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번의 중요한 만남을 갖습니다. 어떤 만남 속에서는 커다란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고 또 어떤 만남 속에서는 인생의 문제를 풀 수 있게 되기도 합니다. 가끔은 나쁜 만남도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많은 부분에 있어서는 좋은 만남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그냥 무시해 버리기 보다는 그 속에 있는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아만 장군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의 만남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그의 삶은 어쩌면 이 세 가지 만남을 이루기 위해 조성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아람 왕의 군대장관이었다는 것은 이제 말씀드리려고 하는 중요한 세 사람을 만나기 위해 예비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세 사람을 만나면서 그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고 있습니다. 과연 그가 만났던 세 사람은 누구일까요?
나아만 장군이 만났던 첫 번째 사람은 이스라엘에서 잡혀온 작은 소녀였습니다. 그 소녀는 사실 나아만 장군이 직접 만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신 소녀를 주관하고 있는 주모를 통해 그 소녀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 소녀는 나아만 장군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했었고 그 말을 주모가 나아만장군에게 전해주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그 소녀가 이렇게 말한 것은 나아만 장군에게 문둥병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왕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였고 용사였지만 동시에 문둥병자였습니다. 그는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었고 아람을 구원한 위대한 영웅이었지만 동시에 문둥병자였습니다. 많은 종들을 거느리고 많은 부와 권세를 가졌지만 동시에 문둥병자였습니다. 그것이 그의 문제였습니다. 그 병은 나아만 장군이 가지고 있던 모든 좋은 것들을 다 깎아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소녀가 해준 말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소녀는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그렇게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소녀 자신은 지금 종으로 이스라엘에서 붙잡혀왔습니다. 그는 자유인으로 이스라엘에서 살 수 있었지만 재수가 없었는지 운이 나빴는지 스스로 뭔가 잘못을 했는지 전에 아람사람들이 떼를 지어 나가서 사람들을 사로잡을 때 같이 잡혀왔습니다. 사실 그 소녀는 지금 주인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자기는 지금 종의 신분이 아닙니까? 뿐만 아니라 그 소녀가 말한 것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사마리아에 있다는 선지자가 정말 능력이 많고 특별했으면 왜 진작 알지 못했을까요? 왜 다른 사람들이 떼를 지어서 가지 않았을까요? 왜 이 세상의 모든 문둥병자들이 다 그리로 몰려들지 않았을까요? 그랬다면 그 소문에 소문을 듣고 나아만 장군도 그들 틈에 끼어서 자신의 문둥병의 치료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소녀가 만약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면 무슨 이유를 대서라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은 작고 초라하고 보잘 것 없고 여자아이고 노예고 자기 문제도 변변히 해결못하고 우리 주인은 나를 노예로 삼은 사람이고...그 모든 이유가 충분히 그녀가 아무말 하지 못하게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녀에겐 그보다 더 큰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마음이 없었다면 그 소녀는 결코 그런 말을 감히 주모에게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스스로에 대한 자괴심과 낙심과 분노와 절망이 결코 나아만 장군에게 그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도록 막았을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나아만이 그 소녀의 말을 무시하려고 했다면 어떤 이유에서든지 무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전에 들어본 적이 없고, 정말 나을 수 있을지 알지 못하고, 적군의 선지자이고, 별로 유명하지도 않고, 소녀의 말이 신빙성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고...무슨 이유로든지 못들은 척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작고 초라한 노예소녀는 나아만이 만난 첫 번째 중요한 만남이 되었습니다. 그 소녀의 말을 듣고 왕에게 허락을 받아 나아만 장군은 이스라엘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이전에는 정복과 승리를 위한 출정이었으나 이제는 회복과 변화를 위한 여정을 떠난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만났던 그 소녀는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장소를 바꾸고 방향을 바꾸고 인생의 의미를 바꾸는 중요한 변화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냥 만나기만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고자 하는 길을, 가고자 하는 장소를, 가고자 하는 방향을 바꾸어 주지 않는 만남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바꾸는 만남은 정말로 중요합니다. 또한 그 만남을 통해 진정한 유익과 축복으로 인도된다면 그것은 더할나위 없이 중요한 만남입니다. 그래서 그 소녀가 바로 나아만 장군이 만나는 첫 번째 중요한 만남이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이유로 두 번째 중요한 만남의 대상은 나아만 장군이 이스라엘에 도착해서 만났던 이스라엘 왕이 아닙니다. 나아만 장군은 이스라엘에 도착하자마자 이스라엘 왕을 찾았습니다. 소녀는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를 찾아가라고 했지만 나아만 장군은 이스라엘 왕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문둥병을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무슨 재주로 이스라엘 왕이 나아만 장군을 고칠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스라엘 왕은 자신의 옷을 찢으면서 아람의 군대장관이 무리한 요구를 하니 이것은 이스라엘을 침공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며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는 아마 아합의 아들인 여호람 왕인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지자와는 별로 관계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사 선지자를 쉽게 생각해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왕이 옷을 찢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엘리사 선지자는 자신이 직접 나아만 장군을 자신에게 보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나아만 장군은 자신이 원래 가고자 했던 사람에게로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그는 분개하면서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엘리사 선지자가 사람을 보내어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번 씻으라'고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만나 주지도 않고서 말입니다.
이일을 무례하다고 생각했던 나아만 장군은 다시 아람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중단하고 그만두려고 했습니다. 멀리 이스라엘까지 와서 병이 낫기를 기대하였지만 엘리사의 말 한마디에 다 그만두고 정리하고 다시 돌아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 나아만 장군을 붙들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바로 나아만 장군의 종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나아만 장군이 만난 정말 중요한 두 번째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왜 중요한 자들이었는가 하면 나아만 장군의 생각을 바꿔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를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만약 엘리사가 더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그 일을 했을 것입니다. 만약 엘리사가 나아만이 예상한 대로 그가 엘리사에게 왔을 때 정중하게 서서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상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쳤다면 순순히 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더 어려운 일을 시키지도 않았고 정중하게 맞이하지도 않았습니다. 너무나 쉽고 너무나 무례하고 너무나 어이없는 일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나아만 장군은 다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는 달라서 다 그만두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지 않습니까? 내 생각과 다를 때, 내 예상과 다를 때, 내 심기를 불편하게 할 때, 내 감정을 자극할 때, 내 욕구를 건드릴 때, 귀찮게 할 때, 변화하게 하려고 할 때, 안해 본 것을 하게 시킬 때, 내 기준에 맞지 않을 때 우리도 다 그만두지 않습니까? 다시 돌아가지 않습니까? 더욱 분개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럴 때 그 종들은 나아만에게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내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 내 예상보다 더 중요한 것, 내 감정보다 내 욕구보다 더 중요한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것은 병이 낫는 것이었습니다. 최소한 나아만에게 그 순간 그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게 그의 해결하고자 했던 애초의 문제였습니다. 또한 그것이 그의 얻고자 했던 가장 큰 목표였습니다. 그의 종들은 바로 그것을 생각나게 했고 그래서 나아만 장군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되돌아가는 것을 막았던 것입니다. 또한 나아만 장군이 싫어했던 요단강에서 목욕하는 일의 의미를 단순히 '씻어 깨끗하게 하는 일'로 축소시켰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말이 나아만 장군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그는 결코 문둥병을 고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변화는 항상 이전의 삶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의 계획대로 자신의 감정대로 자신의 욕구대로 한다면 그건 변화가 아닙니다. 그게 버려지고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계획과 새로운 감정과 새로운 욕구가 생겨나야 그것이 진정한 변화인 것입니다. 몸만 나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병만 나으면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진정한 변화는 바로 마음의 변화인 것입니다. 돌아가려는 마음을 막고 다시 계속 변화를 추구하였을 때 나아만 장군은 진정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묵묵히 요단강가에서 일곱번 목욕을 했을 때 그의 몸이 변하였고 문둥병이 걸렸던 그의 육체는 어린아이의 살처럼 깨끗하게 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문둥병 같았던 그의 강퍅했던 마음이 온순하고 새롭게 변하였습니다. 그것을 이루게 해 주었던 나아만의 종들은 그가 만난 두 번째 중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중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나아만의 삶을 변화시킨 세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중요한 사람, 그는 엘리사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가 어떻게 나아만의 삶을 변화시켰습니까? 엘리사 선지자는 너무나 중요하게 나아만의 삶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앞서 보았던 어떤 사람보다도 엘리사 선지자는 훨씬 더 중요하게 나아만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그것은 엘리사가 나아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 보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엘리사가 아니었다면 나아만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 나아만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십시오. 15절, 16절입니다.
"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청컨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가로되 나의 섬기는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받지 아니하리라 나아만이 받으라 강권하되 저가 고사한지라"
그는 이제 막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된 나아만 장군을 대면하고 있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새롭게 다시 태어난 한 성도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신에게 절하려고 합니다. 자신에게 예물을 드리려고 합니다. 자신에게 모든 감사와 경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그 모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기쁨을 자신이 취할까요? 아니면 하나님께 돌리라고 할까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엘리사 선지자는 단호하게 자신에게 대한 모든 초점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가 받아들였다면 그가 용납했다면 그가 그 예물을 취했다면 결코 나아만 장군은 하나님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나아만은 정말 더 중요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끝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예물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아만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했습니다. 그냥 한번 뿐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알도록 계속해서 자기 나라에 돌아가서도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흙을 자기 나라에 가져갈 생각을 할 수 있었고 자기 나라에서 산당에서 우상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었으며 여호와께서 자신이 어쩔 수 없이 몸을 굽힐 때 자기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만약 엘리사가 얼른 그 예물을 취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가 그것을 거부하고 하나님께 돌렸을 때에 비로소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이 세 번째로 만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혹시 이러한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진정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어디로 가야 누구에게로 가야 그 문제를 해결될 수 있는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 사람을 귀중히 여기십시오.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을 붙드십시오. 그를 통해 모든 것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마음을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까? 포기하고 싶을 때 그만두고 싶을 때 돌아가고 싶을 때 죽고 싶을 때 여러분을 붙잡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들을 버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붙드는 사람들 말고 여러분을 붙들어 주는 사람들을 찾으십시오. 여러분이 기억하는 사람들 말고 여러분을 기억해주는 사람들을 발견하십시오. 그럴 때 정말 중요한 목표를 이룰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을 이용하지 않고, 여러분을 속이지 않고 여러분을 어리석은 길로 인도하지 않는, 오직 하나님께로 인도해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따르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의 말을 들으십시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의 말을 거부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의 최종 목표인 하나님이 그 뒤에 계십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은 일생일대 최고의 목표이자 유익입니다.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여러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중에 어떤 사람들은 정말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한번 만나고 끝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관계의 문제입니다. 중요한 관계를 갖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지금 여러분이 나온 이 교회는 여러분에게 그런 중요한 의미를 갖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만나는 성도들은 그런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만나는 목사는 그런 의미를 갖지 않습니까? 부디 그러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신형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을 잘 기억하여 우리 삶 속에 이 세가지 중요하고 축복된 만남과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으로 충만해지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정말 중요하고도 유익한 만남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그 기회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 그 하나님으로 더욱 온전한 문제를 해결하고 더욱 높은 목표를 이루며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