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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결심] 19시50; 7-15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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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_1115-111518.mp3


1950; 7-15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_1

 

 2015.11.15..주일오전.

 

*개요:    추수감사절, 결심, 시가서, 적용,

[]50:7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50:8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50:9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50:10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50:11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50:12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50:13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50:14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추수감사절은 그리스도인의 절기입니다. 절기는 내 상황이 좋거나 나쁘거나 간에 항상 닥치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1년에 한번씩 감사절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백성이자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에 드리는 감사이지 결코 우리의 조건이나 상황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가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이라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상황에 상관없이 감사를 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본질이 우리의 상황보다 더욱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자 그분의 자녀라는 것이 우리가 처한 어려움이나 긴박한 상황보다 더 중요하고 의미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 나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한국인으로서 추석을 피할 수 있는 사람 있습니까? 구정을 피할 수 있나요? 웬만큼 어렵지 않고서는 인간관계의 단절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추석과 구정을 피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한국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와 상관없는 절기는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최근 할로윈데이가 있었습니다. 10 31일이 바로 할로윈데이입니다. 그날 여러분은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바로 그날에는 죽은 영혼이 살아나고 정령이나 마녀가 출몰하기 때문에 미리 그것들에 대항하기 위해 더 무섭고 섬뜩하게 모습을 꾸미고 그것들을 물리친다는 서양관습에서 유래한 절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밥먹고 일하고 쉬다가 잠들었습니다.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속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절기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감사절을 지킵니다. 감사절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이나 자녀로서의 의미는 멀어집니다. 하나님과 별로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립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있는 자들이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절을 지키며 감사예배를 드리려고 할 때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와 친밀하시다는 것입니다. 7,8절을 보십시오.

“[]50:7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50:8   나는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는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자녀들에게 이야기하십니다. 나는 네 하나님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 백성이자 자녀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다. 영어로 하면 ‘God is my God!’ 이 될텐데 이것은 자꾸만 ‘Oh, my god!’으로 오해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라는 것은 굉장한 낭패스러운 일로 여겨질 뿐입니다. 그 의미를 찬찬히 곱씹어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모르시거나 거부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만드시고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하나님에 대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또 존재하기는 하지만 좋은 하나님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또 존재하기도 하고 좋은 하나님이기도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를 창조하셨고 구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제물로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번제가 항상 주님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항상 주님께 번제를 드리고 예배를 드려왔다는 것을 주님은 알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지금 제물이 값비싼가 혹은 누추한가를 가지고 책망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구정이나 추석때 자녀들이 아버지를 찾아가면 아버지가 자녀들 손만 바라보고 있습니까? 자녀들이 뭐 가지고 왔나를 중요하게 따지는 아버지가 있습니까? 아버지는 그저 자녀들이 오기만 해도 기쁘고 고마운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께 나아오기만 해도 기쁘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제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드리는 번제가 중요합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거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9-11절을 보십시오.

“[]50:9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50:10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50:11             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하나님은 가난한 분이 아닙니다. 우리 것을 가져다가 쓰셔야 할 정도로 그렇게 빈궁한 분이 아닙니다. 주의 성전은 가장 풍성하시고 가장 부유하시고 가장 충만하신 하나님의 전입니다. 그분의 부함을 말할 것 같으면 삼림의 짐승들과 산의 가축과 모든 새들과 들의 짐승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의 가치를 따지자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금액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짐바브웨라는 국가가 있습니다. 이 나라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유명합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가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맥주 한잔에 100억 달러(10조원)입니다. 50kg 옥수수가 300억 달러(30조원)입니다. 상인들은 그렇게 옥수수를 사서 2500억 달러(250조원)에 팝니다. 그 나라에서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휴지조각일 뿐입니다.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재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모든 화폐는 단순히 그 화폐를 가지고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가를 보여줄 뿐입니다. 아무리 많은 화폐를 가지고 있어도 가치를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휴지조각에 불과합니다.

우리나라도 그러한 시기를 거쳤습니다. 해방후 휴전선이 그어지고 미국과 소련에 의한 신탁통치가 시행되고 남북한 왕래가 금지되었을 때 이북에서 목숨을 걸고 휴전선을 넘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남쪽으로 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자들을 찾아가서 도와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당시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강을 건너는 것이었습니다. 배가 있는 사람들이 월남하려는 사람들을 넘어갈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이 요구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모든 땅문서, 집문서, 그리고 몸에 소지하고 있는 모든 귀중품 등이었습니다. 그 어떤 것도 남길 수 없이 모조리 넘겨주어야만 비로소 강을 건너게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넘어온 사람들이 하는 말은 그때 그것을 아까워하였다면 결코 지금의 평안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것을 주고서라도 얻어야 했던 것이 바로 남한에서의 자유였던 것처럼 우리가 모든 것을 주고서라도 얻어야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소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나라의 백성이 되고 그분의 자녀가 되고자 할 때 비로소 인생을 살아온 가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았다고 해보십시오. 그렇게 해서 죽으면 무엇이 남을 수 있겠습니까? 죽으면 다 사라진다는 생각의 허황됨은 고사하고 죽어서  받게될 죄의 심판은 영원히 이어지는 고통과 괴로움이 됩니다. 반면 모든 것을 다 가지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을 통해 얻는 것은 영원한 생명과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수와 생명나무와 모든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살리시고 먹이시며 입히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모든것이 풍성하기 때문에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주님은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50:12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50:13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수소의 고기나 염소의 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것이 달러나 원화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이미 그 달러나 원화로 살 수 있는 모든 충만한 것을 다 가지고 계십니다. 집도 많으시고 땅도 많으시고 모든 재료도 풍성하게 가지고 계십니다. 주님의 재산을 계산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수소와 염소를 어떤 마음으로 가지고 오는가입니다. 그 제물을 아주 억지스럽고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가져오는 것을 하나님은 받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이 어떤지를 알고 있으십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우리의 마음을 꿰뚫고 계시는 하나님의 분명하신 관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50:14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를 생각해 봅니다. ‘감사’ ‘서원’ ‘환난’ ‘영화이 네 가지 단어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을 드렸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할 때 서원을 이루게 됩니다. 서원을 이룰 때 환난 날에 주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환난 날에 주님에 찾을 때 주님께서 영화롭게 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감사가 안되면 서원도 안되고 환난 날에 주님을 찾지도 않고 영화를 얻을 수도 없습니다. 인생에서의 감정이 , , , 이라면 감사와 서원과 환난과 영화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얻는 모든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의 모함으로 매를 맞고 깊은 옥에 갇혔습니다. 그들은 실로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애매히 맞고 억울한 취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16: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16: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16:24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그러면 그들은 입이 나오고 불평이 터져 나오고 자신들을 도와주지 않으신 하나님을 원망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하는지 모릅니다. 자신들을 도와주지 않았다고 원망하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았다고 원망하고 세상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았다고 원망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찾고 도움을 요청한 것도 아니면서 하나님이 제때 도와주지 못했다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아마 바울과 실라가 갇혔던 옥에서도 그런 죄인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과 실라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이었습니다. 그 원망과 비난과 한탄과 비통의 장소에서 그들은 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16: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그들은 감사하였습니다. 다른 죄수들이 그들의 감사를 들었습니다. 그 기도와 찬송은 자신의 환경에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신분과 본질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환경에 의존하지 않고 본질에 의존했습니다. 그럴 때 그곳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은 그냥 놔두시지 않습니다. 특별한 역사를 통해서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16: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이것이 바로 그들의 영화가 되었습니다. 감사가 결국 영화로움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와 같습니다. 불평하고 원망을 할 때 이 속에 담긴 하나님의 크신 뜻과 계획을 보지 못합니다. 수많은 죄인들이 감옥에 갇혀있었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한 사람은 오직 바울과 실라 뿐이었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의 사람들이 학업 스트레스와 직장 스트레스와 건강 스트레스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스트레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삶 자체가 감옥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드려 감사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평안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1931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뜹니다. 그는 인류역사에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으로 기록되었고 그는 실제로 많은 필요한 기기들을 발명하였습니다. 그러한 노력은 노인이 되어서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에디슨에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노인이 되어서도 왕성한 열정으로 일하실 수 있습니까?"그 때 에디슨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믿음입니다. 영원에 대한 믿음이 이렇게 현재의 삶을 더 충실하고 만족하게 합니다.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것을 늘 믿고 있습니다. 죽음은 현재에서의 출구요 영원으로 향한 입구입니다."

그가 이렇게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감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날에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그의 청각에 문제가 생긴 이유는 소년 시절에 신문을 팔다가 기차에게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에디슨은 신문을 팔며 기차의 한구석에서 실험을 하곤 했는데, 어느날 기차의 진동으로 실험약품이 떨어져 불이 나버렸습니다. 이에 격분한 차장이 에디슨을 떠밀었고 그는 이 때 귀를 다쳤던 것입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연구하기 힘들지 않았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고 에디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나는 귀머거리가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딴 소리에 신경을 쓰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으니까요.”

 

지금도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우리에게 새로운 눈을 뜨게 합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임을 깨닫게 하는 눈을 뜨게 만듭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노래는 부를 때까지 노래가 아니고, 종은 울릴 때까지 종이 아니며, 사랑은 표현할 때까지 사랑이 아니고, 축복은 감사할 때까지 축복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인생속에서 더 큰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며 살아갑시다.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놀라운 영화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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