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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유형] 43요 1; 1-7 하나님의 존재하심의 증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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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1; 1-7 하나님의 존재하심의 증거들_1

 

 2015.6.14. . 주일오전.

 

*개요:    신앙문제, 8사역-양육, 2유형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1: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1: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림의 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떡이 있기는 있지만 그림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맛있어 보이고 좋아보여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으니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모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구원과 영생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이 단 한마디로 거절되고 부인되어버립니다. 그것은 바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입니다. 그말은 지금까지 우리의 모든 신앙과 믿음을 그림의 떡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불신과 의심은 태양조차도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는 것처럼 강력하고 흔들리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불신과 의심이 있는 자에게 다시 자신의 손바닥을 내리고 태양을 온전히 보게 하는 것이란 너무나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힘든 신앙에 관한 일들을 단순하게 포기하지 않고 신은 존재한다는 것을 계속 설득하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오히려 더 큰 신앙과 확신을 갖게 됩니다. 불신과 의심과 싸우면서 더욱 신앙과 확신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면서 해결력이 더 커지는 것이나 병마와 싸우면서 더욱 병을 잘 치료하게 되는 것처럼 이 세상의 자연스러운 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가 단순히 그림의 떡에 불과한 분이 아니라 그분이 바로 생명의 떡이시라는 것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전부터 철학에서는 신존재증명이라는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주제가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러한 신존재증명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존재론적 증명입니다. 이것을 주장한 사람은 안셀무스, 데카르트, 헤겔이 있습니다. 그 의미는 신은 전지전능하고 완전한 자를 신이라고 하기 때문에 신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존재라는 신의 개념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추론하기 때문에 이를 존재론적 증명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우주론적 증명입니다. 이것을 주장한 사람들은 아퀴나스, 로체 등이 있습니다. 그 의미는 이세상이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는데 가장 처음의 원인으로 계속 올라가보면 마침내 신이 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목적론적 증명입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칸트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가장 최고의 아름답고 장엄하고 고귀한 목적이 존재하는데(예를 들면 도덕명령 같은), 그러한 목적이 존재하는 것을 볼 때에 신의 섭리가 있고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전부 인간의 이성과 정신의 고차원적인 활동인 철학의 사유과정과 고민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씁니다.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성경은 이 세상의 시작을 말씀의 존재로부터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 말씀의 존재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과 동일하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 말씀을 예수님으로 해석합니다. 요한복음은 그 예수님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 말씀을 풀이하면 이렇게 됩니다.

태초에 예수님이 계시니라 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태초라고 말하는 그 시점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태초 그 이전부터 존재하신 분이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보여주는 신존재증명의 중요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철학적인 신존재증명은 인간에서 혹은 세상에서 신으로 가는 길을 찾는 것이었으나 성경은 신으로부터 인간으로 세상으로 나아옵니다. 철학적 지성은 땅에서 하늘로 나아가는 길을 설명하고 있었으나 성경은 하늘에서 땅으로 나아오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큰 차이가 얼마나 다른 결과를 만드는가를 보십시오. 불신자들이 전제하고 바탕으로 깔고 있는 생각은 신은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이 없다는 생각이 틀리다는 것을 증명해 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신존재증명을 제안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증명을 내놓아도 여전히 불신자들은 그래도 신은 없다고 말합니다. 애초에 신은 없다는 확신을 바꾸고 변화시키려고 하니까 이것이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신의 존재로 연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버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철학적 신존재증명은 인간의 존재, 세상의 존재로부터 출발하니까 그로 인해서 신이 존재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하더라도 그 결론을 부인해버리는 것이 아무런 지장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신의 존재없이도 인간의 존재, 세상의 존재는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간과정에 일어나는 사유의 과정은 단지 논리적 비약이라고 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에 여전히 불신자들에게 이러한 증명과정은 납득되지 않습니다. 또한 납득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방법은 전혀 다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신은 있다로부터 출발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신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예수님이 존재하시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들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펼쳐진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것을 쭉 살펴보다 보니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예수님이 존재하심을 쭉 살펴보면서 비로소 발견하는 것은 그로 인해서 바로 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차이가 가장 큰 차이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예수님이 존재하심으로부터 출발해서 결국 자신의 존재에까지 이어지는 신존재증명은 결론이 더할 나위없는 진실이기 때문에(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은 그 전제까지도 전부 진실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성경에서 보여주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존재가 자기자신까지 이어지는 관계를 살펴봅니다. 2,3절입니다.

“[]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셔서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만물이 그가 없이는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하나님과 함께 만드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도 기반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부모님이 존재해야 하고 부모님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부모님의 부모님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모든 존재가 다 어디에서 생겨났겠습니까? 우리가 누리고 있는 해와 달과 별들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산과 물과 공기와 흙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새롭게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이미 존재하는 모든 사물과 이미 존재하는 모든 법칙과 이미 존재하는 모든 원리들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지 그런 것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 이후에 우리가 만든 것도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도 그리고 우리 자신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면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이 세계를 만드셨다는 것으로 인한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풍족하지만 예전에는 지금 풍족하던 것이 모자라서 고생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전기가 부족해서 종종 정전이 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는 양초를 켜놓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물이 부족해서 종종 단수가 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는 물차가 와서 물을 나눠주었고 기다려서 그 물을 받으며 살아야만 했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러한 불편은 모두가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더 예전에는 국가가 전쟁을 겪느라 고통을 겪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더 예전에는 일제치하에 살아야만 해서 더욱 피나는 아픔을 겪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왜 그런 일들을 피할 수 없습니까? 왜 일제치하를 피해서 도망갈 수는 없었습니까? 왜 전쟁을 피해서 도망갈 수는 없었습니까? 왜 단전이나 단수를 피해서 도망갈 수는 없었습니까? 따로 어디론가 갈 때가 없었습니다. 그냥 그 모든 고통을 겪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귀중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까? 사실 지금 바로 이 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에게 있었던 모든 것의 소중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편안하게 병원을 가고 편안하게 지하철을 타고 편안하게 마트나 백화점을 가고 편안하게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갈 수 있던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러지 못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는 모든 것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여전히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오는 모든 것의 소중함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버리는 것이 될 때 결국은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어려움과 문제 속에서 하나님을 깨닫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어려움과 문제 속에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거부할 때에 결국 일어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존재의 소멸이 일어나게 됩니다. 자신의 존재의 근거인 하나님을 거부하기 때문에 결국 자기 자신도 사라지게 되어버립니다. 또한 그렇게 사라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어느정도로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예가 바로 로봇(Robot)입니다. 로봇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과 유사한 모습과 기능을 가진 기계, 또는 무엇인가 스스로 작업하는 능력을 가진 기계입니다. 이 말은1920년 체코슬로바키아의 극작가 카렐 차페크(Karel Čapek)의 희곡R.U.R.(Rosuum' s Universial Robots)에서 처음 사용된 뒤로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로봇의 어원은 체코어의 노동을 의미하는 단어 'robota'에서 나왔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차페크는 희곡 ‘R.U.R.’에서 모든 작업능력에서 인간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면서 인간적인 감정이나 혼을 가지고 있지 않은 로봇이라고 불리는 인조인간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희곡에서 로봇은 자신의 반항적인 정신을 발달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창조주인 인간을 전부 죽입니다. 이후에 미국의 과학자이면서 작가인 아이작 아시모프(Issac Asimov: 1920.1.2~1992.4.6)는 로봇공학 3원칙을 만들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원칙1>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행동을 해서는 안되고, 인간이 해를 입는 상황에서는 인간을 도와야 한다

<원칙2> 로봇은 인간이 내리는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 원칙1에 위배되지 않는한 그렇다

<원칙3> 로봇은 자신의 존재를 보호해야 한다. , 원칙1 2에 위배되지 않는한 그렇다

이 세 가지 원칙을 보면 인간은 결코 로봇을 자기 수준으로 만들지 않고자 했습니다. 그말은 다시 말하면 인간이 로봇을 만들 때에는 인간에게 대항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가 바로 로봇이었는데 그 로봇이 그 원칙을 어길 때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로봇은 더이상 존재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인간은 로봇을 없애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과 인간이 만든 로봇과의 관계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어떠할까요? 하나님은 인간을 결코 대항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더욱 월등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부정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파워나 능력의 충만함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어떤 입장에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점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가장 완전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지고 창조되어진 인간이 한 일은 자신을 만드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부인하고 부정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러한 안타까운 현실은 이렇게 설명됩니다.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1: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님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을 얻을 때에 바로 사람들의 빛이 나타납니다. 그 생명의 빛이 인간의 어두움에 비취었지만 어두움은 그 빛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새롭게 하고 자신을 온전케 하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한 일은 바로 그 빛을 없애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어둡고 여전히 빛이 없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오직 사망일 뿐입니다. 빛되신 주님을 거부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주님의 빛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인생이란 소망을 잃고 절망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일 수 밖에 없었을 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그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나타내는 증거로서의 같은 인간입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세례요한을 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1: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을 그 수준에서는 절대로 깨달을 수 없는 어리석은 자들을 위해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그가 바로 세례요한이었습니다. 그는 빛에 대해서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게 하는 역할을 하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존재하심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우리에게는 성경이 보여주는 신존재증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있기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기에 인간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인간 자신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것을 보여주는 또다른 인간을 보내주셨습니다. 지금도 세례요한의 역할처럼 하나님의 존재를 불신하며 의심하고 부인하는 불신 자녀에게 신앙 부모를 보내주십니다. 또한 그런 불신 부모님에게 신앙 자녀를 보내주십니다. 불신 남편에게 신앙 아내를 보내주시고, 반대로 불신 아내에게 신앙 남편을 보내주십니다. 불신 친구에게 신앙 친구를 보내주시고 불신 민족에게 신앙 민족을 보내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주 되심을 창조주이심을 믿고 따르는 그분의 일군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게 하십니다. 한 나라의 왕은 자신의 왕됨을 국민에게 철학적 사유와 논리적 증명을 통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군대를 보내거나 사신을 보내서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위엄과 권세를 통해서 그나라의 국민들은 자신의 왕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받아들일 때에 왕과 백성이 되고 그래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왕과 적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하심의 스스로 증거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증거로서 믿는 여러분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또 다른 증거임을 깨닫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자들이 주님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깨닫고 주님 안에 거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러한 창조자되신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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