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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욕구] 44행 9;1-9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44행 9;1-9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2009.7.26.주일. 주일오전예배 / 4욕구

남자와 여자는 결혼을 하고 나면 변화라는 측면에 있어서 똑같이 놀란다고 합니다. 여자는 남자가 결혼을 하고 나면 조금 변하겠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조금도 변화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놀랍니다. 남자도 그 반대입니다. 남자는 여자가 결혼을 하고나면 너무나 변해버려서 놀란다는 것입니다. 일단 몸매가 변하고 성격이 변합니다. 정말 변화하는 것인지 아니면 본래의 성격이 나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그 변화에 대해서 놀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변화란 좋은 변화와 나쁜 변화가 있습니다. 좋은 변화는 나쁜 점이 사라지고 좋은 점이 나타나는 것이 좋은 변화이고 나쁜 변화는 좋은 점이 사라지고 나쁜 점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쁜 변화가 생기기를 바라지 않고 좋은 변화가 생기기를 바랍니다. 나이가 들면서 혹은 결혼을 하면서 혹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쁜 변화보다는 좋은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의 시작은 외적인 면보다 내적인 면이 우선됩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변해야 몸이 변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변하기만 하면 상황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변화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이 마음의 변화를 이루려고 할 때에 제일 어려운 것은 자신의 욕구를 버리는 것입니다. 욕구를 버리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을 수 있는데 그 욕구를 버리지 못하면 은혜 조차도 욕구에 파묻혀 버립니다. 그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은혜가 전혀 효력을 나타내지 않는 것입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마구 난동을 부리는 사람에게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만 그 자신이 분노의 원인이 되는 자신의 욕구를 자제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은혜란 무색해집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인정을 받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조금만 견디면 하나님의 변화의 시기가 찾아오겠지만 그가 자신이 욕구를 버리지 않는다면 변화가 오기 전에 상황 속에서 뛰쳐나가버리고 말 것입니다. 도망가 버리고 나면 인정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되버립니다.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 마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현재 하고 있는 일에서 흥미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일이 하나님이 복주시는 좋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뜻대로 더 하고 싶은 마음에 부르심을 떠나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속에 있는 욕구가 거세게 일어날 때 그것을 조절하지 못하면 우리는 변화될 수 없습니다. 그로 인해서 여전히 반복적인 삶의 문제가 나타나며 변화되지 못하는 여전히 성숙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악순환의 문제가 계속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계속적인 악순환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 욕구를 추구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인데 그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여전히 욕구에 얽매여서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게 됩니다. 또한 안타깝게도 그것이 우리들의 삶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러한 변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한 인간을 바로잡기 위해서 그를 변화시키기위해서 은혜가 헛되이 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그 놀라우신 일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욕구가 은혜와 연결이 되는가를 보게 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욕구가 은혜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은혜가 욕구를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욕구는 ‘마음의 뿌리’입니다. 이 마음 속의 악한 뿌리 때문에 모든 악한 반응과 악한 감정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 뿌리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 뿌리가 스스로 변화를 향해 움직이지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땅에 박혀있는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 뿌리에 은혜가 다가갑니다. 은혜가 뿌리에게 접촉하여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은혜의 흐름이 마침내 뿌리에 닿을 때에 연결될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악한 뿌리를 변화시키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썩고 문드러졌던 뿌리에 새로운 생명이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의 회심은 기독교 역사상 모든 회심 중에서 가장 압도적입니다. 이처럼 완벽하게 가장 악한 모습에서 가장 선한 모습으로 변화된 사람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그런데 이 놀라운 변화 속에 우리가 찾고자 하는 그 변화의 과정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 온전한 변화 속에 우리가 찾고자 하는 욕구를 버리고 은혜로 나아가는 놀라운 길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도 바울을 찾아오신 주님이 하신 말씀 속에 있습니다.
주님은 빛가운데서 나타나셔서 사도 바울의 원래 이름이었던 사울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러자 영문을 모르고 사울은 대답했습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빛 가운데서 주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 대화를 마치고 사울은 쓰러졌습니다. 또한 그의 모든 욕구가 쓰러져버렸습니다. 그의 마음을 감싸고 있던 모든 악한 것들이 다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 마음에 꽂혔습니다. 그 때부터 사울은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요리조리 피해다니던 마음 속의 욕구가 하나님의 은혜에 정통으로 들어맞았습니다. 그 은혜의 물결이 그의 마음 속에 닿았고 그것은 그 마음을 온전히 사로잡았습니다. 그 은혜의 물결 속에서 그 악한 마음은 선한 마음으로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후 사흘 동안 보지 못하는 가운데 식음을 전폐하면서 회개했습니다. 자신이 들은 그 한 마디의 음성 속에서 그는 마치 번데기에서 나비가 되기를 준비하는 유충처럼 놀라운 변화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놀라운 변화를 바라보며 우리들은 궁금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의 마음을 만져주시는 그 놀라운 변화가 우리 속에 일어나서 우리도 사울이 바울이 되는 것처럼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남편에게 우리 아내에게 우리 아들에게 우리 딸에게 우리 성도들에게 우리 직분자들에게 우리 목회자들에게 그런 변화의 계기가 생긴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합니다. 정말 좋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정말 이런 변화를 꿈꾼다면 그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사울의 마음을 찔렀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그 마음에 넘쳤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정말 중요한 요소를 보면 그 요소를 오늘날에도 다시 간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호하지 않습니다. 또한 불명확한 것도 아닙니다. 마치 병원에 갔다 나오니 환자의 병이 나았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의사 선생님의 진찰실에 들어갔다 나오니 환자의 병이 나았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자, 눈을 열고 마음을 열고 어떻게 사울이 변했는지를 보십시오. 그 놀라운 과정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그 완전한 변화의 순간을 보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사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십시오.

다시 아까의 사건으로 되돌아가면 사울은 다메섹 도상으로 가는 길에 커다란 빛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가던 일행 모두에게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래서 그 빛 자체로 인해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상황적인 구성이 이루어졌을 뿐입니다. 그런 다음에 오직 사울만 들을 수 있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바로 사울의 욕구를 자극했습니다. 주님의 이 말 한마디가 사울의 욕구가 무엇이었는지를 건드리고 있습니다.
사울의 욕구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왜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으며 왜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있었을까요? 그는 무엇을 얻고자 했을까요? 그는 유익을 누리려고 했던 것이 아니고 편안하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쾌락을 누리고 싶지도 않았고 존경을 얻고 싶은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가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한 것은 그리고 그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고 한 이유는 바로 ‘인정 ’받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짓 선지자를 숭상하고 경배하고 전파하고 믿는 자들을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 대해서 미움이 생겨났고 분노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그가 부활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그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말인가! 그 모든 복음의 내용에 그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가 죽이는 자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면 자신이 믿는 하나님께서 나를 알아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 유대인이었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석학이자 종교적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거짓선지자로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열심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이미 그 중의 한 사람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더 잡아 죽이면 결국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은 다 정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생각하는 바 옳다고 믿는 바를 실천하고 실행하여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열심을 내면 낼 수록 , 위협을 하면 할 수록, 살기가 등등하면 할 수록 그는 더욱 ‘인정’받고자 하였습니다. 그 욕구가 커졌습니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습니다. 모든 생업을 팽개치고 그는 최선을 다해서 인정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예루살렘 수도에서 저 지방에까지 사람들을 이끌고 애써서 내려갔던 것입니다. 그 마음 때문에 사울은 ‘핍박’했습니다. 사람들을 핍박하고 교회를 핍박하며 그리스도를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작 사울 자신은 그것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그 일이 옳은지 그른지 몰랐습니다. 그냥 맹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정받으리라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욕구로 눈이 멀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왜 그렇게 나를 핍박하고 괴롭히는지를 생각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인정’받으려고 하니까 하나님을 핍박하고 괴롭히는 것임을 일깨워주십니다. 그가 유대교를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은 최소한 믿는 사람으로 그래서는 안되었는데 그가 너무 막나가는 것을 주님은 일깨워주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핍박하고 있음을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이말을 듣고 사울은 어리둥절했습니다.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하는 것인데 그래서 복음을 막으려는 것인데 왜 이런 소리를 듣나 의아해했습니다. 자신은 지금 하나님을 위해서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하나님을 위해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빛가운데서 나타나는 소리는 분명 하나님 같기는 한데 하나님처럼 들리지는 않았습니다. 칭찬을 해줘도 시원치 않을 판에 꾸짖음을 주시다니요! 이제 확실히 자기가 믿는 하나님은 아닌 것 같은 데 도대체 누구시길래 자신을 핍박한다는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아니, 제가 핍박을 한다고 하시는데 댁은 누구시기에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언제 당신을 핍박했습니까?’ ‘도대체 이 빛 가운데서 나타나서 나를 왜 핍박하느냐고 물으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사울의 질문은 그가 누구인지 전혀 깨닫지 못한채 이루어졌습니다. 설마 그분이 예수님인 줄은 꿈에도 생각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은 전혀 인정하지 않았고 오직 자신만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에 결단코 지금 빛가운데서 말하는 자가 누구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이 바뀌어버렸습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지금 누구를 핍박하고 있었고 누구를 죽이려고 하였으며 누구를 대적하고 있었는지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맞았던 것입니다. 그는 지금 그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부인하고 정죄하며 핍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롭게도 예수님은 그 말씀을 하실 때에 정죄를 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심판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저주를 내리시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회개를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했던 모든 죄에 대해서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크신 사랑으로 하나님은 사울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사울은 이제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그 눈에서 어두운 구름이 사라졌습니다. 빛가운데서 나타나신 주님을 밝히 보았습니다. 그분은 바로 자기가 그렇게 죽이려고 했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수치스러움이 그 부끄러움이 그 미련함이 커다란 괴로움을 몰려들면서 그는 그자리에서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 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을 핍박하고 있었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산산조각이 난 것입니다.

그렇게 무너진 사울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주님은 결코 저주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지 않으시고 정죄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 자신이 깨닫고 회개할 때에 고꾸라질 때에 주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살아나서 회복을 위해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한 생명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그러한 변화를 일으키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욕구를 버리고 주님의 은혜로 나아오라 말씀하십니다. 이제 막 더 새로운 죄악과 파멸로 나아가는 우리에게 안타까움으로 말씀하십니다.
유익을 추구하며 세상으로 나가려고 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버리느냐’
편안을 추구하며 교회를 떠나려고 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잊었느냐’
쾌락을 추구하며 죄악된 일을 저지르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부끄럽게 하느냐’
인정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 미워하시는 일을 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존경을 추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스스로 영광을 취하려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의 영광을 빼앗느냐’
지배를 추구하며 하나님의 뜻이 아닌 스스로의 계획을 성취하려고 하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막아서느냐’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때에 그 자리에 고꾸라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 자리에 멈춰야 합니다. 그순간 우리의 모든 욕구가 이미 드러났고 주님은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만지십니다. 사울을 어루만지시는 것처럼 우리를 어루만지십니다. 이제 우리는 더이상 그런 욕구를 추구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에 귀막으면 안됩니다!

만약 우리가 그자리에서 고꾸라졌다면 죄를 깨달았다면,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요? 이제 어떻게 살아갈까요? 어떻게 하면 다시 모든 것을 원상태로 돌릴 수가 있을까요?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해주십니다.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하실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을 일러줄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생활 속에서 말씀연구 속에서 그것을 일러줄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을 듣고 행하십시오. 더이상 주님을 핍박하는 자가 되지 말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십시오. 주님의 은혜에 더욱 빠지십시오. 주님의 은혜를 더욱 붙드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를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 주님의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여러분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욕구를 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방법으로 주를 진정 따르는 자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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