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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평] 43요14;25-29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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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요14;25-29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_1

 

 2014.3.2.주.주일오전.

 

*개요:    63화평, 1적용, 4서신서, 5은혜-6결심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2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이번 한달 우리가 말씀 속에서 보고자 하는 주제는 ‘화평’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주제는 여러가지 은혜를 받고 나서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마음상태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의 화평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마음 가운데 의지적으로 갖는 결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깨닫는 화평은 영어로 하면 ‘peace’ 입니다. 또 다른 말로 평안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화평이나 평안이나 다 같은 말로서 peace를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화평은 누리기는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그 화평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의 화평과는 다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안함을 느끼는 것은 중요합니다. 평안함이 있는가 없는가가 삶의 수준을 결정합니다. 평안함이 있는 사람은 아주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평안함이 없는 사람은 아주 빈곤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평안함을 누리는 사람은 얼굴 표정부터 다릅니다. 아주 평안해 보입니다. 얼굴에 미소가 있고 만족스러움이 있습니다. 사실 평안은 희락의 연속적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평안이 넘치는 사람은 그윽한 기쁨이 있습니다. 날마다 기쁨의 연속이 결국에는 평안한 상태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렇게 화평하게 된다면 그것은 마음속에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 속에서 비로소 평안함, 화평함에 이르게 됩니다. 항상 기뻐하다 보면 마음에 평안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들로서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까? 하나님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그 은혜로 인한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까? 상황이나 조건이 좋아서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조건적으로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속에서도 오직 하나님때문에 그렇게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오늘 말씀에 나옵니다. 오직 하나님 때문에 평안을 누리고 있어야만 그 평안이 정말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27절입니다.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었습니다. 그 평안은 세상의 그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나 조건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사람들도 평안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평안이라기 보다는 ‘태평스러움’에 더 가깝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평안은 오직 십자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의지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들리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고 연약해지도 않는 온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근심도 하지 않으셨고 두려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마음은 온전한 평안으로 가득차 있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보이는 현재의 상황을 보신 것이 아니라 앞으로 만나시게 될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물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하나님과 교제를 하셨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이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서 많은 제약들이 있으셨습니다. 성자 하나님 으로서 성부 하나님과 나누시게 되는 모든 교통은 인간으로서 오셨을 때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이 세상에서 예수님은 많은 한계와 제한들을 가지고 있으셨습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평안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아버지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28절입니다.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너희가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러한 이유로 기뻐하셨습니다. 자신이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헤어짐과 고통과 죽으심이 앞에 기다리고 있었지만 주님은 그것만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서 생겨나는 결과인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극한 평안 속에 거하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평안을 바로 우리들에게 주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우리는 그런 평안은 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나면 그런 평안은 오히려 거부감을 갖게 할지도 모릅니다. 정말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이 선물을 한아름 가지고 오시는 산타가 되기를 원하지 빈손으로 오셔서 나로 인해 만족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해주시는 것은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주님이 가져다 주시는 그 무엇으로 인해서 평안을 누리는 것이지, 주님 자신이 아닙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그 어떤 것을 통해 평안을 얻는 것은 좋지만, 주님 자신때문에 평안을 얻는다는 것은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안타깝게도 우리는 주님을 통해 이루기를 원하는 그 무엇 때문에 평안을 얻으려고만 하지, 주님 그 한분 만으로 평안하려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의 평안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 한분 만으로 정말 평안하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새벽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교회는 새벽 기도를 그렇게 강조하고 새벽 기도에 많은 교인들이 나오도록 애를 씁니다. 그러면서 왜 새벽 기도를 해야 하는가 할 때 그것이 건강에 미치는 좋은 영향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긍정적인 삶에 주는 좋은 분위기를 말하기도 합니다. 시간활용이라는 점에서, 자기 발전이라는 점에서 이것이 중요하다고 말할 때도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 이야기도 합니다. 그럴 때 얼마나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겠느냐고도 합니다. 새벽에 기도하면 모든 기도가 응답된다고도 합니다. 달콤한 말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평안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그 한분만으로 인해서 얻게 되는 화평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새벽기도를 해도 별다른 일이 없을 때 속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은 동일한 새벽기도에 대해서 ‘하나님께 더욱 나아가기 위해서 새벽기도를 합시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면 정말 새벽기도에 참석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만으로 누리는 화평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만을 구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날마다 더욱 커져가는 화평이 됩니다. 이러한 화평은 신앙생활 속에서만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삶속에서도 그런 일을 찾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하나를 얻을 때, 나머지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저희 부부는 전도사 시절에 같은 전도사로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둘다 형편이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렵게 어렵게 집을 장만하고 혼수를 하고 그렇게 결혼을 했습니다. 또한 그당시 유학에의 꿈을 꾸고 있던 터라 괜히 이것저것 살필요 없다고 생각해서 아주 간소하게 해서 살림을 장만했습니다. 하지만 유학은 가지 못했고 괜히 필요한 물품이 없어서 불편하게 되기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삶의 조건이나 형편이나 상황들이 열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안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배우자를 얻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에 가치를 두고 더 중요한 것에 의미를 두며 살았기 때문에 외적인 것들에 흔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또 있습니다. 어떤 두 사람이 결혼할 때에, 신랑집이 부자라서 별다른 요구조건을 제시하지 않고 신부가 그냥 몸만 오라고 말해 준다면 그들은 얼마나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일까요? 반대로 신부집이 부자라서 신랑은 그냥 와서 결혼만 해도 된다고 할 때에 그들은 얼마나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일까요? 어렵게 살던 부유하게 살던 신부의 혹은 신랑의 진정한 가치와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고 그 마음을 나눌 수 있을 때에 그들은 이 세상에 없는 진정한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평안과 상관없이 그러한 평안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고 거부하면서 반드시 조건이 있어야 하고 상황이 있어야 하고 수준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대신에 잃어버리는 것이 있게 됩니다. 형편은 넉넉할 지 몰라도 상황은 평안할 지 몰라도 마음은 그렇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려고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그 무엇을 얻었는가 얻지 못했는가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 자신으로 우리가 만족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평안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 하나님이 주시는 건강, 하나님이 주시는 안전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하나님의 뜻에, 하나님 자신에 초점을 맞출 때 우리는 진정한 평안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초점을 맞추었던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그를 평안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시116:7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8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주님만을 붙들 때에 그 주님께서 주신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셨습니다. 그 눈에서 눈물을 씻기셨습니다. 그 발을 넘어짐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행하신 일들인 것입니다. 왜 부자였던 신랑집은 신부를 맨몸으로라도 오라고 하였을까요? 왜 부자였던 신부집은 신랑을 빈손으로라도 오라고 하였을까요?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였고, 그가 보여준 그 진실함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그 신부는 비록 조건은 없었고 상황은 여의치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지혜로움이 있었습니다. 그 지혜로움과 성실함으로 남편을 이끌고, 어려운 일을 헤쳐가며,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 문제를 잘 해결해 냈습니다. 그래서 그가 현재 있는 것이 없어도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미래적인 소망과 신뢰가 바로 그 사람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귀하게 보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러한 결정은 마침내 옳았습니다. 또한 그 신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지금은 미약해 보였어도 그는 날마다 더 발전되었고 그가 맡은 일들은 날마다 더 번성하였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을 하나로 만들고 거짓과 부패를 배격하며 진실과 거룩을 숭상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귀한 아버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저희 부부도 정말 그런 일을 경험하였습니다. 결혼후 2년이 지났을 때 제가 산에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개척에의 소명을 받고 순종하기로 하나님께 약속을 하였을 때에 가장 큰 걱정은 과연 사모가 허락해주느냐 였습니다. 어쩌면 함께 유학을 가는 것은 저에게나 그리고 사모에게나 큰 소망이자 비전이었습니다. 그걸 포기하고 아무 돕는 사람없이 개척을 시작한다는 것은 사실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집에 돌아와 있었던 일을 말했을 때 사모는 흔쾌히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 딸과 함께 세 명이서 개척을 시작했었습니다. 이후 어려운 형편 속에서 교회장소를 얻고 또 이사를 하면서 5번의 이전을 거듭하였을 때에도 사모는 묵묵히 그 모든 괴로움을 잘 감당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대소사의 모든 일들을 지혜롭게 잘 도와주었습니다. 정말로 우리 사모는 현숙한 여인이었습니다.(이렇게 이야기를 하다보니 아마 오늘 저녁은 아주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로 그러한 분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현재적인 의미는 어쩌면 누구에게나 기대에 못미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어떠한 분인지를 알고 나면 미래적인 의미는 우리 모두에게 놀라운 분으로 나타납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의 어떠한 도우심을 받아야만 한다는 욕심만 버린다면 우리는 그분이 앞으로 이루시는 놀라운 일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과거에 하나님이 어떠한 하나님이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미래의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의 근거가 됩니다.

 

열왕기하 6장에서 엘리사 선지자의 사환은 아침에 일어나보고 깜짝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엘리사가 살고 있는 성 주위로 아람 군사들이 빽빽히 둘러서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아람왕이 이스라엘의 선지자였던 엘리사를 죽이기 위해서 군대를 보낸 것이었습니다. 왜 그를 잡기 위해서 군대까지 보냈는가 하면 엘리사가 아람왕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사람들을 보내면 바로 그곳을 방어하도록 이스라엘왕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번번히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던 아람왕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바로 엘리사가 공격하려는 위치를 정확히 알려주고 대비하게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람왕은 엘리사가 사는 성을 공격하여 그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 장면을 보았던 사환은 겁에 질렸습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였습니다. 하지만 엘리사 선지자는 평안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엘리사 선지자는 자신의 사환도 함께 평안하기를 원했습니다. 마음의 평안을 찾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왕하6: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그러면 엘리사는 어떻게 자기를 둘러싼 불말과 불병거를 볼 수 있었을까요? 예전에 본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스승이었던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실 때에 그 불말과 불병거를 보았던 것입 니다.

“왕하2:11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12 엘리사가 보고 소리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란 결코 현재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적어도 우리 같은 평범한 인간들에게는 그렇습니다. 오직 과거를 생각하면서 떠올리거나 아니면 미래를 바라보면서 움직일 때에 비로소 그 함께 하심이 나타납니다. 엘리사가 보게 하였던 불말과 불병거의 가득함은 그 이후에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둘러산 아람군대들을 보면서도 여전히 평안하였던 엘리사의 모습은 나중에는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엘리사는 저들의 눈을 보이지 않게 하옵소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는 그 모든 군대를 이끌어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성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이스라엘 군대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애초에 그 아람군대를 둘러싸고 있던 보이지 않는 하늘의 불말과 불병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세상에서는 그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이후에 실현되는 것뿐입니다. 그것을 알 때에 우리는 평안할 수 있습니다. 조바심을 가지고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생각하며 그 함께 하심을 기억하며 우리는 평안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이 제자들을 예비하시던 주님의 말씀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바로 우리들을 예비시키고 계십니다.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보혜사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신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안전수칙을 가르쳐주어도 생각나지 않으면 무용지물입니다. 아무리 탈출방법을 알려주어도 잊어버리면 그만입니다. 아무리 사용방법을 설명해주어도 따르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먼저 평안을 누리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화평하게 되는 법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분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하나님을 깨닫게 됩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강력한 손 안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비록 적군들로 인해서 둘러쌓여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 보이는 모든 상황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이번 한주를 승리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으면서 그 평안을 놓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사탄에게 내어주지 마십시오. 그 마음을 지켜 하나님으로 먼저 평안을 누리십시오. 그 다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평안이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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