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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연합] 47고후 4; 7-10 결코 꺼지지 않는 생명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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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고후 4; 7-10 결코 꺼지지 않는 생명력2_2

 

 2015.10.4..주일오후.

 

*개요:    신앙과 믿음,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려 함이라

[고후]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여도 싸이지 아니며 답답한 일을 당여도 낙심지 아니

[고후]4: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며 거꾸러뜨림을 당여도 망지 아니

[고후]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려 함이라

 

 

무한동력의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더 큰 에너지 근원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태양이나 원자로나 수력이나 그 어떤 막강한 것이 모든 힘과 동력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런 근원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공급받는 힘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소멸되거나 고갈되지 않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님으로부터 받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힘든 상황에서나 어떤 위기에서도 충분히 그 모든 순간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이루어진 [무한한 생명력의 모습]은 어떤 일을 당해도 낙심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이겨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4장에서 말고 있는 것처럼 전혀 변거나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고후]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여도 싸이지 아니며 답답한 일을 당여도 낙심지 아니

[고후]4: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며 거꾸러뜨림을 당여도 망지 아니

이것을 어떤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오래참음이라고 할 것입니다. 끊임없이 우겨싸이지만 결코 싸이지 않는 마음입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도 포기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핍박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라지거나 버려지지 않는 모습입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서 도저히 재기불능이라고 생각되었지만 망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다시 일어서는 마음만 갖는 것이 아니라 상황도 그렇게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불사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오뚜기 같다든지 잡초 같다든지 는 표현도 가능할 것입니다. 이정도되면 그런 모습을 갖는 사람에 대해서는 경외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과 그 일행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더 큰 능력에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에 근거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우겨싸이지 않았고 낙심지 않았습니다. 또한 버린바 되지 않았고 망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님이 그들을 붙들어주시고 힘을 주셨으며 필요한 모든 능력을 공급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 말을 그냥 수사적으로 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다가 자신을 핍박는 유대인들의 모함을 받아 아레다 왕의 방백들에게 쫓겼던 적이 있었습니다. 성문을 잠그고 바울을 잡기 위해 집집마다 수색을 벌였습니다. 그 때 바울은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성벽에서 광주리를 타고 빠져나갔습니다. 정말 우겨싸였지만 우겨싸이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려고 애썼지만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자 바울은 낙심지 않고 앞으로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겠다고 면서 이고니온으로 갔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돌에 맞아 죽는 줄 알았지만 그는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로마로 가는 배안에서는 풍랑에 의해서 거꾸러뜨림을 당했지만 물에 삼키지 않고 멜리데 섬 해안에 배가 닿아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이정도만 봐도 바울이 그냥 자신의 마음의 상태나 노력만으로 살아난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나님께서 그를 도우셨고 함께 셨기 때문에 그는 그 모든 어려움으로부터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그는 항상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행운의 상징이었을까요? 운명의 열쇠였을까요?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의 모든 생명력이 나타났다고 그는 고백였습니다.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요? 오랫동안 그토록 고생며 공격받고 핍박받으면서도 나님의 은혜와의 관계를 놓지 않았던 그 연결고리는 무엇이었을까요?

[무한한 생명력의 근원]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만이 도우시고 역사실때 생명력이 일어났습니다.그는 그것을 예수 죽인 것이라고 였습니다. ‘예수 죽인 것이 그가 항상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고후]4: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려 함이라

그것이 바로 비결이었습니다.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는 것이 그렇게 강한 생명력을 갖게 는 비결이었습니다. 그것이 그들과 나님의 은혜를 연결시키는 고리였습니다. 지만 그것이 어떻게 고리가 될 수 있을까요? 예수 죽인 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여기서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졌다는 것은 그들이 항상 예수님의 죽으심을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이 항상 예수님의 죽으심을 생각면서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심을 기억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죽으심을 생각면서 항상 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내게 나타나게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려 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그들의 몸에 나타나기를 원했기 때문에 항상 예수의 죽음을 생각했고 그럴 때마다 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능력으로 부활신 것처럼 그들도 역시 예수의 생명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경외심을 느낄 정도의인내를 보일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또한 이것이 바로 나님께서 그들을 결코 망지 않으시고 다시 일으켜 세워주신 이유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 역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일제치에서 얼마나 많은 기독교 탄압이 이루어졌습니까? 신사참배를 강요기도 였고 교회를 통한 항일운동은 제암리 학살사건과 같은 교회를 중심으로 한 탄압에 어려움을 겪기도 였습니다. 이후 잠깐동안의 남북전쟁은 목회자들의 순교와 교회의 파괴로 이어져서 그대로 진행되었다면 우리나라에 기독교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을 뻔 했습니다. 지만 이 모든 상황을 역전시켜주신 분은 바로 나님이십니다. 나님이 남북전쟁이 휴전으로 끝이 나게 시고 이후에 나님을 믿고 잘살아 보겠다는 간절한 믿음과 바램을 들어주셔서 우리 나라가 현재의 번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또한 대한민국 전 인구의 4분의 1인 기독교 천만명의 신자와 우리 나라의 주요 요직에서 기독교인을 찾아보기 어렵지 않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단순히 마음의 결심이나 노력으로 이루어 것이 아니라 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놀라운 생명력은 단순히 국가나 민족이나 기독교 전체의 목표만은 아닙니다. 우리 개개인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굴지 않고 어떤 한계 속에서도 포기지 않고 나님을 붙들고 나아갈 때에 나님의 도우심으로 더 크고 놀랍고 새로운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능력을 힘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러한 능력을 갖지 않을까요? 또한 무엇이 우리에게 이런 능력을 갖지 못게 할까요? 바로 옆에 생명샘물을 놓고도 그 생명샘물을 먹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왜 우리 속에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인내와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는 소망과 좌절지 않는 용기를 가지지 않는 것일까요? 만약 그것만 있으면 사랑이 생겨나고 희락이 피어오를 것입니다. 화평한 마음으로 담대게 자신의 할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만 이 놀라운 나님의 능력과의 연결을 어떻게 이루지 못는 것, [무한한 생명력을 얻지 못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도바울은 7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고 있습니다.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려 함이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 보배는 우리 자신의 질그릇에 담겨지는 것입니다. 보배가 보배합에 담기는 것이 아니라 보배가 질그릇에 담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보배를 보배합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도 보배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무리게 되는 것이지요. 보배가 질그릇에 담기는 것인데 보배를 보배합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니까 그 보배를 받아들이지 못는 것입니다. 간단게 생각면 됩니다. 그냥 받기만 면 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그냥 받아 누리면 됩니다. 도와달라고 면 됩니다. 간구고 요청면 됩니다. 내가 질그릇이니 부족한 저에게 주의 보배를 채워달라고 겸손게 무릎꿇고 나님께 간구나님은 주십니다. 왜냐면 주님은 능력의 심히 큰 것이 나님께만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음을 알게 시기를 원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겸손히 주님을 따를 때 주님은 우리에게 보배를 부어주십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주님의 보배를 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준비가 되어야 보배를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담배를 끊고 내가 술을 끊고 내가 정상적으로 생활고 내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야 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배합에 보배를 담으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똑똑고 신앙도 좋고 봉사도 열심히 고 지금까지 크게 무리가 없이 신앙생활을 했으니까 당연히 보배를 담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보배합에 보배를 담으려는 것입니다. 지만 질그릇에 보배를 담는 것이 신기고 놀랍고 그것이 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지 보배합에 보배를 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두 사람이 기도를 할 때 한 사람은 가난고 죄도 많이 져서 얼굴도 못들고 회개며 용서를 구면서 기도합니다. 다른 사람은 돈도 많고 헌금도 많이 고 선한 일도 많이 해서 얼굴을 곧게 들고 당당게 기도합니다. 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더 들으실까요? 누가 나님의 보배를 더 많이 얻게 될 까요? 질그릇에 보배를 담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질그릇과 같이 겸손해질 때 나님의 보배를 담게 됩니다.

나님께 힘들다고 고백고 두렵다고 고백고 화가 난다고 고백고 부끄럽다고 나님께 고백할 때 나님은 도우십니다. 그래서 그런 감정을 새로운 결심으로 바꾸어주십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경험면서 우리는 깨닫습니다. 이 능력의 심히 큰 것이 나님께만 있고 우리에게는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새로운 결심을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새로운 결심으로 충만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님께 오늘도 구십시오. 나님은 우리에게 무한 동력의 은혜를 내려주실 것입니다. 질그릇 같은 마음에 은혜를 내려달라고 담대히 구십시오. 나님의 영광이 온전히 나타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담아 이번 한 주를 살아갈 때에도 더욱 사랑이 넘치고 화평며 더욱 인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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