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 당국자는 “워커 장군이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 방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대한민국을 지켜낸 점이 높게 평가됐다”며 한미동맹상 첫 수상자 이유를 밝혔다. “특히 낙동강 전투에서 우리나라를 지켜내는 등 혁혁한 전공과 함께 우리 군과 미군의 칭송을 받고 있는 인물이어서 초대 수상자로 적임자”라고 설명했다.
1889년 12월 3일 텍사스주 벨튼에서 출생한 그는 1912년 미국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1,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3기갑사단장으로 참전해 승리를 거듭했으며, 특히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독일군의 로멜 부대와 맞서 공훈을 세우고 중장으로 승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조지 패튼 장군이 가장 아꼈던 부하로 평가받았으며 ‘패튼 장군의 불독’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는 이후 48년 맥아더 장군의 부름을 받아 일본에 본부를 둔 미 8군 초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러다 50년 6·25전쟁이 터지자 7월 13일 낙동강 지역에 파견돼 “버티느냐 죽느냐(Stand or Die)”라며 방어선 사수 명령을 내렸다. 그는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철수건 전선 조정이건 어떤 것이든 뒤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라고도 했다. 포항·영천·대구·창녕·마산·통영을 연결하는 이른바 ‘워커라인’의 방어작전은 국군과 연합군 간 최초의 연합작전이었으며 한·미 군사동맹의 시초가 됐다.
우리 정부는 워커 장군을 기려 61년 광진구 아차산 자락에 유엔군의 휴양시설을 만들며 워커힐로 명명했다. 주한미군과 유엔군이 일본이나 동남아로 휴가를 가지 않고 휴식을 취하도록 63년 완공된 워커힐은 73년 선경개발(현 SK)에 넘어가며 워커힐호텔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