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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용서] 11왕상19; 9-14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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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왕상19; 9-14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_1

 

 2013.4.7.주. 주일오전.  주제설교-용서

 

*개요   {1오경역사서} <1적용> [3감정]->[복음]

 

9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4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우리는 4월에 들어섰습니다. 4월에는 계절적으로도 좀더 봄의 기운을 더 잘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벌써 남쪽 지방에서는 벚꽃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훈훈한 기운이 더욱 더 우리 삶속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좋은 날씨속에서 예수님과의 만남을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이 나를 만나주신다면 어떨까요? 혹은 내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면 어떨까요?

 

저는 초등학교 때에 예수님을 꿈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당시 한창 이런 저런 일로 친구들과 싸움을 한 적이 있었는데, 꿈에 나타난 예수님은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을 돌려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을 때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말씀은 너무나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전도를 많이 해라’고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런 내용도 역시 그리 달갑지 않은 내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전부 이래라 저래라 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시겠습니까? 만약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그 만남은 어떻게 느껴지겠습니까? 주님을 만나는 것은 좋기는 하지만 정말 주님을 만나게 되면 뭔가 불편한 상황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성경에는 정말 인간이 우리 주님을 만난 장면이 있을까요? 물론 당연히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장면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중에 한 부분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도 있습니다. 바로 엘리야 선지자가 만유의 주재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1.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원함과 나의 원함이 대비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에서 그 만남은 그냥 얼굴만 보고 음성만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관계가 형성됩니다. 하나님도 인간과 관계를 맺고 인간도 하나님과 관계를 맺습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각각의 원하는 바가 드러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가 인간에게 나타납니다. 또한 인간이 원하는 바가 하나님께 드러납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엘리야도 그랬습니다.  그가 하나님께로 나아갔던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고자 했던 이유는 하나님께 자신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괴로운지 얼마나 죽고싶은지를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애초에 그는 그런 절망감으로 인해 로뎀나무 밑에서 죽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천사가 와서 물과 떡을 주고 힘을 불어 주고 호렙산으로 가서 하나님을 만나라고 해서 오늘 말씀이 펼쳐지는 호렙산으로 왔던 것입니다. 그 장면이 시작되는 9절을 보십시오.

“9    엘리야가 그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유하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그는 자신의 어려운 형편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대해서 열심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자손은 주의 언약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또한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선지자들을 죽였다고 했습니다. 자신만 피해서 살았는데 이제는 자기도 죽이려고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이 모든 형편이 얼마나 자신에게 힘들고 괴로운지를 말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비록 그런 형편으로 인해서 죽고자 하는데까지 오기는 했지만 그건 그가 진짜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자신의 어려움을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그는 호렙산까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을 만나면서 자신의 원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기는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도 엘리야에게 대해서 원하시는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과 대비됩니다. 그런 면에서 엘리야가 하나님을 만나는 모습은 각각의 원함이 대조적으로 비교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2.    엘리야는 사역에서의 어려움이 사라지기를 원했다.

 

그렇다면 엘리야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원한 것은 자신의 사역에서의 어려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의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십시오.

“10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주님은 동일한 질문을 다시 13,14절에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대답도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14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반복되는 두번의 대답속에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던 상황이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괴로움 속에서 그가 원한 것은 무엇인가요? 바로 그런 어려움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주님께로 돌아오거나, 혹은 더이상 자신을 죽이려 하지 않거나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되지 않았을때 그는 절망했습니다. 특히나 더 열심이 특심했기 때문에 더욱 절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열심이 특심하면 할수록 죽고 싶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는 자신이 닥친 상황의 괴로움에 부딪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게 달려오면 달려올 수록 더욱 그로 인한 고통으로 인해 죽어가게 됩니다.

 

마음의 욕구란 이런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전부 이런 성향을 갖습니다. 열심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열심을 가지고 주님의 기뻐하심을 이루려고 한다면 괜찮지만 그 열심을 가지고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어쩌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런 문제를 만드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욕구에는 한계가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저는 타던 차의 엔진을 갈았습니다. 그 이유는 엔진의 타이밍 벨트의 베어링이 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돈을 주고 엔진을 갈면서 아깝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동안 10년동안 차를 타면서 타이밍 벨트를 신경쓰지 못했던 내 잘못이기도 했습니다. 계속해서 차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냥 넘어가고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제작사를 원망할 수도 없었습니다. 대개 부품은 10년정도면 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분명 만든 곳은 제작사이지만 일어난 일은 당연한 문제였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욕구에 대해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우리는 우리의 욕구를 깨닫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계에 부딪치게 됩니다.

 

 

3.    하나님은 패역하고 죄많은 세상이 용서받기를 원하셨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욕구에서 돌이킬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이란 우리가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었지만, 엘리야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것이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엘리야를 호렙산으로 가라고 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도 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로뎀나무 밑에서 죽게 해달라고 하는 엘리야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그러한 질문을 가질때에 엘리야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엘리야가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하였을 때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이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이었고, 또한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보고 들으면서도 엘리야는 이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이해하시겠습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강한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에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지진이 일어나는 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가운데 계시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불이 일어났으나 그 가운데에서도 역시 하나님께서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강한 바람을 원했습니다. 지진과 불도 원했습니다. 그래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신을 차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더 큰 바람과 더 큰 지진과 더 큰 불을 원했습니다. 그래야 자신을 죽이려고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갈멜산에서 불을 달라고 기도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불을 제단에 내리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뿐이었고 그 후로는 불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었습니다. 세미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가시적이고 거대하며 대규모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아주 작게 일어나는 세미한 소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바람으로, 지진으로, 그리고 불로 심판하는 것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라 세미한 소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그들이 계속해서 돌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얼마나 악하고 얼마나 패역되며 얼마나 거역하는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것은 굳이 엘리야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계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그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용서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 악한 자들의 심판을 원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악한 자들의 회개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을 알지 못할 때 엘리야는 죽고 싶었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가 죽고 싶어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회개케 하심과 용서하심을 나타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원하신 것입니다.

 

 

4.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되자.

 

엘리야는 자신의 원함과 하나님의 원함 사이의 커다란 차이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을 때 그는 그 스스로가 용서 받아야 하는 자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게 불평하고 원망하며 비난할 수 있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했던 어리석음을 용서받아야 하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는 그 회개 속에서 더이상 죽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왜 호렙산에 서 있게 되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가 호렙산에 왜 있느냐고 하나님이 질문하셨을때, 그가 그곳에 있게 된 이유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이 아니고 자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하나님 때문에 살게 하십니다. 자신 때문에 살려고 한다면 죽을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 때문에 살려고 할 때 그는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명령을 따르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고자 할 때 그는 새로워졌습니다. 19절입니다.

“19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저가 열 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둘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그는 로뎀나무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엘리사에게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 엘리사를 통해 하사엘과 예후가 세움을 받았습니다. 또한 엘리야 자신은 죽음을 보지 않고 불말과 불병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성경에 죽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간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에녹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엘리야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원함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함을 잊어버려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에서 우리의 원하는 것은 안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는 원함이란 욕구요, 그것은 죄가 됩니다. 이제 하나님의 원하심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또한 용서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생각하며 그 뜻을 따르는 자가 됩시다. 이일을 위해 우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또한 만나야 합니다. 그 만남 속에서 용서받으며 용서 속에서 살아가는 자가 됩니다.

 

이 한달 동안 주님의 원하심을 기억하고 그 속에서 용서의 깊은 은혜 속에서 생활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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