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0월 19일 새벽 2시, 강원도 인제군 남면 어론리에서 이덕주 중령 일가족 6명을 도끼로 몰살시킨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 바 고재봉 사건이다. 각 신문들은 대문짝만한 기사를 냈고, 이 충격적 보도에 세상 사람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나(안국선 목사)는 당시 교회 서리집사로서 대한성서공회의 권서(성경을 전하는 전도인) 일을 하고 있었다. 신문의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아 한 동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던 나는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옆에 달린 강도를 보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순간 나도 모르게,“주님! 저에게도 힘을 주시옵소서. 세상이 모두 깜짝 놀라는 이 엄청난 강도를 구원하는데 저를 사용해 주소서.”그 후부터 나는 새벽 기도 때마다 입버릇처럼 기도했다.
“주여! 그 강도를 저에게 맡기시고, 구원 받도록 힘을 주시옵소서.”하고 되뇌면서 고재봉을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살인마 고재봉을 전도하는 일이 꼭 나에게 주어진 사명처럼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토록 끔찍한 일을 저지른 그도 필시 인간일진대 어쩌다가 사람을 죽였을 망정 한 자락의 양심 정도는 남아 있지 않겠느냐고 스스로에게 반문하면서, 그에게 전도할 수 있는 길을 알아 보았다.
그러는 중에 서울 구치소의 담당 검찰관의 배려로 그를 전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집에서부터 구치소로 가는 동안 줄곧 고재봉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고 생각했으나, 도무지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구치소에 도착하여서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5000’이란 수인번호를 단 죄수가 여덟 명의 간수에게 호위되어 따라 들어 왔다.
고재봉01.jpg“새벽마다 너를 위해 기도해 준분이시다. 좋은 말씀 많이 듣고 깨닫는 바 있기 바란다.”라고 말하면서 검찰관은 나를 고재봉에게 소개했다. 그와 눈길이 마주치자 갑자기 소름이 끼쳤으며, 눈에는 살기가 있다고 느껴졌다. 나는 엉겁결에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그도 나의 손을 붙잡았다.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피 묻은 손, 살기가 감도는 차가운 손으로만 알았는데, 그의 손은 의외로 따뜻했기 때문이다. 처음 해 보는 교도소 전도였기 때문에 약간 당황한 감을 느끼면서도 모든 것을 주님에게 맡기기로 마음먹고 가방에서 성경을 꺼냈다.
“자, 요한복음 3장 16절을 폅시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21절까지 큰 소리로 읽었다. 그러고 나서 무엇인가 이 말씀에 대한 설교를 해야 할 텐데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눈을 감고 한참을 있다가 나도 모르게“형제여!”하는 소리가 튀어 나왔다. 그리고 이어서,“형제여!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하고 외쳤다.
나는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무슨 말인가를 이어 가기 시작했다. 정말 주님의 힘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토록 나오지 않던 말들이 나도 모르게 술술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불쌍한 죄인을 위하여 나의 입을 사용하신 것이다. 설교를 마치고 불쌍한 죄인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기도가 끝나자 고재봉은 벌겋게 달아 오른 얼굴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가 갑자기 얼굴을 쳐드는 바람에 주위의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긴장되었다. 흉악무도한 살인마가 수갑을 푼 채로 나왔으니 어느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그 때 제일 당황한 사람은 다름 아닌 구치소장이었다. 구치소장과 고재봉과의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구치소장이 고재봉이 수감되어 있는 방을 들여다보았는데, 살인마 고재봉이 손가락으로 눈을 찌르는 바람에 구치소장의 안경이 깨지면서 질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고재봉의 손가락에 의해 안경이 깨지는 순간, 구치소장은 눈알이 달아나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이었던 다음부터 고재봉의 방 앞으로는 아무도 지나가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간에서 고재봉을 가리켜‘눈깔 파먹는 지옥의 염라대왕’이라고 한 것은 바로 그러한 일이 벌어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긴장된 얼굴로“뭐냐?”라고 묻는 검찰관의 물음에 고재봉은 약간 머쓱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내려뜨리면서,“검찰관님, 이제 모든 것을 자백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체포된 이후로 고재봉은 계속 묵비권을 행사하였고, 그로 인하여 수사가 진전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고재봉이 스스로 이 같이 이야기 하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의 진술에 의하면, 고재봉은 부대에서 부대장인 박중령의 사택에 자주 사역을 갔다고 한다. 주로 물을 긷거나 장작을 패는 일, 또는 청소를 하는 일과 이것 저것 잔심부름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 날도 고재봉은 박중령의 사택으로 가서 청소와 장작을 패는 일 등을 끝내고, 박중령의 서재에 들어가 잠시 쉬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의 시발은 작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견물생심이라고나 할까? 고재봉은 서재에서 작은 물건 하나를 집어 가지고 나왔다. 그 때 이것을 가정부가 본 것이다. 가정부는 길길이 뛰면서 야단을 쳤다. 저번에 박중령 군화도 훔쳐 간 도둑놈이라고 외치며, 고재봉을 몰아붙였다. 졸지에 고재봉은 박중령 집안의 모든 도난 사건의 책임을 져야 할 판이었다.
화가 난 고재봉은 순간 옆에 있는 도끼를 집어 들었다. 까불면 죽이겠다고 위협을 하였다. 이로 인하여 고재봉은 살인 미수로 7개월 간 육군형무소에 복역하면서, 박중령에 대해 이를 갈았다. 7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나온 고재봉은 원수 박중령을 죽이겠다고 결심을 하고, 예전에 박중령이 살았던 사택으로 찾아 갔다.
그러나 그가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 박중령이 다른 곳으로 전속을 가고, 그 사택에는 이덕주 중령이 들어 와 살고 있었다. 그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와 같은 끔찍한 살인은 저지르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오로지 박중령에 대한 원수를 갚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힌 고재봉은 무작정 박중령이 살았던 사택으로 찾아 가서 도끼를 휘둘렀던 것이다. 이 바람에 어이없게도 박중령이 아닌 이덕주 중령이 가족들과 함께 무참히 살해된 것이다.
고재봉은 이러한 전말을 털어 놓으면서,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그 동안 그처럼 묵비권을 행사해 온 것은 수사가 지연되는 동안에 기회를 보아 탈출하여 기어이 박중령을 살해하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검찰관이 묻는 모든 질문에 모두 답변하였다. 나는 이 놀라운 기적을 보면서“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이렇게 불쌍한 종을 회개하게 해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하고 기도했다.
그 후부터 나는 굽히지 않고 고재봉에 대해서 기도하고, 틈만 있으면 면회를 갔다. 사형을 언도 받은 고재봉은 공소를 포기했다. 왜 공소를 포기하였느냐는 질문에,“또 다시 공판장에 나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다시 공판장에 선다는 것은 한 마디로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공소를 하겠다는 생각을 갖지 않았습니다.”왜 그라고 해서 삶에 대한 애착심이 없을까 마는 그가 공소를 포기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 같은 놈은 빨리 죽어야 합니다. 제가 살아 있다는 그 자체가 이미 저에게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매일 제가 받아먹는 4등급의 급식도 제 마음 같아서는 저 담 밖에서 배를 곯고 있는 거지들에게 주었으면 합니다. 제가 지금 숨을 쉬고 있는 이 공기 한 줌마저도 저 같은 쓰레기에게는 차마 아까운 것입니다.”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서 왠지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 후에도 나는 자주 면회를 갔다. 하루는 일찍 면회를 갔으나 순서를 기다리다 보니 하루 종일 떨고 있어야만 했다. 연말이 가까운 겨울이라고 날씨는 혹독할 정도로 추웠다. 면회 마감 시간이 거의 다 되었을 무렵에야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고재봉!”그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큰소리로 대답했다.“고재봉 씨와는 어떤 관계이신가요?”이렇게 시작하는 간수의 질문은 상당히 번거롭게 계속되었다. 고향은 어디이며, 나이는 몇이며, 부대에서 함께 있었냐는 등등, 아마 내가 혹시 공범이라도 되지 않나 하고 심문하는 것 같았다. 나는 꾹 참고 끝까지 간수의 질문에 아는 대로 대답을 하였다. 질문이 다 끝나니 간수는“면회 거절합니다.”하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항의 하였다. 그러자 간수는 고재봉이 면회를 거절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다음에 오기로 하고 준비해 간 포켓용 신약전서 한 권을 간수에게 내밀었다.“이것을 좀 전해 주십시오.”간수는 성경을 받더니,“여기에 아무 것도 안 씌어 있지요?”하면서 이리 저리 뒤적거려 보았다. 나는 태연하게 간수를 보면서 아무 것도 안 썼으니 안심하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신약전서는 곧 고재봉의 손에 전해졌다.
독방에 홀로 있던 고재봉은 심심하면 성경책을 할 일 없이 뒤적거리곤 하였다. 그런데 한번은 이런 구절이 눈에 띄었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여기까지 읽던 고재봉이 생각했다.“아니, 이 구절은 요전에 왔던 어떤 목사님이 읽어 준 말이 아니냐!”고재봉은 약간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계속 읽어 내려갔다.“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여기까지 읽고 나서 또 생각했다.
‘맞다. 그때 그 목사가 나에게 읽어 준 바로 그 말씀이다. 그 때 그 목사는 너도 죽고, 나도 죽고, 너도 나도 모두 죄인이고, 세상사람 다 죄인이고, 예수 십자가 한쪽 편 강도 … 너도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 하였는데 그 말이 정말이긴 정말인 모양이구나 … 구원이란 도대체 무엇이냐?’그는 그 때부터 신약전서를 읽기 시작했다. 성경의 글씨들이 차츰 살아 있는 말씀으로 고재봉에게 전달되기 시작했다.
성경을 읽은 결과, 그는 거절했던 면담을 청했고, 내가 근무하는 대한성서공회로 연락이 왔다. 나는 기대를 안고 다시 구치소로 향했다. 일반 면회와는 달리 시간제한이 없이 자유스럽게 만난다는 것이 오히려 좋았다. 고재봉은 나를 보자 대뜸“지난번에 면회를 거절해서 죄송합니다.”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무슨 말인가를 하긴 해야 할 텐데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며 우물 쭈물 하고 있다가“저 지난번에 책을 드렸는데 받아 보았습니까?”하고 서두를 꺼냈다.“예! 이것 말씀이시지요? 잘 받았습니다.”고재봉은 바지 주머니에서 성경을 꺼내었다. 나는 반색을 하면서 물었다.“그 책 몇 장이나 읽어 보셨나요?”그러자 고재봉은 우물쭈물 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예, 한 다섯 번 쯤...”나는 놀라운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짧은 동안에 다섯 번이나 읽었다니. 이것이야말로 대단한 일이었다.
“저 이것 말고 큰 책 있지요?”“이거 말이오? 지난번에 드린 것은 신약전서이고, 이 큰 책은 신약과 구약을 합본한 성경전서이지요. 내가 다시 사 드리겠습니다.”다음 날 나는 성경과 찬송가를 사서 고재봉에게 건네주었다. 고재봉은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 하였다.
고재봉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성경을 읽었다. 시간이 이처럼 아까운 것인지를 새삼 느낀 것이다. 급식을 갖다 주어도, 고재봉은 성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읽던 곳을 끝까지 읽은 연후에 밥을 바라보았고, 밥 먹는 것보다도 성경을 더 좋아했다고 하니, 고재봉의 바뀐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후부터 내가 면회를 갈 때마다 고재봉은 눈물을 글썽이며.“이 성경이 얼마나 귀한 책인지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진작 이 책을 보았더라면 아마 제 인생도 변했을 것입니다.”하고 감격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새벽이면 단정히 일어나 앉아 교회의 종소리가 들리는 것을 신호로 하여 찬송가를 부른다고 말했다.“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고재봉의 방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