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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용서] 41막16; 9-18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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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막16:
9-18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의 변화_1



 2012.4.8.주, 부활주일-주제설교

*개요   [54용서] {5복음서} <3분석> [6결심]-[7실천]

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11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12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1.    부활은 영광스러운 예식이 아니라 개인적인 관계형성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이 부활절을 거룩하고 영광스럽고 화려하고 성대하게 보내는 것이 일반적인 풍경입니다. 특별한 순서와 특별한 행사와 특별한 모든 시간들이 이 부활절을 그렇게 특별하게 만듭니다. 아마 대부분의 교회가 부활절을 그렇게 보낼 것입니다. 부활절을 우울하고 평범하며 초라하게 보내고자 하는 교회는 없을 것입니다. 힘이 닿는 대로 이 부활절을 어떻게 해서든지 기쁘고 감사하게 보내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절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슬퍼함도 잠시였고 그분은 죽으신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망권세를 이기셨고 모든 절망과 두려움을 이기셨습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 되시며 죄없으시며 어떤 권세도 그를 누를 수 없음을 부활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부활은 놀랍고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속에서 부활은 사못 분위기가 다릅니다. 부활의 순간에는 아무런 찬양도 아무런 영광스러움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혹시 그 영광스러움이 새벽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성경에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나심에는 천사들의 찬양이 울려퍼졌고 그것이 목자들을 통해서 증거되었지만 부활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변화된 것이라고는 오직 무덤의 돌이 옮겨져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온 여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무덤의 돌이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는 부활체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나타나는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은밀함입니다. 그리고 개별적인 만남입니다. 예루살렘이 떠들썩하지도 않았고, 대제사장들이나 군병들에게 분명히 나타난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의 사건은 한 사람, 한 사람씩 살아나신 주님이 친히 만나주시면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활의 성격은 관계적이었고, 개별적이었으며, 또한 내면적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부활을 통해서 정말로 하려고 하셨던 것이 사실은, 그 부활의 소식을 친히 온 세상에 선포하시면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부활하심을 부인하고 의심하며 낙심했던 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만나서 그들을 용서해 주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은 각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않음을 고백하고 용서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까? 어쩌면 여전히 여러분들도 주님이 죽으시기 전에 무슨 말씀을 했었는지 기억을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3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구요. 마태복음20장입니다.
“마20:18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19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주님은 이 외에도 마태복음 16,17장, 누가복음 9,13,18,24장에서 반복적으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이 사실을 대제사장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마27: 62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63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뉘인 무덤에 무거운 돌을 옮겨놓는 것 뿐만 아니라 군병들을 시켜 그 무덤을 지키게 했던 것입니다. 그정도로 예수님이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여자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해서 향품을 사다놓았습니다. 그들은 다시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막16: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그들은 애는 썼지만 정말로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는 것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더군다나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았습니다. 요한복음에서 그녀는 자신앞에 있는 분이 동산지기인줄 알고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떼를 썼던 것입니다.
“요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안타까운 것은 여자들만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더욱 한심합니다. 여자들이 그러고 있는 동안 그 부활의 아침에, 3일째 된 바로 그날 아침에 그들은 뭐하고 있었는 줄 아십니까? 10절을 보십시오.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그들중 아무도 혹시 예수님이 부활하시지는 않을까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들은 그냥 슬퍼하며 울고 애통해하며 절망해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주님이 부활하리라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이 주님의 부활하심을 믿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믿지 않았음을 회개하고 용서해주기를 원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전에 알던 랍오니, 선생님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던 같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구세주였습니다. 그분은 성자 하나님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의 죄를 사해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제자들은 믿지 않음을 회개해야 했고 주님은 그 믿지 않음을 용서해 주십니다. 그것을 다 용서하시는 이유는 그 죄값을 자신이 다 치루셨기 때문입니다. 애초부터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3.    부활을 믿는 믿음은 용서의 고백을 행하는 것이고, 용서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부활하신 뒤에 하신 일은 온전히 그 부활하심을 믿지 않은 자들을 용서해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을 만나시고 그들을 용서해주셔서 그들이 믿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바로 다시 살아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일에는 모종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제자들편에서의 불신입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11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그들은 직접 본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직접 본 마리아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전해 듣는 자들은 도저히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살아나리라는 예수님의 말도 믿을 수가 없었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만났다는 마리아의 말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강하게 부인하며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만나셔서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며 믿게 하셨습니다. 그 두 제자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예수님이 자신에게 나타나신 것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들의 의심과 절망은 너무나 컸습니다.
“12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오늘날, 이러한 씨름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우리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도 믿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되어진 모든 것을 믿습니다. 또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도 믿습니다. 앞으로 죽으면 천국가는 것도 믿으니까요. 그래서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합니다.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은 단, 현재뿐입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행동합니다. 믿었다면 그렇게 살지 않았겠지만 믿지 않았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다닙니다. 예수님 바로 앞에서 예수님을 달라고 떼를 씁니다. 하나님은 이미 충만한 은혜로 함께 하시지만 그것은 부족하고 모자랍니다. 원하는 것은 내가 향품을 바를 수 있는 예수님의 시신일 뿐인 것입니다. 내가 순종하고 섬겨야 하는 살아계신 예수님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시신을 원하고 있습니다.

또는, 여전히 제자들처럼 슬퍼하며 울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데 예수님은 지금도 역사하시는데 예수님은 바로 이 순간에도 그분의 뜻을 놀랍게 이루고 계시는데 그들은 다 끝난 것처럼,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절망하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고, 하나님이 자신을 미워하신다고, 하나님이 자신을 저주하셨다고 울면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리셨지만, 그 부활의 기쁨을 가지고 우리 옆에 계시지만, 우리는 그렇게 슬퍼하느라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이제, 주님의 씨름을 보십시오. 주님은 결국 제자들이 다 있는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행하십니다.
“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주님은 지금까지 그들에게 그렇게 믿음이 없었던 것에 대해서 꾸짖으십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해서 이미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꾸짖으십니다.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그들의 거부와 불신을 꾸짖으십니다. 주님 앞에서 그들이 했던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용서를 구했습니다. 믿지 않았음을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들을 용서하시면서 하신 말씀은 이제는 부활을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4.    우리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부활의 이름을 나타내는 자들이 됩시다.

우리는 주님을 믿지 않았던 지난 날의 삶에 대해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믿지 않았던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용서의 고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아무런 처벌도 내리지 않으시고 우리의 믿음없음을 용서해 주십니다. 오히려 더욱 사랑해주십니다. 우리는 그 용서 속에서 더욱 분명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심이 분명하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용서의 고백으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어져서 용서의 삶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러한 용서의 삶이 진정한 믿음의 모습이라고 하셨습니다.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오늘 우리가 세례를 베푸는 것도 이전에 주님을 믿지 않았음을 회개하고 이제부터는 믿음을 가지겠다는 고백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주님이 살아계심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주님을 부인한 것으로 인해 정죄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세례를 받으면 끝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고백이지 삶이 아닙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삶의 표적이 나타나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부활하심을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은 바로 이것입니다.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여기서 말씀하신 그 표적들의 초자연적인 현상에만 집중하지 마십시오. 진실한 표적은 믿는 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여러분이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예수님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일할 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일함을 통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합니다. 그분을 믿으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벧전3: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오늘 부활절을 주님께 드리시는 여러분,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잊지 맙시다. 행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셔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주시는 바로 그분을 여러분 자신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로 인해서 온전한 신앙과 삶의 변화를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변화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주님이 부활하셨음을 정말로 믿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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