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9: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창]9: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이번 달 가정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너무나 모르고 지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가정은 우리가 성도로서 성숙해지고 발전되는 곳이라는 의미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완벽한 가정이란 없습니다. 그 부족한 가정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그 부족을 채워 나가는 것이 바로 성숙이요 성장입니다. 그런 성숙과 성장을 해 나갈 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가치와 기준으로 우리의 마음이 채워질 수 있습니다.
어린 아기가 자라면서 부모의 도움이 필요한 것처럼 그 도움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에 대해서 인내와 온유함을 배워야만 할 때 하나님께 의지하면서 마음을 굳건하게 해 나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릴 때나 나이 들었을 때나 언제든지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을 채워 주십니다. 가정을 통해 그것을 신앙으로 채워 나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로 나아갈 준비를 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채워야 하는 것은 가정에서 가족의 단점을 보려 하지 않고 장점을 보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의지를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눈을 떠서 정말 그 장점을 볼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런데 그런 눈을 갖기 위해서는 필요한 과정이 있습니다. 바로 단점을 보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입니다. 본문의 19절을 보십시오.
“[창]9:19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창]9:20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창]9: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노아의 방주 후에 셈, 함, 야벳의 세 아들로부터 인류가 생겨났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은 아담으로부터 나타났지만 노아 이후의 인류는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생겨났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노아의 세 아들인 셈, 함, 야벳으로부터 인종이 퍼져서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이 생겨났다고 말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말씀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오직 누가 누구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고 말씀을 통해서 신분의 상하관계를 의미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경에서 보여주는 것은 인종으로서 피부색의 차이가 아니라 사회적 위치로서 신분의 분화를 나타낼 뿐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본문을 읽어보면 가 족의 사회적인 의미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인 창세기 9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맨 처음 가족 간에는 단점이나 부족함이나 연약함에 대한 의식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같이 방주를 만들고 같이 구원을 받은 운명 공동체로서의 연대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주를 만들고 그걸 마시고 취해서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을 때 그 모습에 대해서 취한 태도로 인해서 높고 낮음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먼저 둘째 함이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22절입니다.
“[창]9: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그 때 함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알리면서 아버지의 수치를 나타냈습니다. 쉽게 말해서 아버지의 흉을 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두 형제는 그 말을 듣고 같이 아버지의 흉을 보지 않았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창]9: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첫째와 셋째 형제들은 옷을 가져다가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어주었습니다. 그들은 얼굴을 돌아보고 아버지의 하체를 볼 수 있었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흉을 보지 않고 아버지의 수치를 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좋은 모습만 간직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하체를 옷으로 가렸습니다. 자신들도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보지 못하도록 가려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가족 내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다른 가족들 사이에서 부끄러운 상태가 되도록 하면 할수록 아버지를 낮추게 되고 그러면 아버지가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로 고착되어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원리는 단지 아버지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에게도 해당되고 아들에게도 해당되고 딸에게도 해당됩니다. 뭔가 문제가 있어서 가족을 낮추면 낮출수록 그 낮아짐이 커집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됩니다.
흔히들 가족 속에서 비교당하고 배척되고 비판만 받았다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대우를 받았을 때 정신을 차리고 돌이키고 회개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더 좌절하고 낙심하고 포기하면서 더 상태가 악화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단점을 더 많이 보면서 장점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형제들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의 마음 속에 아버지의 단점을 보면서 아버지의 존재는 이전보다 더욱 낮아지게 되었고 그런 의식은 그의 마음 속에 뿌리깊게 자리잡게 됩니다. 반면 셈과 야벳이 더듬거리면서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고 마침내 아버지의 수치를 가리고 나왔을 때 그들의 마음 속에는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고 아버지의 원래의 모습이 그대로 간직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버지를 귀하게 생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단점을 보려고 하는 것이 그 단점을 없애고 장점으로 만들려고 하는 의도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단점이 어떻게 장점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애초의 의도는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이었는데 장점을 생각하지 않고 단점만 보게 되면 의도와는 다르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장점으로 바뀌지 않고 단점 그 자체가 더욱 확장되게 됩니다.
‘네가 이번엔 못했지만 다음엔 잘할 수 있어(장점보기)’라고 말하는 것과 ‘너는 왜 이렇게 못하기만 하니(단점보기)’라고 말하는 것이 완전히 다릅니다. 이렇게 단점만 보면서 가족을 보기 시작하면 색안경을 쓰는 것과 같아서 그 색안경을 벗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잘해도 계속해서 잘못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다가 조금만 잘못하면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조금 잘하나 했는데 여전히 못하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의 연장선상에는 ‘정말 잘할 때까지는 마음을 놓지 않겠다’라고 생각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잘 못할 거라는 확신(?)속에서 그런 생각은 오히려 잘 못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생각은 일종의 저주가 되고 그로 인해서 정말 다른 사람보다 더욱 부족하고 문제가 많으며 낮아지는 상태가 되게 합니다.
실제로 노아는 술이 깬 다음에 정말 그렇게 했습니다. 자신의 수치를 보고 형제들에게 알리면서 아버지의 수치를 드러냈던 함에게 이런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창]9: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창]9: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가나안은 함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저주를 받았고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면서 제일 낮은 사회적 위치를 얻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가나안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의 종이 되면서 정말로 그렇게 낮은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함은 아버지를 낮췄고 아버지도 함을 낮추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안 좋은 관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각 가족의 위치를 어떻게 정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위치를 낮추려고 한다면 정말로 한없이 낮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원래 원하던 바가 아닐 것입니다. 가족 중의 한 명이 낮아지게 된다는 것은 가족 전체가 낮아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치가 높지만 겸손한 것이 좋지 비천해지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겸손함을 가르쳐야 하지 비천함을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망하거나 패배하거나 종이 되도록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 반대로 단점을 가려주고 가리는 법을 알려주면서 장점을 키워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그렇게 하는 사람이나 그러한 도움을 받는 사람 모두가 서로 높아지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아버지는 탕자가 돌아왔을 때 그 아들을 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탕자는 스스로 종이 되기를 바랬지만 아버지는 그를 아들로 세워주었습니다. 그럴 때 그 아들은 회개하는 겸손한 아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눅]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그 둘째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아들이자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이지 낮아진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족들을 보려고 하면서 그 단점을 가려주고 장점을 살려주려고 할 때 더욱 하나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족들이 이러한 발전을 이루기를 소망하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족들을 대하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