 저지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아담과 하와가 저지른 죄악보다 더 큰 죄악이라면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떻습니까? 과연 하나님이 그런 악한 죄를 용서해주실까요?

우리가 아는 가인의 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인은 인류 최초로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자기 동생 아벨을 때려 죽인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창조 이래로 가장 처음 사망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죽음의 모습, 죽음의 현장, 죽음의 실체가 일어났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그들이 선악과를 먹으면 죽으리라고 하심으로써 죽음의 존재에 대해서 알려주셨었는데 아담과 하와는 아벨의 죽음을 통해서 죽음의 실체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사람이 죽으면 이렇게 되는구나를 바로 아벨의 시체를 통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과연 이러한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가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가인을 그 즉시로 동일하게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가인에 대한 심판은 이것이었습니다.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가인은 자기가 한 일을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커다란 죄책감과 수치심은 새로운 감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것은 되려 분노하는 것입니다. 작은 죄책감과 수치심은 인정할 수 있지만 너무 큰 죄를 저질러서 생기는 죄책감과 수치심은 가능한 자신이 한 일을 부인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더욱 더 화를 내고 더욱 더 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이 아무리 딱 잘라 잡아떼도 아무리 그가 화를 내면서 짜증을 내도 자신이 한 일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땅이 그 살인의 증인으로서 그 핏소리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첫 번째 심판은 바로 그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본인은 거부하고 있지만 본인은 아니라고 하고 있지만 본인은 안 그런척 살아가고 있지만 도리어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하면서 더욱 시치미떼고 있지만 사실은 자신이 동생을 죽였고 자신은 그런 다음 모른척 하는 파렴치한 인간임을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첫 번째 심판이었습니다. 가인은 그 심판 속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감당해야 하는 창조의 명령이었습니다.

얼마전 한 뺑소니 운전자가 CCTV에 찍혀서 잡히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사람을 치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를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나가던 버스 CCTV가 그 장면을 찍었고 고스란히 그 내용이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잡히기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살다가 정작 자신의 범죄장면이 찍힌 것을 보게 되었을 때 그는 얼마나 놀랐을까요? 그리고 얼마나 부끄러웠을까요?
또한 지방에서는 현금수송차가 누군가에게 털리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범죄자는 현금수송차에 있는 칩까지 가져가 버려서 전혀 범인을 알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놀랍게도 CCTV의 하드기록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스란히 범인의 얼굴이 공개되었고 결국 그 범인은 다른 공범 2명과 함께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가 자신의 얼굴이 정확히 찍혔고 그리고 온세상에 다 공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놀랐을까요? 그리고 또 얼마나 부끄러웠을까요?

우리가 저지른 일의 자취는 항상 남아있습니다. 컴퓨터에는 방문한 홈페이지의 기록이 남아있고 은행에는 돈을 주고 받은 기록이 남아있고 이사를 하건 이민을 가던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자취가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땅이 그 핏소리를 호소하였다는 것처럼 때로는 컴퓨터가 그 기록을 제공합니다. 때로는 CCTV가 그 현장을 공개합니다. 통장기록이, 호적기록이, 때로는 주변사람들이, 과거의 모습을 아는 이웃사촌이 그 범죄를 증언합니다. 이러한 증거는 멀리 갈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가 증거하고 가족이 증거하고 그리고 자신의 몸이 그것을 증거합니다. 꼼짝할 수가 없습니다. 피할 수가 없습니다. 피하려고 한다면 눈을 가리고 아웅하는 것입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땅이 호소하는 핏소리를 듣게 하는 것입니다. 그속에서 죄를 깨닫는 창조의 명령을 억지로라도 수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렇게 현실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입니다. 현실을 깨닫고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 때문에 우리가 더이상 범죄자로 살아가지 않게 됩니다. 그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서 살아가게 되지만 어느 순간 그것이 죄이고 다시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만듭니다.

암을 조기에 발견하고 치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각한 병이 될 수 있는데 미리미리 발견해서 초기에 조치를 하고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얼마나 운이 좋은 자들입니까? 건강검진을 하다가 발견되다든지 혹은 몸에 조금 이상이 있을 때 얼른 가서 살펴보고 약을 먹거나 치료를 받아서 낳는다든지 하는 이야기는 얼마나 다행스런 경우인지 모릅니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너무 늦게 병원에 가서 손한번 못써보고 죽게 되는 것입니다. 미리 미리 알았더라면 이렇게 저렇게 해보았겠지만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 너무 늦어지면 더 큰 불행을 불러옵니다.
 
마음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속에 이상한 마음이 자꾸만 들 때, 불편함과 괴로움이 사라지지 않을 때, 빨리 그 마음의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그 문제를 고쳐야 합니다. 추구하지 말아야 하는 욕구는 추구해서는 안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을 뿌리가 되고 좀더 자자 좀더 졸자 하면 시간과 능력을 허비합니다. 또한 더욱 큰 쾌락을 추구하다 보면 인생을 망칩니다. 그런 일들은 한순간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동안 점진적으로 악화되게 되는데 하나님은 그럴 때마다 속히 주님께 나아와 그런 죄악된 마음을 벗어버리고 디모데후서 2:22에 나오는 말씀과  같이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도 이전에 가인이 몹시 분노하였을 때,‘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 말씀을 통해 자신의 분노를 해결하기를 거부하였고 결국 살인을 저지르는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가인에게 주시는 두 번째 심판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그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하나님의 심판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보는 것처럼 매우 정확하십니다. 그리고 매우 합리적이었습니다. 가인은 아벨의 피를 땅에 흘렸고 땅이 그 입을 벌려 아우의 피를 받았기 때문에 땅으로부터 저주를 받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땅에서 농사하는 자였는데 자기가 하던 일에서 그런 범죄함을 저질렀기 때문에 다시는 그 일을 지속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밭을 아무리 갈아도 땅은 더이상 효력을 주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오히려 땅에서 피하며 떠돌아다니는 자가 될 것이었습니다.

우리주변에도 이렇게 죄를 짓고 자기의 일하던 일터를 떠나게 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의사가 환자에게 몹쓸 짓을 해서 의사면허를 박탈당하고 더이상 의사가 되지 못합니다. 경찰이 범죄자에게 뇌물을 받고 직위해제당하고 다시는 경찰로 돌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장교가 병사에게 못할 짓을 해서 더이상 군대에 있지 못하고 옷을 벗고 전역하게 됩니다. 은행원이 고객이 맡긴 돈을 횡령하고 사직당하며 교도소에 들어가게 됩니다. 교수가 학생을 이용하여 온갖 횡포를 부리고… 이 모든 일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서 죄를 짓기 때문에 더이상 그 일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사회의 법칙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인이후부터 만드신 원리입니다. 땅이 아벨의 피를 받았기 때문에 땅은 더이상 효력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영역에서 죄를 지으면 다시는 그 영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이 잔인한가요? 이러한 하나님의 처벌이 부당한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차라리 다시는 그 영역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그에게 낫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영역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더 보람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더이상 범죄자가 아니라 죄값을 치루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더 무서운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범죄자가 여전히 활개를 치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 범죄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말입니다. 범인이 잡혀서 그 사건이 일단락되면 감사한 일이지면 잡히지도 않고 계속 사람들 중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이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또다시 범죄가 일어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의사가 다시 환자에게 몹쓸 짓을 하고, 경찰이 계속해서 범죄자에게 뇌물을 받고 불의한 일을 하고, 군인이 군인 답지 않은 행동을 하고, 은행원이 계속 횡령을 하며 살아간다면 그 피해는 말할 수 없이 클 것입니다. 빨리 그 환부를 도려내야 나머지 부분이 깨끗해지며 온전해지고 이 사회가 하나님의 다스리심속에서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마음놓고 병원에 가고, 마음놓고 거리를 다니며 마음놓고 은행에 가고 마음놓고 학교에 가며 마음놓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정말 성실한 의사가, 경찰이, 군인이, 은행원이 교수가 얼굴을 들고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가인과 같은 자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의 갈길을 정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장면에는 이보다 더 큰 은혜가 나옵니다. 세번째 하나님의 은혜가 남아있습니다. 그 은혜는 가인을 오래도록 살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13.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찌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가인처럼 우리도 죄를 짓고 나면 금방 죽을 것 같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죽음의 위협이 죽음의 유혹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라고 하셨지만 그 처벌을 달게 받고 싶은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냥 죽고만 싶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만 싶어집니다.
또는 커다란 죄를 짓지는 않았더라도, 그저 평범하게 살았더라도, 너무 열정적으로 살았더라도 그것이 죄가 되어서 우리 인간은 뜻대로 되지 않으면 절망하고 좌절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도 로뎀나무 밑에서 죽기를 구하여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열왕기상 19장 4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왕상19: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엘리야는 열조보다 낫고 싶었기 때문에 도리어 열조보다 못한 자신을 질책하며 죽고 싶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도 이런 생각이 드는데 우리는 오죽하겠습니까? 저도 위대한 목사님들처럼 되지 못하는 저 자신을 볼 때 죽고 싶습니다. 위대한 신앙인조차 되지 못하는 제 자신을 볼 때 죽고 싶습니다. 목회가 안되면 멀리 신도시로 이사를 가보라, 어느 정도 해보았으니 부목사를 해봐라, 다른 직업을 알아보면 어떠냐, 다단계를 소개해줄 테니 생활비로 보태쓰라,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죽고 싶습니다. 그건 입장을 바꿔서 직장인에게 돈을 잘 못버는 것 같으니 직업을 바꿔봐라, 학생에게 공부를 잘 못하니 공부를 그만두고 기술을 배워봐라, 군인에게는 어렵게 사는 것 같으니 장사를 해봐라라고 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물론 그런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말은 본인이 생각할 때 조언해줄 수 있는 것이지 그걸 굳이 쫓아와서 따로 불러서 만나서 정색을 하면서 말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인은 고맙지 않고 기분만 나빠지기 때문입니다(때론 그런 친절한 호의조차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엘리야가 죽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주님은 그를 데려가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더 오래 살았습니다. 더 건강하게 잘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떡과 물을 주시고 먹이시면서 그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주님의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전에 했던 일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일이었습니다.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더이상 드러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엘리야는 열조보다 나은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죽고자 하는 자를 죽지 않게 하시고 그가 다른 방면에서 놀라운 일을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애초에 주셨던 창조의 명령을 온전히 이룰 수 있게 하십니다.

가인이 그랬습니다. 만나는 자에게 죽임을 면케 된 가인이 자신감을 가지고 하게 된 일은 아내를 갖게 된 것이었고 자녀를 낳는 것이었으며 성을 쌓는 일이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17.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
그것이 그의 일이 되었습니다. 그는 비록 자신의 동생을 죽이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돌이켜 하나님의 명하신 충만하며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살아갔습니다. 주님이 그를 데려가실 때까지 그는 창조의 명령을 수행하며 살아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명령을 수행해야 합니다. 죄가 그것을 방해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죄값을 받으십시오. 그 죄값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값을 받고 나서 더이상 죄를 짓지 말고 사십시오. 그러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명령을 온전한 마음으로 수행하십시오.
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이 어머니는 자신의 어머니를 많이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그 미워함이 자기 아들에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를 미워한 것처럼 아들을 미워했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자기 아들에게 어머니가 겹치고 있었지만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못하고 있었던 이유는 그 죄를 본인이 고백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와 상담을 통해 어머니를 미워하고 있었고 그것이 죄였다는 것을 깨달은 다음 그녀는 울면서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앞으로는 아들을 미워하지 않겠다고. 그분은 자기가 왜 아들을 미워하는지를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어머니를 미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자신의 문제도 해결하였고, 아들의 문제도 해결하였습니다. 다시 진심으로 아들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무슨 죄를 짓고 있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인생에서 어떤 순간에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죄인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반복해서 그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나아올 때만이 온전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여전히 죄를 지으면서 온전함을 누리지 못하면서 도망 다니며 살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오래 살기는 하지만 창조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오래 사는 것도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벨을 보십시오. 그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너무나 고귀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형의 손에 맞아 죽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그 죽음을 촉발하였던 아벨의 제사는 영원토록 빛나고 있습니다. 아벨 처럼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짧지만 의미있게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길지만 아무 의미없는 죄인으로서의 모습을 원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제 가인의 죄까지라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나아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자들이 됩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고 다시 회복시켜 주셔서 새로운 일을 더 놀라운 일을 더 의미있는 일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비록 가인과 같은 자일찌라도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올해에는 더 큰 성을 쌓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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