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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능력] 6수9: 11-16 하나님은 우리가 의지하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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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수9: 11-16 하나님은 우리가 의지하기를 원하신다_1

 

2012.2.19. 주일오전,

 

*개요   [52능력] {1역사서} <A적용> [2분류]-[7실천]

 

[수]9:11     그러므로 우리 장로들과 우리 나라의 모든 주민이 우리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여행할 양식을 손에 가지고 가서 그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당신들의 종들이니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하라 하였나이다
[수]9:12     우리의 이 떡은 우리가 당신들에게로 오려고 떠나던 날에 우리들의 집에서 아직도 뜨거운 것을 양식으로 가지고 왔으나 보소서 이제 말랐고 곰팡이가 났으며
[수]9:13     또 우리가 포도주를 담은 이 가죽 부대도 새 것이었으나 찢어지게 되었으며 우리의 이 옷과 신도 여행이 매우 길었으므로 낡아졌나이다 한지라
[수]9:14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는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수]9:15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조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수]9:16     그들과 조약을 맺은 후 사흘이 지나서야 그들이 이웃에서 자기들 중에 거주하는 자들이라 함을 들으니라

 



때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말 중에 ‘기도해보고 결정하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일견 무척 신앙적인 말이기도 하지만 또한 무척 부담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말을 하기도 어렵지만 그말을 듣기도 어렵습니다. 지금 결정해줘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기도해보고 결정하겠다면 뭔가 타이밍이 맞지 않는 감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어떤 면에서 ‘기도해보고 결정하는 사람’은 매우 신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기도해보고 결정했기 때문에 그 결정을 더 믿을 수 있기도 합니다. 또한 시간을 들여서 기도해 보았기 때문에 즉시 대답하는 것과는 다른 지혜로움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능하면 ‘기도해보고 결정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한 삶에 대한 많은 간증도 듣고 많은 권면도 받습니다. 비록 빨리 빨리 결정해주지 않아서 원성은 조금 들을지 몰라도 그런 삶의 태도는 우리에게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해 보고 결정하겠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우리는 기도해 보고 결정하려고 할까요? 어떤 학교에 갈까에 대해서, 어떤 직장에 갈까에 대해서, 어떤 사회적 모임에 나갈까에 대해서 왜 우리는 기도하고 결정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그렇게 하려는 이유는 그것이 가장 유익해서가 아닙니다. 또한 가장 편안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러면 행복하게 되기 때문도 아닙니다. 때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내리는 결정은 유익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불편하게 되기도 합니다. 심지어 불행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하고 결정하는 이유는 그렇게 할 때에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좋은 진로의 결정만큼 우리의 삶을 보람되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시기별로, 분기별로 우리는 가끔씩 그렇게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그 이후에 오는 시간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됩니다. 비록 그 결정의 시간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기 때문에 보람과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길이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었을지라도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외롭게 그 길을 가셨습니다. 또한 그로 인해서 온전히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그 증거는 누가복음 23장 46절입니다.
“눅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리셨을찌라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 두 분은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행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께 기도하고 결정해야 하는가를 알게 되었다면 이제 문제는 정말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하고 결정하는가입니다. 그렇게 하는 척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흉내를 내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과 함께 거하고자 하는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시험도 그렇지 않습니까? 시험 보는 것이 무엇이 중요한가요? 문제는 잘 보는 것이지요.  어떤 시험이든지 그저 보기만 하는데 의미를 두는 사람도 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잘 보는 것이다는 말처럼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결정하는 흉내만 내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정말 그렇게 행하는 것이지요.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시험을 쳐 보면 됩니다.

 
여호수아는 바로 그러한 점에서 시험을 보고 있습니다. 그에게 찾아온 사람들은 마치 멀리서 온 것처럼 해어진 전대(배낭)와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낡아 기운 신과 낡아 해진 옷을 입고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멀리서 온 사람들이니 우리와 화친을 맺자고 한 것입니다.
“11 그러므로 우리 장로들과 우리 나라의 모든 거민이 우리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여행할 양식을 손에 가지고 가서 그들을 맞아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당신들의 종이니 청컨대 이제 우리와 약조하사이다 하라 하였나이다”
그 자신들을 낮추는 겸비한 말과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수아를 높이는 존경의 말을 들으며 이스라엘 백성들과 여호수아는 자신들이 그렇게 대단한 사람임을 피부로 느끼면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에게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들의 마음을 테스트해보시는 것이었습니다. 테스트과목은 무엇인가요? 바로 ‘능력의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는가’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면서 계속해서 그분을 의지하고자 하였다면 그들은 평화조약을 맺기 전에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멀리서 온 사신들의 평화조약제의에 응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는 이런 사소한 일도 하나님께 의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섣불리 화친을 하지 않고 하나님께 묻는다면 그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은 여리고 성을 물리치게 하셨습니다. 아이성을 정복하게 하셨습니다. 그 능력은 계속해서 가나안 전체에까지 미칠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또한 가나안으로 끝나지 않고 더 멀리도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보십시오. 그들에게 다가온 사실은 매우 가까이 살고 있던 기브온 거민이 말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매우 멀리 살고 있으니 화친을 맺자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번성하고 강해도 그정도까지는 퍼지지 않을 터이니 아무 상관도 없는 자신들과는 평화조약을 맺자고 했던 것입니다.
“6 그들이 길갈 진으로 와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러 그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우리는 원방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약조하사이다”
그랬던 그들과의 약조를 고민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하나님이 주실 땅의 범위는 결코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여호수아는 여기에서 넘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의 장대함과 그 크신 영광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믿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멀리 있는 땅도 주시리라고 생각했어야만 했습니다. 그 크신 능력을 의지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서둘러 그들과 조약을 맺어버리고 말았습니다.
“14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15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그들의 어리석은 생각은 채 삼일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맺은 언약의 당사자는 가장 중요한 요지에 있었던 기브온 거민입니다. 그들은 안방을 내준 셈입니다. 하지만 이미 맺어버린 약조는 되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단순히 묻지 않은 것 때문이 아니라 믿지 않은 것 때문에 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어리석음과 자신을 믿지 않음으로 인해 기브온 거민을 그대로 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시험에서 실패하고 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에게도 주시는 하나님의 시험을 깨닫습니다. 이전에 주님은 늘 그렇게 시험하셨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지를 살펴보셨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자를 있는 자처럼 부르시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능력이 있는 분으로 믿는지 아니면 그냥 인간의 노력과 열심에 밥숫가락 하나 얹으셔서 영광을 받으시려는 무임승차하는 분으로 생각하는지를 알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능력을 정말로 신뢰하지 못한다면 말은 기도한다고 하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순종하지 않는 선택을 할 것입니다. 시험을 많이는 보지만 그 결과는 참담할 것입니다. 항상 틀리는 문제는 틀리게 되어 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는데 정말로 하나님과 함께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데 백날 기도하면 뭐하겠습니까? 늘 그 결과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인데!

 
작은 문제를 기도하고 큰 문제를 기도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도를 한 시간 하고 두시간 하라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언젠가 아주 유명한 부흥강사 목사님이 자기는 하루에 5시간 기도를 하기 때문에 성령님과 동행한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루에 5시간 기도하기 때문에 성령님과 동행한다고 한다면 나머지 17시간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그 논리대로 하자면 성령님과 동행하지 않는 것이겠지요. 하루에 1시간, 하루에 10분 기도하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입니까? 완전히 세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루에 5시간씩 기도하면 정말 온전히 신령한 것일까요? 하루에 5시간 기도하는 목사님도 살다보면 악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다윗도 범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외면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내면의 심지가 결국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에 그 방향은 하나님께 가까이 있으나 혹은 멀리 있으나 다 그 은혜의 빛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태양을 향해 있다면 겨울이나 혹은 여름이나 따스한 햇살을 받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가리지 않고 중대사나 아니면 개인 소사나 구별하지 않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선택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가운데서 온전히 영광을 받으시고 그 크신 능력을 온전히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에게 스스로의 판단과 스스로의 결정을 허락하시지 않으십니다. 그 증거는 이것입니다. 민수기33장 55절입니다.
“민33:55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56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온전한 의지함입니다. 적절한 의지가 아닙니다. 누구는 몰아내고 누구는 남겨놓는 것이 아닙니다. 다 몰아내는 것입니다. 인종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민족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역사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하게 하시는 책입니다. 그러니 바로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섬길때에 해야 하는 온전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못하는 그 불신앙으로 인해 결국에는 몰아내야 하는 그들에게 우리는 몰아내어짐을 당하게 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개인의 삶 속에서 그리고 나라와 민족의 삶 속에서 중요한 고비가 되면 이러한 시험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 나라도 그러한 시험에 당면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제시대때 극심한 신사참배가 그것입니다. 그로 인해 많은 교회가 핍박을 당하고 민족적인 수치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것은 해방이 되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신사참배와 관련된 문제는 우리민족에게 시험거리였던 것입니다.


1938년 제 27회 장로교 총회에서 193명의 총대 사이에 일본순사 97명이 앉아 있던 가운데 '신사참배는 기독교 신앙에 배치되지 않는다'고 결의를 하고 만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1950년 4월 21일 대구제일교회에서 열렸던 제 36회 총회에서 과거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문제를 다루다가 안건들은 제대로 취급도 해보지 못한 채 아수라장이 펼쳐진 것입니다. 목사님, 장로님들이 자기들끼리 뒤범벅이 되어 서로 멱살을 잡고 때리고 발로 차고 하는 사태까지 발전하여 경찰이 개입해서야 겨우 진정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결국 총회는 부득불 무기 정회를 했고, 신사참배 문제는 제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으며 두달 뒤에는 625전쟁이 발발하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교회적으로, 가정적으로, 개인적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테스트하십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만을 의지하는지, 그 크신 능력을 의지하는지 아니면 세상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보고자 하십니다. 이 시험을 이길 방법은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대해서 선포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에 대해서 선포하는 것입니다.
“마 4:10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1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크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그분만을 섬길 때 우리는 모든 시험과 선택상황에서의 실족함속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위대하신 주님께 마땅히 드려야 하는 경배를 드리고 그분 만을 섬기려고 결심할 때에 헛된 타협과 악한 평화조약을 맺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그분만을 섬길 수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십시오. 주님을 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주님은 아무리 먼 지역의 거민까지라도 다 정복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의 크심을 바라보는 자는 결코 세상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그러한 믿음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나타나시기를 축원합니다.

 


*구성

1.    우리가 하나님께 묻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은 우리가 그 놀라운 능력을 의지하고 간구하는지를 시험하십니다.

3.    하나님은 우리가 습관적으로 묻는 자들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묻는 자들이기를 원하십니다.

4.    묻지 않고 행함으로 어려움 당하는 자들이 아니라 묻고 행함으로 승리하는 자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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