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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동행] 43눅24;33-43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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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눅24;
33-43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먹다_1


2011.4.24.주일오전, 부활절, [5-6동행]

[눅]24: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눅]24: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눅]24: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눅]24: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눅]24: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눅]24: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눅]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눅]24: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눅]24: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눅]24: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눅]24: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오늘 우리는 부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주님은 2천년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 나셨다가 33년을 사신 뒤에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전까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은 성경 속에 몇명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과 다릅니다. 그들은 살아났다가 다시 죽었지만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살아나신 것이기 때문에 다시 죽지 않으시는 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영원히 사시는 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신으로서 영원한 삶을 사시는 분이었지만 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다음에는 인간과 신으로서 동시에 영원한 삶을 사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같이 예수님 처럼 영원을 살 수 있는 몸을 가진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쉽게 믿지를 않았습니다. 어떻게 죽었던 몸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어떻게 인간의 몸이 영원한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수 있는가라면서 쉽게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남을 믿으십니까? 다시 살아날 뿐만 아니라 영생하는 몸으로 변화됨을 믿으십니까? 이것이 쉽게 믿어지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평생 듣도 보도 못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전혀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지 않는 이일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먼저 듣고 보고 믿은 자가 있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으며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그분의 얼굴을 보았으며 그래서 주님이 놀라운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게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는 시몬이었습니다. 33,34절을 보겠습니다.

“33. 곧 그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 한 사도와 및 그와 함께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지라”

시몬에게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셨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도 시몬에게 나타난 모습은 오직 디베랴 바닷가에서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증거되지는 않았지만 뭔가 특별하게 시몬에게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시몬은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특별한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예수님의 나심에 대해서 증거하였습니다.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이들은 분명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었지만 열 한 사도와 그와 함께 한 자들 사이에서는 소수에 불과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한 자가 있었지만 그 수는 미미하였고 그의 말을 신뢰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준 사람들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소식 자체는 그렇게 쉽게 믿을 수는 없는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심을 믿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믿지 않습니다. 역사적 사실이야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로마재판기록에도 분명히 나와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라는 분이 계셨고 유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형을 받아 죽으셨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살아나셨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은 쉽게 믿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이것이 그렇게 어리석어 보이고 장난치는 것 같고 속이는 것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믿지 못함을 일시에 해소시켜 주신 분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정말 그 자리에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36절을 보십시오.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예수님은 자신을 본 몇 사람의 말을 믿지 못하고 어이없어하며 속이는 줄로 생각하는 다른 제자들에게 정말로 나타나셨습니다. 볼 수 있게 나타나셨고 들을 수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하신 것입니다. 영어로는 ‘Peace be with you’였고, 헬라어 원어로는 ‘eirene, umin’이었습니다. 이제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도록 주님은 주님 자신을 증거하셨습니다.
오늘날 예수님께서 우리가 모인 이곳에 오셔서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찌어다’라고 말해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래서 여전히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이 얼마나 예수님을 부인하며 살았고 예수님을 부끄럽게 하며 살았으며 예수님을 얼마나 못박으며 살았는지를 깨닫게 된다면, 그래서 자신의 삶을 눈물로 회개하고 자복하여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하늘의 특별검사라는 책을 쓴 김인호 장로님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보았습니다. 그분은 어려서 예수님을 믿었고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던 경험이 있었기에 더욱 열심히 살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고시에 패스해서 검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도 잘 믿어서 교회도 열심히 나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교만하고 여전히 강퍅했으며 여전히 남을 무시하고 하대했습니다. 자신이 왕이었고 자신이 최고였으며 자기 외에는 다 틀렸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교회를 다니면서도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자기에게 오셔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살아나셨고 그리고 자신과 함께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날이 새도록 울었습니다. 눈물,콧물이 범벅이 되어 한도 끝도 없이 울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얼마나 악하게 살아온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기뻐서 운 것이 아니라 슬퍼서 부끄러워서 죄송해서 울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믿지 못했던 지난날의 삶이 괴로워서 울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는 자들에게 오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못박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따랐던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지 못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그중 도마는 자신있게 자기가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겠다고 큰소리치고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중 어떤 이들은 부활을 믿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믿는다는 말은 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말 믿는다면 차마 그렇게는 못할 일을 행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믿는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삶의 행동은 전혀 상반되게 살아갑니다. 더 큰소리치며 더 자신만만하게 살아갑니다. 설사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서도 자기는 눈꼽만큼도 잘못된 것이 없다면서 큰소리칩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에게나 우리 죄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에게나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며 오히려 더 당당하며 더 떳떳해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좀더 궁극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은 두렵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나타나실까봐.

아까 말씀드린 현직검사인 김인호장로님은 이런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 뇌물피의자를 심문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이사람을 심문하기 전에 하나님은 지혜를 주셨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마라’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지혜였습니다. 정말 피의자는 심문대에 앉자마자 버럭 화를 내면서 왜 멀쩡한 사람을 잡아들이냐고 저항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피의자는 계속해서 이런 저런 자기 이야기를 해대었다는 것입니다. 이 장로님은 조용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듣고만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따른 것이지요. 이윽고 몇 시간이 지나고 저녁때쯤 되어서 좀 조용해 졌을 때에 딱 한마디를 했다고 합니다. ‘형량을 줄여드릴께요’피의자가 갑자기 전기를 맞은 것처럼 펄쩍 튀어 오르면서 되물었습니다. ‘예? 뭐라구요?’ ‘형량을 줄여드린다구요’ 그때부터 이 피의자가 푹 고개를 숙이더니 고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몇 시간이 흐른 다음에 그는 비로소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하였답니다. 처음에 그렇게 길길이 날뛴 것은 사실 너무나 두려웠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할까요? 왜 주님이 지금도 부활하신 몸으로 우리를 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그렇게 믿지 않은 것은 뭔가 잘못된 일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엠마오로 갔던 제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디베랴 바닷가로 고기잡으러 간 베드로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이 정말 부활하시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었다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소망을 잃어버리고 절망하고 좌절하여 세상으로 멀어져 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두려워하면서 부활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라도 빨리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만나야 합니다.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이전에는 그렇게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마음으로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고 정말로 그것을 믿으면서 그랬다면 그건 정말로 악한 일을 한 것이기 때문에 믿지 않았다는 것이, 몰랐다고 하는 것이 그나마 나은 변명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사실, 주님이 이세상에 태어나시고 존재하셨다는 것만큼이나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죄를 더욱 쌓는 것뿐입니다. 주님의 부활하심이 언젠가 드러나게 되는 것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계속해서 그 사실을 거부하고 부인하는 것은 오히려 부활하신 예수님께 더욱 죄악만 쌓는 일이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부활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이 존재하시지 않는 것처럼 살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두려움 없이 믿게 되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가 부활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을 아무런 거부반응없이 믿고 그러한 믿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자신을 나타내시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왜 주님은 자신을 못박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시지 않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까요? 그들에게 나타나셨다면 그들이 믿고 회개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들에게는 나타나시지 않았을까요? 왜 제자들에게만 나타나셨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첫번째 말씀이 그 이유를 보여줍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주님은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주고자 하신 것이 평안 뿐만일까요? 아닙니다. 38, 39절을 보십시오.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주님은 제자들이 믿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평안을 갖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담대함을 갖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학생들이 이세상에서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말이지요. 그래서 신앙을 붙들기 보다는 세상을 붙들려고 합니다. 예배드리고 기도하기보다는 학원에 가고 책을 더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심각한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담대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지혜를 주실 때에 예배드리고 기도를 하고 공부해도 결코 뒤지지 않음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부모들이 이 세상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훈계로 양육하기 보다는 세상의 기술과 법칙에 따라 양육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함께 하실 때에 자녀들이 더 잘될 수 있음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교회가 세상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전하기 보다는 세상의 술수와 잔기술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보다는 세상의 한 부분이 되어 살아남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교회가 주님께 의지할 때 비로소 참된 주님의 몸이 됨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의 거하시는 성전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2011년에 우리가 부활절을 맞이하는 것은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부활로 이곳에 오셨습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보면서도 믿지 않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37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저는 날마다 이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저는 날마다 의심했습니다. 정말 주님이 살아계신 것 맞습니까? 정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 것 맞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교회가 이렇게 부흥이 안됩니까? 교회가 어쩌면 이다지도 부흥이 안되고 이모양 이대로 있습니까? 왜 이렇게 사람이 없어서 악한 사람을 계속 봐야 하고 미련한 사람을 계속 봐야 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계속 봐야 하고 온전치 못한 사람을 계속 봐야 합니까? 사람을 주셔서 좀 안보이게 좀 섞이게 좀 드러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솔직한 제 마음이었습니다. 어리석게도 주님의 부활을 주님의 함께 하심을 나의 기준에 맞추어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바탕에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이기적인 내 욕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순간 여러분들이 이렇게 있고 주님도 함께 계시지만 그것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죄가 눈을 가리워서 주님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주님은 이곳에 계셨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자의 모습으로 온전함을 바라보는 자의 모습으로 성숙함을 간구하는 성도의 모습으로 바로 우리들의 모습으로 주님은 이곳에 있습니다. 성숙함을 이루어주시려고 주님은 우리를 이곳에 모아주신 것입니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그리고 여기에 참여한 한 사람, 한 사람을 보십시오. 누가 우리를 이곳에 초대하였습니까? 누가 우리를 이곳에 불러모았습니까?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이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시려고, 그래서 우리의 수치심과 죄책감과 두려움을 사라지게 하시려고 이곳에 불러 모아 주셨습니다. 이곳에서 주님은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제자들은 너무 놀랍고 당황스럽고 기쁘고 그리고 이 감정들이 서로 막 복잡하게 얽히면서 언뜻 이해를 못했습니다. 쉽사리 마음이 풀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난데없이 여기에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주님께 먹을 것을 가져다 드렸습니다. 42,43절을 보십시오.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너무 놀라서 너무 기뻐서 너무 기이해서 경황이 없었던 제자들 앞에서 주님은 제자들이 가져다 준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잡수셨습니다. 주님이 생선을 좋아하셨던 것일까요? 배가 고프셨던 것일까요? 그것이 진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유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내가 실제로 살아있어서 너희와 함께 음식물을 먹는 진짜 부활한 사람이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먹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제서야 그들이 마음이 풀어졌습니다. 모든 것은 다 사실이었고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은 전부 진실이었으며 그 목적은 전부 우리를 담대하게 하기 위한 우리를 평안하게 하기 원한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었고 그것은 죽기 전에도 그렇게 자신들을 사랑하셨던 바로 그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부활 이전이나 부활 이후에나 주님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먹으셨었고 이제도 함께 먹으십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먹으시고 우리와 함께 먹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준비한 모든 것을 주님은 기쁜 마음으로 받아주십니다. 우리의 구운 생선도 우리의 구운 야채도 우리의 구운 고기도 주님은 다 기쁘게 먹어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때문에 죽으셨던 것이고 그 사랑때문에 다시 살아나셨고 그 사랑때문에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놀라운 주님 만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주님을 각자가 다 만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먹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부활절에 드리는 성찬도 주님 안에서 우리가 먹는 성찬입니다. 지금 먹지 못하는 자들은 잘 준비하고 교육받아서 이 성찬에 참여하게 되시기를 바라고 지금 먹는 자들은 늘 주님께 우리의 성찬을 드리고 함께 먹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 구운 생선을 드리기 위해서 누군가 수고하였고 정성으로 준비하였습니다. 이 성찬을 베풀기 위해서 지금도 누군가가 준비하였고 누군가가 희생하였습니다.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주님께 우리가 기뻐하실 것을 드리기 위해 주를 위해 주님이 살아계시는 한 끊임없이 봉사하며 수고하고 인내하고 충성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모두는 항상 부활하시고 살아계시며 우리와 함께 먹으시는 주님과 함께 거하는 자들이 되실 것입니다. 평생을 주님과 함께 먹으며 천국에서도 주님과 함께 먹는 자가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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