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16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17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 그가 우리와 우리의 열조를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에서, 우리의 지난 모든 백성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18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 곧 이 땅에 거하던 아모리 사람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2월 한달 동안 우리는 ‘모든 상황 속에서’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주를 찬양할지라 주는 너의 큰 상급 큰 도움이시라 주의 얼굴 구할 때 주의 영을 부으사 크신 사랑 안에서 주를 보게 하소서 내 영혼이 확정되고 확정되었사오니 믿음의 눈 들어 주를 바라봅니다 내 영혼이 확정되고 확정되었사오니 믿음의 눈 들어 주를 바라봅니다” 우리는 이 노래를 부르면서 우리의 마음이 확정되기를 원했습니다. 주님을 의지하기로 온전히 확정되기를 간절하게 바랬습니다. 사실 얼마나 우리의 마음은 간사합니까? 주님을 의지하면서도 끊임없이 세상을 바라봅니다. 주님을 따르겠다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세상을 따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래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렘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우리의 마음은 거짓되고 부패합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를 저울질 하면서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고 있습니다. 마치 두 사람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친 사람 처럼 이 사람과 만났다가 저 사람과 만났다가 이 사람을 좋아했다가 저 사람을 좋아했다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 어떤 연인이 이렇게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결국에는 이 사람에게도 저 사람에게도 채이고 맙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마음이 확정되기를 원하십니다. ‘나를 믿든지 세상을 믿든지 해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끊임없는 줄다리기와 더 좋은 편을 택하고자 하는 쉬지 아니하는 갈등을 불쌍하게 바라보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차든지 덥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차라리 내치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계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이 중에서 좋은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이 정말 더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께 마음을 확정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만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 사랑하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의 위인들이 얼마나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는지 그럼으로써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는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여호수아가 바로 그 마음을 확정하는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셨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확히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의 신인지 아니면 하나님인지를 택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은 하나님을 택하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을 확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담대함과 분명함과 확실함을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신 것은 여호수아가 그냥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한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기뻐하시는 것은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선택하는 이유가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지 자기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택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못된 이유로 택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좋은 포도주를 주어서, 하나님이 감람원과 그 과실을 주셔서, 그런 유익들 때문에 하나님을 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만약 어느 해 포도주를 더 이상 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느 감람원에 과실이 부족하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을 버리겠습니까? 포도주와 과실을 주지 않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정말 그러한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시험에 자꾸 떨어질 때 여전히 하나님을 믿어야 할까요? 직장에 계속해서 취직이 안될 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애인이 없을 때, 배우자가 없을 때, 자식이 없을 때, 재산이 없을 때, 그럴 때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한다면 도대체 진정한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부분에 명확한 자기 대답이 없다면 그 스스로도 혼란스럽고 괴로울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했다 하더라도 그 이유가 확실한 것이 아니라면 어느 순간에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갈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보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나를 믿어준다고 해봅시다. 배우자로서, 친구로서, 형제자매로서 믿어준다고 합시다. 그럴 때 그 믿음이 단지 내가 그 사람에게 잘해주기 때문에 그렇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배신감을 느끼겠습니까? 내가 한번이라도 실패한다면, 한번이라도 그의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지 못한다면, 그래서 버림을 받는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 얼마나 원통함을 갖겠습니까? 그 사람은 나를 믿은 것이 아니라, 내가 가져다 주는 그 무엇을 믿은 것 뿐이지요. 그 사실을 알았을 때에 억울하게 생각될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하나님을 그분이 주실 수 있는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분 자신으로 믿어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신이시기 때문에 때로 좀 속임을 당하고 때로 좀 이용을 당해도 괜찮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신실함을 원하는 이유는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그렇게 만홀히 여김을 받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해주신 진정한 도우심과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들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을 선택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셨고 또 앞으로 더 많이 주실 것이라서가 아니라, 우리를 죄악과 멸망의 삶에서 이미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더 큰 이유입니다. 그래서 비록 때로는 생각보다 좋은 것을 받지 못하더라도, 때로는 많이 얻지 못하더라도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을 의지하고 그분을 믿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심판에서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이 그 어떤 가치와 보상과 유익보다도 더 크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택하였습니다. 더 좋은 수확과 더 좋은 실력과 더 좋은 열매를 줄 수 있을 것 같은 가나안의 신이 아니라, 이미 지난 날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놀라운 능력으로 자신을 건져내어 주신 하나님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러한 뜻을 깨달았기 때문에 여호수아와 동일하게 고백합니다. “17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 그가 우리와 우리의 열조를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에서, 우리의 지난 모든 백성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물론 그분이 더 좋은 것을 주실 것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거에 주님이 베푸신 놀라운 구원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확실하며 분명한 선택의 이유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이후에 받는 모든 것은 그저 덤으로 얻는 것일 뿐입니다. 그들은 이미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었지만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나왔다 하더라도 죽을 수 있었지만 큰 이적들을 통해서 그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어린아이들과 노약자와 부녀자를 이끌고 움직이는 이스라엘 민족은 대적들의 침입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호해 주실 때에 아무도 그들을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강물에서 건져내어 주었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의 생떼를 씁니다. 구원을 허락하여 주셨지만 왜 더 많은 축복을 주시지 않느냐며 항변합니다. 축복을 주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구원을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이미 얻은 축복도 감사하지 못하고 더 큰 은혜로 인도하시는 과정에 대해서 조금도 참지 못하는 인내심 없는 마음을 가질 뿐입니다. 그로 인해 오히려 받았다고 생각했던 구원까지도 온전히 이루지 못하는 안타까운 일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모습들에 대해서 원하시는 것은 끝까지 인내함으로 온전한 구원을 이루게 되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느냐는 생활의 문제 보다도 하나님 나라에 정말 갈 수 있느냐는 구원의 문제가 더 중요한 분야입니다.
우리에게 삶의 유익보다 구원이 더 중요한 이유는 그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2장은 이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의 가치는 더 큰 유익이 아닙니다. 최고의 유익과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그 일이 가장 귀중한 일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주님을 선택하는 이유는 세상에서의 유익때문이 아니라 구원 때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2월 한달동안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함께 묵상했습니다. 그 모든 묵상을 통해 지금은 결정할 때입니다. 그 깨달음과 묵상이 헛되지 않았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선택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우리 온 집과 함께 하나님을 선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를 구원해 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이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구원에 필요한 낙하산을 입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 스스로 벗어버린다면 그것은 결코 유효한 것이 되지 않습니다. 신학적으로 구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한번 낙하산과 구명조끼를 입은 사람은 결코 그 것을 벗을 수 없다가 아닙니다.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구원을 얻고자 노력하며 붙드는 자는 결코 그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원과 믿음은 의지적인 의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결코 그러한 의지가 있는 자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구원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오직 자신의 의지와 선택 때문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더욱 주님의 구원을 이루는 자들이 됩시다. 그 구원을 이루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여호와만을 섬기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확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 변하지 않는 결심 속에 그 삶이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마음가짐 속에 절대로 주님을 떠나지 않는 구체적인 삶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어떠하든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붙드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한 노력과 애씀은 반드시 결실할 것입니다. 여러분을 도우시고 힘주시며 여러분의 대적을 마침내 몰아내게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구성
1. 마음을 확정한다는 것은 모든 선택에 있어서 최종적인 결정이자 책임감입니다. 2. 여호수아는 모든 신들을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정하였습니다. 3.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지금까지 그분의 행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4. 우리들은 모든 신앙경험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로 나아가는 자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