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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은혜] 44행 19; 11-20 능력과 복을 주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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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19; 11-20 능력과 복을 주시는 하나님_1

 

 2015.6.28..주일오전.

 

*개요:    신앙에 대한 소개, 5은혜, 4극본

[]19: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19: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19: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19: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9:15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9: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19:17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9: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19: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19:20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

 

 

사람의 손은 여러가지 기능을 합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중요한 기능은 붙잡는 기능입니다. 그것은 아주 본질적인 기능입니다. 갓태어난 아기들도 손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 손으로 무엇인가를 붙잡습니다. 뭔가 손에 만져지는 것이 있으면 꽉 쥡니다. 그렇게 시작된 인생은 평생 무엇인가를 쥐고 붙잡으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그 손에 힘이 풀리면서 손을 놓게 됩니다. 죽은 다음에는 아무 것도 붙잡지 않고 붙잡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을 때에만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죽은 다음에는 하나님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붙잡으려고 할 때 진짜 손으로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아닙니다. 손에 다섯 손가락이 있어서 그 손가락을 오므려서 무엇인가를 붙잡는 것처럼 하나님을 붙들기 위해서도 뭔가 걸리는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하나님을 붙들수 있는 근거에 대해서 생각해 왔습니다. ‘가족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붙들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내세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붙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존재의 근거로 하나님을 붙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는 선악의 기준으로 진정한 선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붙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모두 몇가지의 근거를 가진 셈입니까? 네 가지입니다. 마치 네 손가락으로 하나님을 붙드는 것처럼 하나님을 붙들 수 있습니다. 네 손가락이 다 있으면 더욱 굳세게 붙들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께 대해서 손가락이 단 하나만 있어도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손가락이 하나뿐이지만 그 손가락 하나를 하나님이 붙들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원래 손가락이 다섯 개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손가락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손가락이 있으신 분이라면 더욱 굳게 하나님을 붙들 수 있겠고 그렇지 않고 하나도 없었다면 이제 말하려고 하는 다섯 번째 손가락이 마지막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갖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고자 하는 다섯 번째 손가락은 하나님께 대해서 능력과 복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과 복을 주시는 분이심을 기대하고 바라면서 하나님을 붙들 때에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은 바로 그러한 능력과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면서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19:11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19: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바울이 직접 병고치며 귀신을 쫓는 능력을 나타내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이 가지고 있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낫고 귀신도 떠나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여기서 능력이라는 말은 헬라어δύναμις (dynamis)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miracle, strength power, ability’ 로서 기적, 강한 힘, 능력 등을 의미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지고 있거나 사용하던 물건으로도 병이 낫고 악귀가 나갈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으로 그리고 바울과 관련된 물품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바울을 통해서 나타내신 놀라운 일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의 말을 믿고 그 대상인 하나님을 믿게 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귀신이 나가고 병이 떠나가는 일들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능력을 나타내시는 일들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단지 기원후1세기 경에서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바로 2015년 현재를 살면서도 우리에게 능력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저 자신도 너무나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은 순순히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 그 능력은 때로 비판되어지고 폄하되어지며 의심되어집니다. 그들의 의심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병을 왜 하나님께 대해서 낫게 해달라고 하는 것인가, 병원에 가서 치료받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또 귀신을 정말 쫓아주시는 것인가, 귀신들린다는 것은 정신병의 한 일종으로 정신과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등등의 의심과 비판이 있습니다. 또한 의심은 이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모든 병을 다 고쳐주시고 모든 귀신을 다 쫓아주시는가, 만약 어떤 병만 고쳐주시고 어떤 귀신만 쫓아주신다면 왜 하나님은 모든 병을 낫게 해주시거나 모든 귀신을 다 쫓아주시는 것이 아닌가라고 의심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능력은 제한되고 무능력한 것으로 평가절하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능력은 보잘것 없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은 없어도 되는 것이며 하나님은 믿고 의지할 만한 분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어서 결국에는 하나님을 거부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신다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며 저항하고자 하는 마음은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게 합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작은 능력으로도 하나님을 믿게 되고 따르게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셔도 하나님을 거부하고 부인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본질적으로 인간에게 자기 자신의 능력이라는 자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로  그 자기 자신에 대한 자의식이 깨어질 때에만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고 사모하여 받아누릴 수 있습니다. 그 의식을 흔한 말로 자존심이라고도 하고 고집이라고도 하고 교만이라고도 합니다. 그것이 깨어질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복을 누릴 수 있고 그 능력과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지지 않은 상태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능력과 복을 빼어내기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고 싶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과 복은 좋아보이니까 결국 생각해 낸 것은 하나님은 믿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능력과 복을 가져오게 만들었던 형식만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다음 장면이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절히 하나님의 능력과 복주심을 이용하고자 했던 자들의 모습입니다.

“[]19: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19: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왜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적기도를 하였을까요? 이들이 바로 방금말한 예수님을 믿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능력만 이용하려고 했던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단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였을 뿐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통해서 귀신을 쫓아내보고 싶었던 것뿐이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 의해서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혹은 자신의 민족이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되심을 못알아보고 십자가에 죽였다는 것을 고백할 때만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싫고 그분의 능력은 좋아 보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라고 밖에 말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 스게와의 일곱 아들은 아주 크게 낭패를 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도 그렇게 다른 유대인들을 따라해서 실제로 자기 자신이 믿지는 않는 예수님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내려고 했는데 귀신들이 도리어 공격을 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19:15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9: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

악귀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바울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실존하는 영이었습니다. 그 악귀는 지금도 사람 속에 들어가서 이런 저런 악한 일을 행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능력과 복을 누리게 되는 것처럼 악귀는 모든 악한 일과 불행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의롭고 정직하고 안전한 이유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그 공의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흉악한 자들이 우굴거리고 모든 추악과 더러움과 악행을 일삼는 사탄적인 삶을 살아가는 환경 속에서는 손쉽게 이러한 귀신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귀신이 하는 말이 바로 자신들이 예수를 알고 바울도 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는 누구냐라고 했습니다. 귀신에게 있어서 하나님과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었고 바울은 그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권세와 위엄앞에 도망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유대인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진실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귀신을 속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귀신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귀신들린 한 사람은 일곱 명에게 뛰어 올라서 달라붙었는데 일곱 명이 그 한 명을 당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귀신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힘으로도 완력으로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옷이 다 벗겨진채로 여기저기 다치고 상한 상태로 도망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이러한 귀신의 영향을 받지 않고 무병장수하며 만사형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귀신은 아무런 방어력없이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인간들을 공격합니다. 그 마음에도 들어가고 그 몸에도 들어갑니다. 그래서 악을 상상하게 하고 죄를 저지르도록 욕심을 더 강하게 갖게 합니다. 이런 저런 나쁜 일들도 만들어 냅니다. 몸을 약하게 하고 불운이 따르게 하고 병이 들게 하고 정신이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귀신은 둘째치고 우리는 때로 사소한 감기조차 이기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시라는 강하고 든든한 구원자를 만나기 전까지 인간은 초라하고 나약하고 불쌍한 존재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날 때 인간의 삶은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창조자이십니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주신 본능에 따라서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자신을 만드신 창조자를 섬기며 그분의 도우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고 도와달라고 할 때에 하나님은 그를 도와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집을 떠난 자식이 집에 돌아오는 것이며 아버지를 거역한 자녀가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을 도우시며 능력을 나타내시며 보호하시고 지켜주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각 사람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일들을 잘 끝내고 무사히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될 때까지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도우시고 보호하시며 지키십니다.

 

조선시대 암행어사 제도가 있었습니다. 과거에 급제한 선비가 왕으로부터 암행어사로 부르심을 받아 지방 곳곳의 폐단과 학정을 찾아 엄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서 그에게는 마패가 주어지고 호위무사와 수천명의 포졸을 동원할 수 있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권세는 왕의 명령을 수행하려고 할 때 의미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능력과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설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시는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주시는 은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진실히 믿고 따를 때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과 복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원리를 깨달았을 때 하나님을 진실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은 기뻤습니다. 그래서 더욱 굳세게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복을 붙든 것이 아니라 능력과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19:17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19:18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19:19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능력과 복을 나타내었던 바로 그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이 일을 듣게되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거짓되고 이용하다가 낭패를 보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렇게 교활하고 이기적인 자들에게 임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그들은 더욱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붙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자복하고 자신의 악한 행동을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교만했던 자아가 깨어지고 고집과 자존심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의심하고 부정하며 부인했던 일들을 자기 스스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술을 행하던 자들은 자신이 행하는 일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한 일이었는가를 절감했습니다.

여기서 마술은 헬라어로περίεργος (periergos)라고 해서 모든 주술, 마법과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고대부터 에베소는 이러한 주술이나 마법으로 유명한 도시였고 그에 대한 많은 책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흉내만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장난으로 여겨졌습니다. 또한 진정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술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마법책을 불살랐고 그 값이 은 오만 드라크마였고 이는 약 25억 원의 가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앞에서 진정으로 머리를 숙이고 엎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능력을 의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능력과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것을 진정으로 믿는 자만이 그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다른 신과 겸하여 섬길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유일하시며 가장 존귀하신 이 세계의 창조자이십니다. 그분을 의지할 때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고 그럴 때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과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24:16           백성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24:17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24:18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들과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니라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누리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 일어나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복을 경험하고 그 하나님을 높이는 하나님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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