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9월에 조사된 금관총은 신라고분,발굴사에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다.금관총이 세 상에 알려져 발굴조사된 경위를 보변 경주 노서리에서 주막을 하고 있던 박문환이 그의 집 을 증축하기 위해 뒤뜰을 확장하고자 터파기 작업을 하던 중에 우연히 유물이 발견되었다. 정확히 말하자연 당시 노서동에 분포하고 있었던 고분군 가운데 폐고분을 의지한 곳에 집 이 들어서 있던 것인데 그런 줄도 모르고 봉토를 제거해서 낮은 곳을 메워 뜰을 넓히고자 했던 것이다.택지 조성 작업중 1921년 9월 23일경에 이 금관총의 매장주체부에서 유물이 출토되기 시작하였다. 이 소문은 곧 경주경찰서에 근무하고 있던 미야케 고우죠우(三펀興三)란 순경의 귀에 들 어가 그는 소문의 진원지를 찾아나서게 된다.그래서 봉황대 아래에 있는 박문환의 택지 흙 속에서 유물이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어 택지조성 현장을 찾아 즉시 작업을 중지시킨다.그 는 이 무텀이 신라의 왕 또는 어느 귀족의 무텀으로 여겨진다면서 자신의 상관인 이와미 히사미츠(깜강久光)경찰서장에게 서면으로 유물 발견 경위와 함께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어 떻게 할 것인가 긴급지시를 요망했다. 이 보고를 받은 서장은 당시 경주 주재 총독부박물관 촉탁으로 있던 모로시카 히로오(諸 塵 央 雄 )와 함 께 현 장 에 나 가 상 황 을 살 펴 보 고 유 물 이 더 출 토 될 것 을 알 고 는 경 찰 서 장 입 회하에 발굴조사를 하기로 한다.모로시카를 비롯해서 당시 경주보통학교(현 계림초동학교) 교장으로 있던 오사카 긴타로(大맺金太郞)그리고 고적보존회의 촉탁 와타리 후미야(波맨文 歲)등과 함께 9월 27일부터 유물 수습을 시작하여 9월 30일에 작업을 마침으로서 4일만에 유멍한 금관총 발필은 완료된다 민가의 택지를 조성하기 위해 파괴된 봉토릎 제거하고 평탄작업을 하던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지만 고분의 분포도와 현황 파악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래도 당시 미야케란 순경 의 공은 높이 평가헤도 될 것이다.만약 그러한 소문을 조사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거나 아 니띤 단 하루라도 늦게 현장에 나타났다면 중요한 유붙이 여기저기 흩어졌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되었다면 지금 우리들은 그 고분이 신라시대 금관이 최초로 출토된 무 텀이었다는 것을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조사가 단 4일만에 끝났다는 것은 바로 목곽의 바닥부가 완전히 드러난 상태에서 유불만 수습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당시 금빛 찬란한 순금제 금관이 출토되어 이를 기념하여 ‘금관이 출토된 무덤’이라는 뜻에서 금관총으로 부르게 되었고 고신라시대의 돌무지덧널무텀에서 최초로 금관이 출토된 무덤으로 기록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