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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희생] 43눅23:39-46 당신의 나라에서 나를 기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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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눅23:39-46 당신의 나라에서 나를 기억하소서_1

 


 2011.4.3.주일오전예배, 예수그리스도의 고난  [5-4희생]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의 일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그 일을 묵상할 때 아무 감정이 없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알려줘도 심드렁한 성도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신앙이 너무나 어리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의미가 가슴으로 다가오기에는 너무나 신앙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리 설명해줘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슬프지 않습니다. 그들에겐 그리스도와 함께 했던 기억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배를 드린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성경공부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역을 해본 적도 없고 예수님과 함께 전도를 해본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기억이 없습니다. 사람들하고는 했지 예수님과 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이 별로 와닿지가 않는 것입니다.

 

얼마전 천안함 사건이 일어난 지 1주년 기념행사가 열렸습니다. 행사내용을 방송으로 보여주기도 하였고 곳곳에 천안함 사건을 잊지 않고 그 사고로 숨진 용사들을 잊지 않겠다는 플랭카드가 걸리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1년 전 천안함 용사들을 위한 장례식이 치루어질 때가 기억납니다. 그 유가족 중에는 어린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처량하고 서럽게 울고 있었지만 아이들은 울지 않았습니다. 울지 않을 뿐만 아니라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나라를 지키다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알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 죽음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다시는 살아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였을까요? 그들의 울지않음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음을 알기에는 너무나 어렸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주변에서 만약 죽으면 눈물이 날 것 같은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죽으면 눈물이 나겠습니까? 아버지? 어머니? 남편? 아내? 아들? 딸? 가족이 아니라면 누가 죽으면 눈물이 나겠습니까? 그렇게 눈물이 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 이것을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죽으면 눈물이 날 사람 보다도 예수님은 더 중요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저 죽었다는 것만으로 아쉽고 슬프고 눈물이 날 사람이겠지만 예수님은 그냥 죽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그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면 예수님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나 하나님의 종이나 하나님의 일군이라고 했으면 예수님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을 흥분시켰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그런 말도 안되는 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보다 더한 신성모독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모욕해도 유분수지, 어떻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이라도 할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이 시대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얘기한다면 그냥 미쳤나 보다 하고 말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달랐습니다. 아무도 하나님 이름조차도 함부로 불러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은 십계명 중의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3계명을 어기는 것이었고 그 결과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시고 하나님을 아버지여 라고 불렀으니 이 얼마나 신성모독이며 죽을 죄였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 말씀이 사실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죄목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사실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는데 전부 사실이었는데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유대인들은 차라리 그 사실을 거짓으로 만들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더 나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는 진리보다도 그분이 거짓선지자고 백성을 혼란케 하는 자로 만들어 죽이는 것이 더 합리적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계십니다. 그의 숨은 끊어지고 있었습니다. 천천히 천천히 그렇게 예수님은 죽어가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죽어가시는 예수님은 자기 죄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건 예수님의 잘못아닙니까?라고 말합니다. 왜 괜히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를 왕의 아들로 제대로 나타내시지도 않으면서 세상에 거하시냐 말입니다. 오실 거면 왕처럼 화려하게 오시거나 아니면 아예 오시지를 말지 왜 그렇게 은밀하게 초라하게 연약한 모습으로 오셨던 것일까요? 그건 예수님 자신의 잘못 아닙니까? 그건 하나님의 판단미스 아닙니까? 그래서 십자가에 그렇게 달려계신 것 아닙니까?

 

우리는 이런 논리를 오늘날 자녀들에게서 발견합니다. 자녀들은 부모에 대해서 너무나 당당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조금이라도 돈이 없고 그래서 어떤 것을 못해주면 대놓고 따집니다. ‘왜 부모가 되어서 이런 것도 못사주나요? 왜 낳아놓기만 하고 제대로 키워주지 못하나요? 그럴 바엔 아예 낳지를 말지 왜 나를 태어나게 해놓고서 이렇게 책임도 지지 못하느냐구요!”

어려서 아무 것도 모를 때에만 그런 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성한 자녀들도 연로하신 부모님께 그렇게 따집니다. 왜 아무것도 남겨주지 않았느냐고, 왜 그렇게 유산이 없느냐고, 왜 그렇게 궁상맞게 사느냐고, 왜 그렇게 십자가를 지면서 사느냐고 질책합니다. 이젠 자녀를 키우느라 늙어버리고 돈도 다 써버리고 힘도 없고 연약해진 부모님에게 그 피와 눈물과 고생을 먹고 자란 자녀들은 당당하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이 부족하셔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영광과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세상에 내려오지 못한 것이 실수여서 그렇게 힘없이 연약한 모습으로 죽으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그 피값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의 죄를 사해주시기로 하나님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에 따라서 모든 사람들의 죄값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고 그래서 예수님은 처절하게 고통당하고 죽으신 것입니다. 44절부터 46절을 보십시오.

“44 때가 제 육 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며  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값을 치르면서 죽어야 했기 때문에 그냥 쉽게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모진 고통과 고문과 괴로움 속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죽어가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죄가 사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을 우리는 안타까워해야 하고 고마워해야 하고 진심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아무 상관없는 사람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 4월에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미 절기상으로는 사순절 기간 중이기도 합니다. 부활절 전의 40일 전부터 그리스도의 고난과 그의 죽으심을 묵상하며 주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3월 9일부터 4월 24일까지의 기간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이번 주 4월4일부터는 세이레 특별새벽기도회라고 해서 총회에서 지정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묵상하는 기도회를 가지게 됩니다. 이런 저런 식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생각할 것을 주지받고 있습니다. 이 4월이 그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나팔을 불고 상복을 입고 눈물을 흘려도 안타깝게도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게 크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정말 우리가 영적으로 어려서 그렇다면 그래서 우리 때문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받으시건 죽으시건 어떤 모습이든지 상관없고 무덤덤하며 무관심하다면 이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는 다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다 죽은 목숨입니다. 구원을 받을래야 받을 수가 없습니다. 피흘려 이 땅을 지키던 군인들이 아니라면 우리는 다른 나라에 침략을 당하고 멸망해 버렸을 것입니다. 자기는 죽어도 끝까지 이 나라를 수호하던 호국용사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들을 위한 장례조차 치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최소한 죽은 다음에라도 그들에 대한 기억과 경험을 떠올리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오늘날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심이 없습니다. 백번 말해도 여전히 심드렁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정말 어리기 때문일까요? 어떤 성도들은 교회도 오래 다니고 영적인 어린아이도 아닌데 왜 그렇게 그리스도의 고난에 무관심할까요? 이 무관심에 대한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자기 고난에 더 많은 관심을 갖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을 못믿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자기 상황이 더 괴롭기 때문에 그 문제가 더 심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은 조금 외면하고 싶은 것입니다. 내 코가 석자고 내 발에 불이 떨어졌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은 일단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려고 합니다. 나중에 내 문제가 없을 때 내가 좀 여유가 있을 때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그죽으심에 감사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 옆에 있던 한 편 강도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그가 얼마나 괴로웠으면 예수님께 이런 말을 하였을까요? ‘당신이 그리스도라면서요? 당신이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그러니 이제 저를 좀 구원해 주십시오. 그러면서 당신 자신도 좀 구원하세요. 당신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다면 자신도 구원하고 나도 좀 구원해 주세요!’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4월에 여러분을 괴롭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십자가에 달려 있습니까? 어떤 문제때문에 그렇게 괴로워하십니까? 문제가 아니라면 혹은 어떤 목표때문에 그렇게 노력하십니까? 무엇을 원하십니까? 어떻게 되기를 바라십니까? 직장에서 맡은 일을 잘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시나요? 학교에서 성적이 오르기를 원하시나요? 아니면 교회가 좀 달라지기를 원하시나요? 여러분의 가정의 중요한 일들이 잘 치뤄지기를 원하나요? 여러분 자신의 어떤 몸의 목표나 마음의 목표가 있습니까?

 

때로는 심각한 문제가 우리를 십자가에 매달게 합니다. 또한 분명한 목표의식도 우리를 십자가에 매달아 버립니다. 그래서 자지못하고 먹지못하며 쉬지못하고 온종일 그 문제에 혹은 그 목표에 매여 살게 됩니다. 그래서 너무나 바쁩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너무 바빠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이 죄수도 그런 상황이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비방하고 있습니다. ‘할 수 있다면 당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십시오!’ 그는 정말 구원을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괴로워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님 가장 옆에 있으면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요? 그는 자신을 구원해 주실 수 있는 위대하신 분 바로 옆에 있었지만 죽음의 순간까지 그렇게 가장 가까이에 있었지만 그냥 그렇게 죽고 말았습니다. 괴로워하며 비방하며 애를 쓰며 그렇게 죽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지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도 내내 심판을 받았고 저 세상에서도 계속 영원토록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죽기 전에 지옥의 고통을 맛보았고 죽은 다음에 그 지옥을 실감하였습니다. 그는 구원의 주님을 외면했던 것입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주님을 더 욕되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모든 문제를 혼자 해결하려고 그렇게 애를 쓰면서 용을 쓰면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늦게 누우며 애를 써서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가장 가까이에서 그 문제를 도와주시고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을 옆에 두고서도 그렇게 애를 쓰면서 살아온 결과가 무엇입니까? 항상 내가 먼저였기 때문에 도움을 얻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 내 고민이 먼저이고 내 아픔이 먼저이고 내 문제가 내 목표가 먼저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고개를 돌려 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셔야 했는지 왜 예수님이 죽으셔야 했는지를 알고 싶어 하지도 않던 그 강도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고난을 그 죽으심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결과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아무런 도우심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도우심도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목사가 자살하고 장로가 자살하고 권사가 자살하고 집사가 자살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만큼 목사되기가 쉽고 장로되기가 쉽고 권사되기가 쉽고 집사 되기가 쉽습니다. 아무나 직분자가 되고 아무나 사명자가 됩니다.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부르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정말 직분자로 부르셨다면 그들은 능히 그 자살의 충동을 극복했을 것입니다. 오직 직분자들의 죄악은 그들 자신이 저지른 죄이며 그들 자신이 스스로를 직분자로 임명했기 때문에 일어난 죄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은 직분이 무엇인가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결정됩니다. 그것만이 진실하며 그럴 때 만이 예수님 바로 옆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영혼의 구원, 삶의 구원, 문제의 구원, 목표의 구원 모든 구원은 바로 그 진실된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을 비방하던 강도는 구원을 얻지 못하였지만 다른 한편 강도는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로부터 낙원을 약속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는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얻었고 기뻐하며 죽을 수 있었습니다. 원리에 따라 절차를 밟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옆에 있었다고 해서 구원받은 것도 아닙니다. 그가 삶의 마지막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했던 그의 고백이 이전에 예수님과 만나본 적도 없고 이전에 예수님께 행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지만 구원을 얻게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그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부인하지 않은 정도가 아닙니다. 자신이 죄를 지어서 그 죄값을 치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실토하며 내어 놓았습니다. 그가 정치범이었는지 살인범이었는지 간음범이었는지 어떤 흉악범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그 죄값을 치르고 있음을 깨달으면서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은 힘이 없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능력이 없어서 죽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에게 죄가 있어서 죄값으로 죽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바로 나를 위해서 죽으시는 것입니다. 나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걸 모른다 하더라도 그분의 고난에는 다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칩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나를 위해 오신 주님, 나를 구원해 주소서!’

우리가 그렇게 예수님께 간구할 때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시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고난 속에서도 우리를 잊어버리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625전쟁 중에 있었던 가장 위대한 모습은 흥남 철수에서 보여주었던 미군의 모습이었습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미 제10군단은 동부전선에서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알몬드 중장은 10군단의 철수를 위해 미 제7함대를 비롯한 함정을 거느리고 흥남에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부두에는 수많은 피난민이 몰려있었습니다. 이때 알몬드 중장은 그 피난민을 구하기 위해  엄청난 무기들을 모두 다 버리고 대신 피난민을 실었다. 그리고 거제도로 데려갔습니다. 그 마지막 날이 바로1950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그것은 우리 나라의 비참한 전쟁의 비극을 위로해준 알몬드 중장이 우리 민족에게 준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 때문에 고난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죄인이었기 때문에 우리 죄로 인해서 십자가에 달렸으며, 우리 죄로 죽으실 때에도 바로 옆에서 죽어가는 우리를 구해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죄인됨을 인정하고 잘못했음을 고백하고 죄를 지었음을 시인하고 주님께 도와달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해주시려고 고난당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우리를 외면하시지 않으십니다.

이 4월에 우리에게도 이러한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다시 예수님을 기억하고 붙드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후예배도 드리고, 새벽기도회에도 참석하고 금요철야예배에도 나오고, 금식도 하고,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으십시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 그분의 참된 희생의 의미를 깨닫고 눈물도 흘리실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속에서 여러분이 그렇게 원하시던 삶의 구원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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