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10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할 때 우리는 대개 더욱 채우시고
높이시며 세우시는 능력을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지만 그것만이 하나님의 능력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비우게 하시고 낮추시며
넘어뜨리시는 능력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를 복주시는 분이시며, 동시에 악한 자를 벌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양면성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히 의지할 수 있고 그 능력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자녀가 부모님을 이해하는데 부모님이 돈만 주는 분이라고 생각한다면 과연 올바르게 부모를
생각하는 것일까요? 우리 어머니는, 우리 아버지는 내가 필요할 때 나의 필요를 그때 그때 채워주시는 분으로만 생각한다면
그 자녀는 정말 올바르게 어머니를, 아버지를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기 중심적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관계는 피상적인 관계가 됩니다. 결국은 자녀나 부모나 다 상처를 입을 뿐입니다. 인간관계는 양면적입니다. 내가 내 편에서만 생각하면
자연히 그 관계는 피상적인 관계가 되고 맙니다. 관계는 상호교류적입니다. 그래서 내 편에서만 생각할 뿐 아니라 상대편에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상호교류적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능력도 단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도 존재함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기준에 맞지 않을 때 심판하시고 처벌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함으로 축복을 받는 사람들을 보여주지만 또한 하나님의 능력을 오해함으로 벌을 받는 사람들도 보여줍니다. 정말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저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해달라는 것은 다 해주시고 원하는 일을 다 이루어주시는 그런 인자하고 착한 키다리 아저씨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에는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너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머리 꼭대기에 서버립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그렇게 행동했던 악한 자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우습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반복해서 정말 하나님 앞에서 당신들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냐고 했을
때 그들은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행5:8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그들은 이전에 땅을 팔아서 교회에 바치고 존경을 얻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특히 바나바가 그런 경우였습니다. 바나바는 정말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밭을 팔아서 교회에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교회 안에서 더욱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또는 그렇게 되고도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밭을 팔았습니다. 하지만 그 밭을 판 전부를 드리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사실대로 말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밭을 팔았으나 그 일부만을 드리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 사실이 알려지면 별로 존경을 받지 못할 것 같으니까 그 사실은 자기들끼리만 알기로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아나니아가 밭을 판 돈의 일부를 가져왔을 때 그는 아나니아가 겉으로는 하나님을
위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 속으로는 하나님을 속이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차라리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어서 못 드리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하나님을 그렇게 속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또한, 아나니아의 아내 삽비라가 동일하게 거짓말을 하였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8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그들은 주의 성령을 속여서 거짓말 했고, 그 거짓말을 정말 알아보나
못 알아보나 시험까지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지 못했을 때 그들은 너무나 악한 일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능력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그 능력을 의지하지 못한다면 하나님 옆에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지만
그 능력을 믿지 못한다면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그 능력을 두려워함으로 악을 행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렇지 않고 그 능력을 알지 못한다면 바로 그 능력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안하무인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도 아니고, 거만함으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도 아닌, 경외심으로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능력을 의지하여 축복을
받게 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또한 그분의 능력을 두려워하여 처벌을 받지 않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아나니아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네가
하나님께 거짓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베드로가 그를 죽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습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그분을 두려워하지 않음으로 성령을 속였을 때 하나님은 그를 내어 쫓으셨습니다. 결국 그는 젊은 사람들에게 메어져서 밖으로
나가 장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였을 때 받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우리가 보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한 어리석음에 대해서 말씀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허수아비가 아니고 하나님은 맘좋은 할아버지도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미리
경고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과연 얼마나 크신지를 미리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칼의 양날과 같은 이 두 가지 측면의 하나님의 능력은 분명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때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채우시고 높이시며 세우시는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분의 비우시고 낮추시며 넘어뜨리시는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잠언3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잠3: 11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12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여호와는 징계하시고 꾸지람을 내리십니다. 그 이유는 아비가 그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함과 같습니다. 그를 바르게 하고 의롭게 하기 위해서 벌을 내리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히브리서 12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히12: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잠언의 말씀을 받아서 다시 설명하면서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징계가 없다면 우리는 참 아들이 아니다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벌하시는 능력은 근본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랑을 깨닫고 주님께로 나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징계를 하며 훈육을 하고 잘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잘못을 고치려고 하는 것이지만 그 의도가
온전히 전달되기란 쉽지 않습니다. 자녀는 그 마음을 모르고 더욱 비뚤어지며 부모는 그런 자녀때문에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부모는 훈육을
포기해 버리고 자녀는 다시 사랑만 주는 부모 만을 바라게 됩니다.
어쩌면 신앙도 같은 흐름을 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징계 없는 하나님, 처벌 없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징계와 처벌의 하나님은 잘못된 신앙관인양 거세게 저항하며 오직 사랑과 관용의 하나님,
무한한 용납과 기다림의 하나님을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두 가지 모습 중에서 한 가지의 모습을
감추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말씀은 아주 중요한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11절입니다.
“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이것이 아주 중요한 점이라는 데에 어쩌면 크게 공감하지 않으실지 모르겠습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드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요? 그러나 영어성경을 보면 그 의미가
조금 더 분명해 집니다.
“11 Great fear seized the
whole church and all who heard about these events.”
이 말은 커다란 두려움이 교회와 그 말을 드는 사람들에게 임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서의 두려움은 사람이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신적 존재를 만났을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그들은 바로 그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옆에 바로 말로만
듣던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안개가 걷히고 자신들이 까마득한 낭떠러지 바로 옆에 있음을 깨닫는 것 처럼 그들은 자기들 옆에 계신 주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커다란 경외심이 그들에게 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떠나간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 더욱
나아갔습니다. 주님의 진정한 능력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경외심으로 주님께로 나아가는 자들이 됩시다. 이러한 경외심을 얻기 위해서 누군가 쓰러질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우리에겐 충분한 이해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성령을 시험하지
말고, 속이지 말고,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주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이미 그 능력 안에 있습니다. 그 능력이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그 능력의 충만함을 깨달으면서 주님을 더욱 붙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저의 딸이 저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아빠는 힘이 세?” “그럼, 아빠는 힘이 세지! 그런데
그건 왜 물어?”
“응, 아빠가 힘이 세니까, 나 좀 업어줘”
혹시 아버지가 힘이 세다고 아버지로부터 도망가 버리는 자들이 있습니까? 또한 하나님이 힘이 세다고 하나님로부터 도망가 버리는 자들이 있습니까? 이런 사건을 통해서 혹은 이러한 내용을 통해 하나님이
무섭다고 도망가 버리는 자들이 되지 말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강하신 분이시니 우리는 더욱 주님을 의지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우리의 영의 아버지이십니다. 더욱 주님께로 담대히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구성 1. 하나님의 능력을 오해함으로써 심판을 받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2. 하나님은 자신에게 나아오는 자가 경외함으로 주님의 능력을 깨닫기를 원하신다. 3. 하나님의 능력은 근본적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에 근거한다. 4.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