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노애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쁨과 화냄과 슬픔과 즐거움을 의미하는 한자성어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감정상태를 보여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은 이와같은 '희노애락'을 겪으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어떤 장소에 있든 다 이러한 희노애락을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정신적인 상태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몸과 연결되어서 육체적인 자극이 되기도 합니다. 기쁨을 느낄 때 분노를 경험할 때 슬퍼할 때 즐거울 때 우리 몸도 역시 동일하게 반응합니다. 그래서 희노애락의 감정 속에서 몸의 상태도 상승되거나 혹은 하강합니다. 많이 웃다보면 젊어지기도 하지만 많이 울다보면 더 늙게도 됩니다. 많이 기뻐하면서 병든 몸이 건강해지고 많이 괴로워하면서 없던 병도 생기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의 상태는 몸의 상태와 연결되어있고 이것은 어떤 식으로든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있습니다.
이 연결관계를 발견한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몸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기뻐하고 더 많이 즐겁게 살다보면 몸이 좋아진다는 원리입니다. 물론 이러한 노력이 일리는 있습니다만 그것이 쉽지만 않은 이유는 항상 그렇게 긍정적으로 살다보면 때로 죄까지도 모두 간과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으니 특별히 기준을 가지고 살아갈 필요가 없고 애써 어떤 목표를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사상적 근원을 가만히 따져보면 육체의 행복과 정신의 평안을 추구했던 동양의 도교나 혹은 서양의 헬라철학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아가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이 목적이 되어버리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좋은 마음, 좋은 생각, 좋은 감정, 그로 인한 좋은 건강상태를 갖는 것이 목표이면 어떤 것도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새로운 시도는 엄두도 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기본적인 모든 상황의 변화가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상황을 변화시키지 않고자 노력하다보면 사실 하나님의 뜻이나 계획과는 마찰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과 세상이 주는 마음의 차이를 이해해야 합니다. 모든 기쁨이 다 좋은 것이 아니고 모든 분노가 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슬픔이 다 나쁜 것이 아니고 모든 즐거움이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과 세상이 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둘을 구별할 때에 우리는 인생 가운데 반드시 경험하게 되는 '희노애락'의 감정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목표를 이루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감정과 세상이 주는 감정은 어떻게 다를까요? 오늘 사도 바울은 이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근심,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룹니다. 이는 절대 후회하지 않는 놀라운 유익입니다. 그러한 근심, 그러한 고민이 없다면 회개를 하지 않을 것이고 구원에 이르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근심, 두려움, 괴로움이 있었기 때문에 회개를 했고 결국에는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존 번연이 쓴 유명한 기독교 소설인 '천로역정'에 보면 주인공 크리스천이 회심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성이 장망성이고 앞으로 다가올 심판을 피하려면 천국의 성을 향해 나아가야 된다는 성경말씀을 보게 됩니다. 그런 다음부터 그의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과연 천국의 성을 향해 자기가 머무르던 장망성을 떠날 것인가, 아니면 그냥 눌러 앉을 것인가의 고민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크리스천은 천국의 성을 향해 나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럴 때 부인과 자녀들이 그의 발을 붙들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크리스천을 성에 남게 하려고 했지만 마침내 그는 이 모든 유혹을 뿌리치고 성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아내와 자녀들도 아버지를 따라서 성을 떠났습니다.
이러한 고민과 근심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도교적인 가르침에서 본다면, 혹은 헬라철학적인 가르침에서 본다면, 아니 이렇게 어려운 말이 아니라 그냥 행복을 추구한다는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와 같은 근심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 행복을 누리려고 하다보면 나중에는 괴로울 것이라는 세상사의 이치를 생각해보면 결코 어리석은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괴로웠지만 나중에는 행복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얻은 것이 행복이기 때문에 그 행복은 오래 오래 지속되는 행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근심이라고 해도 사망을 이루는 근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에서 처음 발견됩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고 동생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으시자 근심합니다. 사실 그 감정은 근심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분노에 가까왔습니다. 그 근심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결국 가인은 아벨을 들에서 쳐죽이고 맙니다. 감정의 상태는 동일했을 지 모릅니다. 괴로움의 정도도 비슷했을 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겪는 이유가 달랐습니다. 천로역정에 나오는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위해 하는 근심이었고 창세기에서의 가인은 자기의 위신과 명예 때문에 생겨나는 근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을 이루었지만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바로 우리들의 삶 속에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위해서 고민합니까? 그러면 그것은 세상근심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를 위해서 고민합니까?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근심과 감정 속에서 목표는 나를 세우고 나를 채우고 나를 높이기 위함입니까? 그러면 세상 근심입니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모든 근심의 목표가 하나님을 세우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높이기 위함이라면 그것은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반드시 구원을 이루게 됩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하는 고민은 보기에는 세상 근심과 잘 구별이 가지 않는데 어떻게 그런 근심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룰 수 있을까요? 시작은 초라하지만 결과는 놀라운 것입니다. 애초에는 구별이 잘 가지 않지만 나중에는 확실한 구별이 생기게 됩니다. 처음에 이러한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아주 작은 감정상태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그것은 우리를 간절하게 합니다. 원하고 찾고 바라게 만듭니다. 모든 것은 그것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바로 모든 감정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라지만 모든 일을 뜻대로 쉽게 되지 않습니다. 바라는 것이 단순한 것이 아니면 아닐 수록 그렇습니다. 바라는 것이 높은 것이면 더욱 새로운 문제가 생깁니다.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그럴 때 우리는 변명합니다. 여기서 변명한다는 것은 잘못에 대해서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논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혹은 과정 중에 무슨 실수가 없었는지를 살펴봅니다. 그것이 변명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여러가지 감정이 생겨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이 있었다면,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이 생길 것이고 자기 때문에 그렇다면 자신에 대한 절망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감정상태는 계속 고조됩니다. '얼마나 분하게 하며'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나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분통을 터트립니다. 왜 이렇게 모든 것이 잘 되지 않을까를 괴로워합니다. 일을 방해하며 협조하지 않는 모든 상황이나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분노합니다. '얼마나 두렵게 하며' 이제는 혹시나 안좋은 일이 생길까봐 걱정이 됩니다. 실패할 까봐 전전긍긍합니다. 아무리 마음을 편하게 하려고 해도 제대로 되지 않을 때에 우리는 두려움에 빠집니다. 모든 것이 다 망치게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게 됩니다.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목표를 놓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힘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우리 스스로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것을 얻어야만 하는 절박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길을 열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또 다시 노력합니다.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일이 되도록 계획된 대로 이루어지도록 계획된 대로는 아니더라도 가능한 그와 비슷하게는 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그래서 열심을 내어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며 쉬지 못하면서 노력합니다.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때로는 스스로를 자책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해주셨는데 자신의 잘못으로 혹은 자신의 노력부족으로 또는 자신의 믿음부족으로 이루지 못했다고 후회합니다. 스스로를 벌하면서 자책하기도 하고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합니다.
보십시오. 이러한 감정을 겪는 것이 때로는 세상 근심과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 근심들은 이미 어느 수준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한계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붙들고 있습니다.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누리고 취하려는 것이 세상 근심이었다면 하나님의 근심은 하나님을 붙들게 하고 의지하게 하며 하나님 안에서 노력하게 해서 마침내 이루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깨끗함'입니다. 이런 일들을 하면서 하나님앞에서 성실하였음을,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버리지 않았음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음을 보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너희 자신의 깨끗함'입니다.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저는 서두에서 구원을 이루는 근심과 사망을 이루는 근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근심이 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계속 악순환을 이루는 근심이 있고 그러한 근심의 중심에는 자기 자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반복하고 반복하며 반복합니다. 어리석은 일을 또하고 또하며 또합니다. 더 큰 근심이 생겨나고 더 큰 감정이 쌓이면서 점차 사망으로 가까이 가다가 마침내 사망하고 맙니다. 하지만 구원을 이루는 근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간절하게 하고 변명하게 하며 분하게도 하고 두렵게도 하며 사모하게 하고 열심있게 하다가 벌하게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좌충우돌하면서 붙들은 것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상으로 구원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애쓰고 노력하며 감정을 갖게 하시고 마침내 구원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에서를 두려워하면서 모든 처자와 종들과 재산과 소유물을 다 먼저 보내고 혼자서 다가올 미래를 걱정하며 근심하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천사의 모습으로 오셔서 그와 씨름을 벌이십니다. 야곱은 자기 문제로 산적해 있었지만 나타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합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우리가 놀라는 부분은 고뇌하는 인간과 씨름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 속에서 야곱과 씨름해 주시며 야곱의 근심이 그의 감정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되게 바꾸어 놓으십니다. 결국 야곱이 하나님께 간구하고 간절히 요청했던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복'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그 복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냥 세상의 복이 아니고 그냥 세상이 줄 수 있는 평안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고 하나님만이 보장해주실 수 있는 그 축복과 평안을 그는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셨고 그의 이름은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변화됩니다. 사람의 뒤발꿈치나 붙드는 사람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근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세상을 살면서 감정을 가지고 희노애락을 느끼며 어떠한 종류의 근심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근심은 구원을 이루는 근심입니까, 사망을 이루는 근심입니까?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 나와보십시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가지고 주님께 나와보십시오. 주님께 가져와서 내려놓고 하소연을 해도 좋습니다. 주님께 내려놓고 애통해 해도 좋습니다. 여러분이 가해자일 수도 있고 피해자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주님께 가지고 와서 주님의 방법대로 근심해보십시오. 주님의 방법대로 씨름해 보십시오. 그것은 얼마나 여러분을 간절하게 할 것입니까? 얼마나 여러분을 변명하게 할 것입니까? 얼마나 여러분을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할까요? 그러나 무엇을 하든지 그것은 깨끗해질 것입니다. 마치 세탁기 안에 있는 세탁물이 이리저리 요동치며 그 때가 벗겨지는 것처럼, 옷을 빨래하는 아낙네가 그 옷을 몽둥이 내리치며 물로 적시며 그 때를 벗겨내는 것처럼, 모든 감정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왔을 때 얻는 것은 우리 자신의 깨끗함입니다. 회개를 하기도 하고 스스로 벌하기도 하고 새로운 결심을 갖기도 하면서 우리가 얻는 것은 우리의 깨끗함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었습니다. 바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문제를 주시고 목표를 주셔서 우리 자신이 점도 없이 흠도 없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올바르게 서게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 바로 그분의 목표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놀라운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했던 근심 속에서 말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기 원하시는 그분께 여러분의 감정을 드리십시오. 상관마시라고 하지 마시고 여러분의 마음을 드리십시오. 주님은 그 마음을 새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마음의 변화가 우리 모두에게 넘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