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기독교는 일제시대 때 있었던 신사참배 문제를 두고 격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일제시대 때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조선기독교를 말살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일본 신 천조대신에게 경배를 하고 그 천도대신 이름으로 세례를 다시 받으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애국운동의 근거지라고 본 일제가 사실상 조선기독교를 멸절시킬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이 신사참배 문제로 조선 기독교는 말할 수 없는 수난을 겪게 됩니다. 진실된 종들은 붙잡혀 감옥에 갇히고 또 순교했고, 수많은 주의 종들이 해외로 혹은 산 속으로 흩어졌습니다. 유일한 신학교였던 평양신학교는 자진해서 무기휴교에 들어갔습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의 수난기였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바로 이 때 1938년 제 27회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는 기독교 신앙에 배치되지 않는다'고 결의를 하고 만 일입니다. 193명의 총대 사이에 일본순사 97명이 앉아 있었다고 하니 그 살기등등한 분위기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만, 일제의 사주를 받은 사이비 기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 엄청난 죄악을 범하고 만 것입니다. 그들은 그 후 일본 귀신의 이름으로 앞장서서 전부 세례를 받았습니다.
해방 후 한국장로교가 안고 있었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신사참배에 대해 어떻게 회개하느냐! 길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이 문제에 대해 최종결단을 내려야 할 총회가 바로 1950년 4월 21일 대구제일교회에서 열렸던 제 36회 총회입니다. 그러나 이 총회는 안건들은 제대로 취급도 해보지 못한 채 수라장이 되고 맙니다. 목사님, 장로님들이 자기들끼리 뒤범벅이 되어 서로 멱살을 잡고 때리고 발로 차고 하는 사태까지 발전하여 경찰이 개입해서야 겨우 진정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결국 총회는 부득불 무기 정회를 했고, 바로 두 달 후에 6.25 사변이 일어난 것을 결코 우연한 일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