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2장에는 유명한 천국잔치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보여주고 있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와 계획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이 천국잔치의 비유를 통해 밝혀지는 천국의 목적과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이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천국은 사람들을 영생하도록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천국에서 희희낙락하도록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천국에서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좋아하는 것을 먹으며 좋아하는 곳에 살고 좋아하는 옷을 입을 수 있도록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천국에 가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말씀에서는 천국의 정확한 목적과 의미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2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천국은 임금의 아들을 위하여 베풀어진 혼인잔치와 같습니다. 또한 그 아들을 기뻐하기 위해서 혼인잔치를 베푼 임금과도 같습니다. 이 천국의 목적은 그 아들이신 예수님과 아버지이신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천국은 사람들에게 최고로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는 곳이 아닙니다. 최고로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곳도 아닙니다. 최고로 좋아하는 것을 먹으며 최고로 좋아하는 곳에 살며 최고로 좋아하는 옷을 입을 수 있도록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런 천국을 상상하고 천국에 들어가기를 노력하다보면 자신의 상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실망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정말 그런 천국이 있다고 사람들을 미혹하고 유혹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유혹에 잘못 걸려들면 이단이나 혹은 이교에 빠져서 욕심이 커진 나머지 천국은 커녕 더 빨리 지옥에 들어가게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천국의 의미를 오해함으로 생기는 몇 가지 유머가 있는데 그 중에 한 가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야구를 너무나 좋아하는 절친한 친구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먼저 죽었는데 어느 날 밤 먼저 죽은 친구가 다른 친구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친구, 자네에게 들려줄 좋은 소식 하나와 나쁜 소식 하나가 있네” “좋은 소식은 뭔가?” “천국에서도 우리가 좋아하는 야구를 할 수가 있네!” “와, 그거 정말 좋은 소식이네, 그럼 나쁜 소식은 뭔가?” “자네가 오늘 밤 선발투수야”
만약 천국을 야구나 하고 축구나 하고 농구나 하고 배구나 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무척 실망할 것입니다. 그래서 본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수련회를 가는데 수련회에서 물놀이를 한다고 이야기해주면 학생들은 좋아합니다. 하지만 물놀이만 하러 수련회를 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을 해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한 시간 물놀이 하고 나머지 시간은 예배드리고 성경공부를 할 때 그 수련회의 시간을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문말씀에서 혼인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오라고 하신 것은 그 초대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들과 임금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들과 임금을 위해서 그 혼인잔치에 나가야만 했습니다. 비록 자신에게 더 좋은 것과 더 바쁜 일이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렇지만 원래 초대되었던 사람들은 임금에게로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더 바쁜 일이 있었고 더 좋은 것을 누릴 일이 있었고 더 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아들과 임금보다도 말입니다. 그들은 초대를 거절했고 외면했으며 초대한 임금의 종들을 잡아서 능욕하고 죽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대해 임금은 군대를 보내어서 종들을 거절했고 외면했으며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들의 동네를 불살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로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 혼인잔치에 초대를 거절했다고 해서 그 거절한 사람들을 진멸하고 불사르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알고자 한다면 임금과 초대받은 사람들의 관계를 보면 됩니다. 그들은 부르면 와야 하는 임금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거부하고 멸시하며 오히려 살육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임금의 백성이 아니라 반군세력이었고 임금의 대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진압하고 진멸한 것입니다. 단지 초청을 거절해서가 아니라 초청을 거절함으로서 대적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이후에 초청은 모든 사람에게로 확대되었습니다. 종들에게는 사거리로 가서 만나는 대로 사람들을 데려오라는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이로써 천국의 의미가 더욱 밝혀지고 있습니다. 천국은 아들과 임금을 위해 존재하는 혼인잔치와 같고 그 혼인잔치에는 모든 사람들이 초대됩니다. 일부 특정 사람들만 그 초대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나는 대로 누구나 다 이 초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혼인 잔치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천국복음의 핵심이 여기 있습니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계급이나 성별이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와도 된다는 천국에의 초청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마치 초대장을 가진 사람만 입장 가능했던 결혼식이 그 다음에는 누구나 오기만 하면 다 들어올 수 있게 되는 결혼식이 된 것과 같습니다. 천국은 그래서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다 개방되었습니다.
처음에 딱 지정된 사람들에게만 가서 천국을 소개해야만 했던 종들의 입장에서는 이제 얼마든지 누구에게나 천국을 소개할 수 있게 된 상황은 얼마나 좋을까요? 예전에는 그로 인해 거부되거나 외면되거나 핍박을 받아서 괴로웠던 종들은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천국을 소개하고 초청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방법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천국 비유의 최고의 핵심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절대절명의 핵심이 바로 그 다음에 나옵니다. 그렇게 무조건적으로 선포되고 소개되며 초대되는 천국이었지만 이 천국잔치에는 중요한 하나의 원리가 있었습니다. 모두에게 개방되었기 때문에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누구에게나 다 열려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적용되었던 하나의 원리, 천국을 천국답게 만드는 유일한 원리가 나타났습니다.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천국잔치에 청함을 받아 들어왔더라도 택함을 받아야 남아 있을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청함을 받아서 오느냐 마느냐가 전부가 아니라 택함을 받아서 남아 있느냐 아니면 떠나느냐가 구분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의 핵심이었습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천국의 핵심입니다. 천국잔치에 초청을 받아 왔다고 하더라도 마음을 놓지 마십시오. 어차피 이 사람 저 사람 다오는 곳이 천국잔치이니까 말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택함을 받아 머무르게 되느냐 아니면 떠나가게 되느냐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게 합니다.
안믿는 사람들에게, 혹은 실족한 사람들에게 항상 맨 처음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다녀 보신 적이 있습니까?’라는 것입니다. 그 경험을 물어보면 다양한 경험담을 들을 수 있습니다. 어릴 적에 혹은 학생때, 혹은 군대에서, 대학에서, 직장에서 다녀본 경험이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은 다니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교회를 천국의 그림자라고 합니다. 그림자를 밟고 있으면 어느새 그 본체에 가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림자를 밟다가 떠나 버리면 그 본체와는 멀어지게 되어 버립니다. 계속해서 그림자를 밟고 있어야만 하고 그래야 비로소 본체를 붙들게 됩니다. 교회도 계속 다녀야 그 의미가 있는 것인데 교회를 더이상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이전에 교회를 다녔다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게 만듭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천국에서도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오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교회에 정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비로소 천국의 택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서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은 두 가지 유형이 있었습니다. 한 유형은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는 대로 데려오는 종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유형은 안에서 들어온 사람을 내보내는 사환들이었습니다.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러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이 둘은 각기 자기가 맡은 일을 하였습니다. 종들은 열심히 데려오고 사환들은 열심히 내보내고. 그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입니다. 종들은 데려오라고 하니까 누구든지 막무가내로 걸려내지 않고 데려오는 것이고 사환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예복을 입지 않으려고 저항하며 불순종하기 때문에 내보내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일은 전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정확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이제 이러한 말씀의 의미를 깨닫는다면 우리는 종들로서 열심히 사람들을 데려와야 하겠습니다. 아무런 걱정을 하지 말고 데려오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종들로서 데려온 사람들이 내보내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마십시오. 그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결코 내보낼 수 없다고 종들이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은 순종할 뿐이지 저항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들어온 그들에게 문제가 있고 악함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처리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종들의 소관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내어보내는 것은 오직 사환들의 맡은 일입니다. 그들이 성실히 예복을 입지 않은 자를 걸러낼 때에 비로소 혼인잔치는 아들을 위한 잔치가 됩니다. 예복을 입지 않고 참여하는 자들은 아들과 아버지의 잔치를 거부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런 자들이 많으면 많을 수록 잔치는 변질되고 하나님은 분노하십니다. 그래서 사환들은 부지런히 그런 자들을 내어보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초청, 천국에로의 부르심은 아들과 아버지를 위한 시간입니다. 그 분들을 기뻐하고자 동참한다면 아들의 영광과 아버지의 기쁨에 예복을 입고 참예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 잔치를 위해 애쓸 때에 종들과 사환들은 이루어지는 모든 혼인잔치의 시간으로 인해 기뻐함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왜나하면 자신들의 수고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번 11월 네째주 총동원주일이 바로 그러한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종들로서 즐거이 주님의 복음에로의 부르심을 전파하는 자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구성 1. 하나님은 그 아들을 위해서 혼인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초청하셨습니다. 2. 그 초청은 원래 청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중에는 점차 모든 사람들에게로 확장되었습니다. 3. 이 초청의 핵심은 종들을 통해 부름을 받는 사람들과 사환들을 통해 버림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4. 아무나 부르는 종이 있고 골라내는 사환이 있음을 기억하고 부르심을 잘 받들어서 충성하는 자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