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4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15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날씨가 선선해지고 계절이 바뀌고 있습니다. 이번 추석도 날짜는 조금 이른듯 했지만 날씨는 적절하게 일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계는 모든 것이 다 계획대로 진행됩니다. 하루가 가고 한달이 가고 한계절이 가고 그리고
또 다시 새로운 계절이 왔습니다. 이 모든 변화 속에서 우리들은 새로워져가고 있습니다. 이전에 살아보지 않았던 삶을 살아갑니다. 이전에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결코 다시 반복되지 않는 항상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새로움을 우리는 반대로 전혀 새롭지 않은 것으로
만들수 있습니다. 예전의 방식과 동일하고 예전의 생각과 동일하게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새로워졌지만 전혀 새로워지지 않은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분명
이 세대는 달라지고 있고 이 세상은 계속 바뀌고 있지만 우리는 전혀 바뀌지 않은 채로 항상 예전의 모습 그대로 그리고 항상 하던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변화없이 살아가게 됩니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발전한다는 의미에서만 가치가 있습니다. 퇴보한다는 의미로 우리는 새로워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전보다
더 높아지고 더 성숙되며 더 고귀해질 때 그때 우리는 새로워졌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워지는
것이 좋은 것이고 새로워지지 않는 것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그럴 때 세월의 변화와 함께 새로워지지
않는 우리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더욱 누추해지고 더욱 초라해지며 더욱 연약해집니다. 그 자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세상이 다 변해버렸기 때문에 결국은 너무나 연약하고 초라하게 변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발전해야 합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신앙에 더욱 성숙이 있어야 합니다. 주변 성도들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주변 교회가 더욱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점차 더욱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주님 오실 날은 점차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발전되고 성장하며 성숙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이러한 성숙을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3절부터 15절까지
봅니다.
“13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4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15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이전의 삶은 율법에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복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삶은 새로워졌습니다. 그것은
믿음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율법적으로 얽매여 사는 자들이 아니라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에서도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고 하셨으니
율법조차 지키지 않으면 결국 서로 물고 먹으면서 서로 비방하고 비난하면서 서로 질책하고 반격하면서 결국에는 피차 멸망하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제 믿음으로 사는 것은 율법이 보여주는 이웃 사랑에서 더 나아가서 사랑으로 종노릇하면서 자유를 누리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벼가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처럼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새로워진 신앙이요, 더욱 성숙해진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발전되고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절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아서 율법을 벗어나서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은 방만해지거나 방임으로 치닫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절제하며 더욱 조심하며 더욱 종노릇하게 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 진정으로
자유를 누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통수단의 발전을 생각해 보십시오. 가장 기본적으로는 보행이 있고 좀더 나아가면 자전거나 오토바이가 있습니다. 더욱
발전된 수단으로 자동차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더욱 나아가면 비행기가 나옵니다. 이러한 교통수단의 발전 속에서도 우리는 보행 보다는 자전거나 오토바이 같은 이륜차가 더 까다로운 법규에 적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보다 더 자동차가 복잡하고 규제가 많은 수단입니다. 비행기는 어떨까요? 비행기는 가장 법규와 규칙이 많은 교통수단입니다. 오히려 기능이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제한도 함께 많아지는 법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둘째가 하도 무선조종 헬기를 사달라고 해서
하나 사주었습니다. 휴가때 어떤 아이들이 무선헬기를 날리는 것을 보고 나서 ‘나도 저거 사줘’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때는 아무 생각없이 사준다고는 했지만 빨리 안사주니까 계속해서 재촉하는 것을 견디다 못해서 결국은 구입을
했습니다. 무선헬기를 사 놓고 함께 비행을 하는데, 조종이
쉽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자동차면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좌우로 갔다 하면서 조종이 쉽겠는데, 헬기는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헬기는 더 많은 행동이 가능했습니다. 떠오르면서 앞으로 가거나, 떠오르면서 뒤로 가거나, 왼쪽으로 돌거나 오른쪽 으로 돌거나, 왼쪽으로 돌면서 앞으로 가거나, 오른쪽으로 돌면서 뒤로 가거나 할
수가 있었고 그 와중에서 높이 오르거나 낮게 내려앉을 수도 있었습니다. 조합으로 따지면 너무나 많은
다양한 비행능력 탓인지 매번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고 여기 떨어지고 저기 떨어져서 조종이 잘 안되었습니다. 양
손은 좀더 세심해야 했고 무선 헬기의 방향에 따라서 이리로 뛰고 저리로 뛰고 해야 했습니다. 사용반경도
넓고 기능도 다양해서 더 쉽고 더 편하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가 못했던 것입니다. 더
기술이 필요하고 더 노력해야만 더 많은 기능을 사용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에서의 자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16절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말합니다.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믿음을 가지고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보여주는 수준 그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보여주는 수준 그 이상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율법은 늘 무엇인가를 했는가, 안했는가, 해야 하는가 안해야 하는가 만을 생각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간단합니다. 그 속에서는 자원해서 자발적으로 마음을 다해서 한다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율법의 한계를 넘어서서 더욱 발전하게 되는 것은 사랑을 가지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면 자연히 종노릇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율법보다 더 많이 매이게 됩니다. 더 많은 못하는 것들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그것이 율법에 의해서
얽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에 의해서 종노릇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절제 속에서 더 크고
놀라운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그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더 강하고 분명한
절제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자유와 평안을
허락하셨습니다. 새로운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율법의 한계를 뛰어 넘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던 새로운 그분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삶은 결코 율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율법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 율법이
완성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성령의 행하게
하심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율법의 한계를 극복하고 하나님께로
날아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성령에 붙들려야 합니다. 그속에서 주님이 보여주시는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것과 절제를 나타내는 것이 필수적으로 뒤따르게 됩니다. 이어지는 성경말씀을 좀더 보십시오.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우리가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을 좇아 행해야만 합니다. 문제는 그 성령의
역사하심은 우리의 육체의 소욕을 거스린다는 것입니다. 그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육체의
소욕을 제한합니다. 우리의 죄성이 바로 성령의 원하시는 것과 충돌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우리가 원하고 익숙하게 하는 것을 못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성숙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에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온전히 주님의 하시는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절제하게 된다는 것은 그리고 성령에 의해 종노릇하게 된다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온전한 일을
이룰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우리의 원하는 것이 제한되고 성령의 원하시는 것을
이루게 되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때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놀랍게
역사하시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예수님께서는 친히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첫아들, 맏아들,
독생자로서 우리에게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아버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셨고 그 순종을 온전히 이루셨을 때 그분의 모습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함께 하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바로 그 온전한 순종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십니다.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부르짖으셨던 그 예수님의 순종이 헛되지 않게 우리에게 임하게 하십니다.
“눅22:42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3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44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주님이 흘리신 피는 단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의 원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그속에서 자신의 원이 이루어지지 않게 됨을 경험하실
때에 흐르는 피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땀이 진하여지고 절박하여져서 피처럼 되는 마음의 고통이며 처절한
몸부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이길 수 있도록 성령님은 도우셨습니다.
하늘로부터 예수님께 나타나 힘을 도왔던 그 사자처럼 성령님은 예수님을 도우셔서 마침내 순종함으로 진정한 종으로서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 순종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고 주님의 뒤를 잇는 또 다른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따라할 수 없습니다. 흉내낼 수도 없습니다. 그 피흘리심과 죽으심은 너무나 커서 우리는
결코 그분을 온전히 닮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억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셔서 순종하셨던 그분의 순종을 마음속에 새길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그래서 성령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십니다.
사랑으로 종노릇한다는 것은, 절제한다는 것은 율법에서 말하는 금욕이나 자기통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더 가치있고 더 중요한 일을 위해서 제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무엇인가를 못하게 된다라고
생각한다면 그 의미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절제는 무엇인가를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다스립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르면 반드시
성령의 소욕을 따를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의 소욕을 이루기 위해서 육체의 원함을 버립니다. 그럴 때 단순히 육체의 원함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성령의 소욕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그렇게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될 때 율법이 이루지 못했던 바로 그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파인애플 이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는 한 선교사가 네덜란드령 뉴기니아에서 7년에 걸쳐 경험한 실화를 책으로 낸 것입니다. 원주민 마을에서 병원과
생활용품을 공급하는 상점을 경영하면서 복음을 전하던 선교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파인애플을 마을에 들여오기로
결심합니다. 깊은 정글 속에서는 싱싱한 과일이나 채소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원주민을 고용하여 100여 그루의 파인애플 나무를 심었습니다. 3년을 가꾼 후 드디어
열매가 주렁주렁 맺혀 수확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파인애플 밭에 간 선교사는 너무나 실망했습니다. 누군가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따갔기 때문입니다. 수소문 끝에
바로 자신이 고용했던 원주민이 한 짓임을 알아냈습니다. 그리고 따져 물었습니다. "당신에게 이미 품삯을 지불했는데 왜 내 파인애플을 훔쳐갔습니까?"
그런데 뜻밖의 반응을 발견했습니다. 원주민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 곳에서는 누구든지 나무를 심는 사람이 열매를 따 먹게 되어 있습니다." 선교사는 어이가 없었지만 서로 문화가 다르니 이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마을 사람들과 단단히 약속을 하고 소유권을 분명히 한 다음 그들을 고용해서 또 파인애플을 심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몹시 화가 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습을 고치기 위해서 병원 문을 닫아보기도 하고 상점 문을 닫기도 했지만 오히려 원주민들이 하나둘 숲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로 그의 선교 자체가 불가능해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선교사는 깊이 고뇌하는 중에 "주라, 그러면 받으리라. 자신만을 위해 갖고자 하면 잃게 될 것이다. 네가 가진 것을 하나님께 드려라. 하나님은 너를 풍족히 채워 주실
것이다."라는 깨우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파인애플에 대한 소유권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말할 수 없는 자유와 마음의 여유를 되찾았습니다. 그 후로도 여전히 원주민들은 파인애플을 남김없이 훔쳐 갔지만 그는 마음이 평안했습니다. 어느 날 원주민이 찾아와 선교사에게 물었습니다. "우리가
파인애플을 훔쳐 가는데도 당신은 왜 화내지 않습니까?." 선교사는 대답했습니다. "내가 파인애플 농장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훔쳐 먹는 셈이네요?" 그 후 원주민들은 다시는 파인애플을 가져가지 않았고 그 다음에야 비로소 선교사는 파인애플을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수확한 파인애플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원주민들이 그제서야 선교사를 비로소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였고 그의 선교사역은 진정한 열매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내가 먹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중단하였을 때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정말로 성령의 인도하시는 자가 되었을 때 율법이 보여주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이루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사랑으로 종노릇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가오는 이 추석에
진정으로 사랑의 절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넘쳐나게 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