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바로가 가로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자 하는도다
18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너희가 벽돌은 여수히 바칠지니라
19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이 너희의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20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선 것을 만나
21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22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23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감사하는
마음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주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감사는 끝이 나고 불평과 미움이 시작됩니다. 주님이 어떤 선물을 주셨다고 해보십시오. 그 선물을 받게 되었을 때의 감사는 그 선물을 풀어보고 나서 그 선물이 무슨 용도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당혹감과
낭패감이 들 것입니다.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괴로움도 들 것입니다.
자꾸만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이런 선물은 주시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텐데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이 주신 것은 좋은 것이었지만 그 이후로 진행되는 일에 어려움이 생길 때에 그것은 나쁜 것처럼 보입니다.
1.세상에서 우리는 주의 일을 하려고 할 때 어려움 당하게 된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려고 하다보면 어려움 당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응답에 따라 움직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면
만사형통하리라고 했건만 실제로 그 뜻을 따르다 보면 어려움이 생겨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서 모세가
바로 그랬습니다. 그는 주님의 뜻에 따라서 바로에게 애굽의 종된 이스라엘 백성을 내어 놓으라고 말하였지만, 그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더 큰 어려움이 찾아왔습니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17 바로가 가로되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자 하는도다
18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너희가 벽돌은 여수히 바칠지니라”
바로는 모세가 그 많은 기사와
이적을 보여주었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이스라엘 백성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그 괴롭힘은 그들에게 일을 시키는데 더 힘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전에는
벽돌을 주면서 그 벽돌을 쌓아서 성을 만들라고 했지만 이제는 벽돌도 주지 않으면서 성을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게으르고 편안해서 내보내 달라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배가 부르니까 자유를 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로의 모습은 모세에게
괴로움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어째서
바로는 하나님의 그 모든 기사와 이적을 보고도 조금도 끄떡하지 않을 수 있는가! 모세는 혼란스러움에
빠졌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러한 바로의 강퍅함과 아울러
이스라엘 백성자신도 모세를 대적하기 시작했습니다.
“20 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선 것을 만나
21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그들을 자유케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애굽의 바로에게서 벗어나서 자유로워지면 누가 그 유익을 누리겠습니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 아닙니까? 그렇다면 누구보다도 더 인내하고
누구보다도 더 격려를 해줘야 할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세를 비난하고 원망하고 거역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우리를
죽인다고 하였습니다. 바로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너희가 우리를 괴롭히는 자들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마지막 말은 더 가관입니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모세가 바로에게 이스라엘을 자유케
해달라고 말한 모든 것이 다 여호와의 뜻이었지만 그들의 여호와는 그런 모세와 아론을 감찰하고 판단하는 분이었습니다. 진정한 여호와가 아니라, 그들만의 환상속의 여호와였던 것입니다.
2.모든 어려움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주님이 역사하시지 않는 것이다.
이 모든 저항과 반대 속에서
모세는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 자신도 이제 혼란스러워졌습니다. 그도
인간인지라 바로의 강퍅함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난과 저주에 자기 자신도 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께 돌아왔을 때에 모세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바로도, 이스라엘 백성도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어려움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주님이 역사하시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상황을 그냥
내버려 두고만 계실까요? 왜 빨리 바로를 넘어뜨리시지 않는 것일까요?
왜 이스라엘 백성을 빨리 풀어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닫도록 역사하시지
않는 것일까요? 주님은 잠잠하시고 잠잠하십니다. 모세를 정말
괴롭히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역사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22 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23 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그의 말을 통해 생각해 보면, 모세는 하나님께서 왜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하게 하시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는 왜 그를 보내셨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중요하게 모르는 것은 왜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지 않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묻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두려움과 분노와 절망감을 가지고 주님께 대해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3.하나님은 그분의 놀랍고 의로운 계획대로 역사하신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모를 때, 그분의 계획을 모를 때, 이전에 가졌던 감사는 송두리째 사라집니다. 하지만 그 감사를 다시 찾고자 한다면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이
모든 복잡한 상황 속에 감추인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놀랍고 의로운 계획대로
역사하십니다. 주님은 인간처럼 실수하시는 분도 아니고 모르시는 부분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은 주님의 온전하고 완벽한 뜻과 계획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집니다. 그것을 알고 그것을 배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수준에까지 높아집니다.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신뢰하며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러한 수준으로
올라 올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니다. 먼저 바로에 대해서입니다.
“출6: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
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바로에게 대해 하나님은 강한
손을 더하므로 결국에는 바로가 그들을 쫓아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그 이후부터 애굽에
열가지 재앙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 열 가지 재앙을 통해 바로는 하나님께 심판받았으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말 그들을 쫓아 내었습니다. 하나님을 이를 통해 이스라엘을 내보내시는 하나님은 능력의 여호와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출6: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출6:7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출6: 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이 자유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가나안으로 나아가리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는 자는 자애로운 바로가 아니라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들은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땅으로 기업을 삼는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백성들은 어려움 당했던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왜 하나님은
구원치 않으셨나요?
“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구원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구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은 모세의 오해였습니다. 주님은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바로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자신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셨던 약속에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신음함을
들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장의 필요를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약속을 생각하시고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게 하심으로 언약을 이루시는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셨습니다.
이를 위해서, 바로가 열가지 재앙을 받아야 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혹독한
역사 가운데 주님을 간절히 부르짖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신음을 했을 뿐이지 간구를 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 당면한 어려움 속에서 모세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주님을 부를 때에 비로소 그들은 주님을 구주로
맞아들이는 것이며 그분의 진정한 백성이 되어갑니다. 이를 위해서 주님은 온전한 구원을 이루고 계셨던 것입니다.
4.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함으로 주의 역사를 이루는 자들이 되자.
우리의 삶속에서는 모세가 겪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하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주님이 역사하시지 않는 것 같고, 구원하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 역사하고 계십니다. 지금 구원하고 있습니다. 그 구원하심이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 뿐이지 주님은 그분의 온전하신 뜻을 지금 이 순간에 이루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뜻을 따르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역사를 이루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날마다 저의 둘째 딸 지인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줍니다. 그러면 가끔씩 지인이는 저에게 이렇게 물어볼 때가 있습니다. 오늘은 어린이집에 안가고 놀러가면 안되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안된다고 합니다. 어린이집에 가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지인이는 묻습니다. “왜?”
그 이유를 물어보는 진지한(?) 질문에 저는 그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왜 어린이집에 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요? 그러한 질문을 첫째 딸인 예인이에게서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예인이는 이전에 초등학교에 등교하기를 싫어했습니다. ‘왜 내가 학교를
가야 하나요?’이러한 질문을
우리는 많은 청년들, 장년들에게서도 듣습니다. 왜 내가 교회를
가야 하나요? 왜 내가 직장에 가야 하나요? 왜 내가 그런
모임에 가야 하나요? 안가면 안되나요?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그 이유를 묻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출6:7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우리가 이일에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가 되십니다. 그 무거운 짐 속에서 우리를 언젠가
도우시고 빼어내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을
의지하면서 그 계획을 바라보면서 인내하며 나아가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출6: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그것이 결국 우리의 진정한 구원이
되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땅을 주어서 기업을 삼게 하려는 것이 주님의
뜻이기 때문에 우리를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제 이곳에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을 바라본다면 주님은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그래서 제가 지인이에게 해준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지인아, 우리 모두는 해야할 일이 있단다. 때로는 하고 싶지 않아도 그일을 해야 할 때가 있어.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언니도 해야할 일이 있고 너의 해야할 일은 어린이 집에 가서 선생님에게 배우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거야. 우리 할일을 다 잘하고 조금있다가 다시만나자?”그러자 지인이는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할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일입니다. 그
일을 잘 하면 주님은 우리를 세워주십니다.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힘들다고
해서 그만두게 하는 부모님은 없습니다. 하고 싶지 않지만, 힘들지만
그것을 이겨내게 하는 부모님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붙들어주십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고 주의 구원하심을 바라봅시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를 온전히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적용]
10삼하 5; 17-25 소리가 들리거든 동작하라_1
2012.7.15.주. 주일오전, 주제설교-계획
*개요[51계획] {2역사서} <A적용> [4욕구]-[5은혜]
17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았다 함을 블레셋 사람이 듣고 다윗을 찾으러 다 올라오매 다윗이 듣고 요해처로 나가니라
18 블레셋 사람이 이미 이르러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한지라
19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단정코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20 다윗이 바알브라심에 이르러 거기서 저희를 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그 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칭하니라
21 거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상을 버렸으므로 다윗과 그 종자들이 치우니라
22 블레셋 사람이 다시 올라와서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한지라
23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온대 가라사대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
24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동작하라 그 때에 여호와가 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
25 이에 다윗이 여호와의 명대로 행하여 블레셋 사람을 쳐서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르니라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의 구원을 받고 나서 그 이후의 삶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에 대해서 깨달아가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알아가면 갈수록 놀라게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분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분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반대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먼저 알고 그 놀라움 속에서 그분을 믿고 의지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나서 놀라움을 경험하게 되든지, 아니면
놀라움을 경험하고 나서 그 다음에 믿음으로 구원을 얻든지 이 둘은 각각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내용으로는 동일한 것입니다.
1.하나님의 때는 사람의 때보다 더욱 놀랍고 완전하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면서
놀라는 이유는 그분의 때가 우리의 때보다 더욱 놀랍고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는
다 지혜로운 사람들이 됩니다. 자기분야에 있어서 전문가가 되어갑니다.
공부를 오래 한 사람들은 공부의 전문가입니다. 직장에서 자기가 맡은 분야를 오래 하다 보면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됩니다. 가사를 돌보는 일도 처음에는 어리숙해도 나중에는 전문가가 됩니다. 인간관계와 같은 사회생활에서도 여러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전문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도가 트게 됩니다.
그렇게 전문성을 띠게 되면 남의
말을 듣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합니다. 저렇게 하라고 하면 이렇게 하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하라고 하면 저렇게 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뜻을 관철함으로써
자신의 전문성을 나타내고 또한 자신의 뜻대로 하려고 함으로써 스스로 모든 일을 다 잘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나타내고자 합니다. 그러한 우리의 본성상의 욕구는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때를 따른다는 것에 대해서 주저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나의 뜻과 나의 때를 이루는 데 익숙하지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때를 따르려고 하는 데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일부러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면, 하나님의 때가 얼마나 올바르고 완전하였는지가 나타납니다. 지금 당장은
거부감이 들고 저항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 순종하려고 하지 않지만, 조금 지나고 나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그분의 인도하심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나의 때란 또한 얼마나 보잘것 없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놀라우심을 깨닫게 됩니다.
2.다윗은 그러한 하나님의 때를 믿고 의지했을 때 승리할 수 있었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믿고
자랐습니다. 그는 구원의 확신이 있었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사모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나이가 들고 이런 저런 경험을 하면서 더욱 새롭게 하나님을 깨달았습니다. 그 놀라우심을 경험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하나님의 때가 자신의
때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몸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골리앗을 상대할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분의 때를 기다려야 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골리앗에서 무턱대고 나아가지
않고 조심해서 기회를 엿보다가 물맷돌로 그의 이마를 맞춰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사울이 자신을
죽인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이 자신을 피하게 할 때에 아무 미련도
갖지 않고 사울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피해 다니면서 마련한 시글락이라는 근거지에 아말렉
사람들이 쳐들아와서 부녀자와 가축들을 탈취해 갔을 때에도 그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고 그 때에 따라서 다시 아말렉 사람들을 쫓아가서 기습을 해서
무사히 모든 무리와 가축들을 다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던 다윗에게 또다시
어떤 위기에 닥쳤을 때에 자신의 때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따른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위기는 자신이 왕이 되었다 함을 듣고 공격하러 올라온 블레셋 사람들로 인해서 생겼습니다.
“17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았다 함을 블레셋 사람이 듣고 다윗을 찾으러
다 올라오매 다윗이 듣고 요해처로 나가니라”
블레셋 사람들은 그 이전에 자신들이
도와주었던 다윗이 자신들을 배신하고 이스라엘로 돌아가 왕이 된 것에 대해서 분개해 했습니다. 그들은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적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도와주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적을 도운 셈이 되었기 때문에
속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블레셋의 침공은 다윗에게 위기가 되었습니다. 그가 나아간 ‘요해처’는
‘적을 막고 자기편을 지키기에 편리한 지점’이라는 뜻으로
쉽게 말하면 ‘요새’입니다.
이제 그는 그곳에서 왕이 된 이후에 처음으로 전쟁을 수행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 다윗의 믿음은 빛이 났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때가
자신의 때보다 더 우선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그는 충분히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께 묻고 있습니다.
“19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블레셋 사람에게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저희를 내 손에 붙이시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되 올라가라 내가 단정코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그가 주님께 물었을 때에 주님은
대답하셨습니다. 그는 주님께 올라가리이까 말리이까를 물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전쟁에서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정말 자신의 손에 블레셋을 붙여 이기게 하실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올라갈 것이며
하나님께서 반드시 승리케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이렇게 주님께 물었을 때에
주님은 그에게 대답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답하셨을 때에 그 내용은 구체적인 것이었습니다. 먼저 공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승리를 얻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은 이렇게 전쟁에서의 승리와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예배드릴 때만 주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쟁할 때에, 위기가운데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일을 경험하면서 다시한번 하나님의 때는 자신의 때보다 더욱 위대하다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3.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믿으면서 자신의 때를 버려야 한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자신의 때를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믿는다면 나의 계획은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계획은 나의 감정과 나의 원함을 이루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뜻과 원하심을 이루는 것입니다. 나의 감정과 원함을 이룸으로써 얻는 것은 나만의 만족뿐이지만 하나님의 뜻과 원하심을 이룰 때에는 하나님이 만족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만드시고 기뻐하셨던 것처럼, 그 기뻐하심은 온 우주에 퍼져나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묻고 의지한다는
것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에게도 이러한 헌신은 동일하게 적용되었습니다. 블레셋이 그렇게 패배하고 퇴각한 다음에 그들은 또 다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다시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하나님은 다르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올라가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때에는 올라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23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온대 가라사대 올라가지 말고 저희 뒤로 돌아서 뽕나무 수풀 맞은편에서 저희를
엄습하되
24 뽕나무 꼭대기에서
걸음 걷는 소리가 들리거든 곧 동작하라 그 때에 여호와가 네 앞서 나아가서 블레셋 군대를 치리라 하신지라”
물론, 하나님이 측면공격을 지시하셨고 그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올라가지 말라는 것이 별로 힘든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을 우리가 순종하려고 하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경험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응답을 들으려고 하는 행동
그 자체는 엄청난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응답을 기다린다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때로 하나님께 묻지 않으려고 하기도 합니다. 지금 당장 해야만 한다는 절박함에 하나님께 묻지
않고 기도해 보지도 않고 일을 저질러 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이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성공합니다. 이 작전으로 6·25전쟁의 전세는 뒤바뀌었습니다. 승승장구하며 남으로 진격하던
북한군은 후퇴하기 시작했고, 부산까지 밀렸던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까지 북한군을 몰아붙이게 됩니다. 그러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확률은 겨우 0.2%에 불과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세우고 점검할 때 부정적인 보고가 있었습니다. “전쟁역사상 바다에서 육지로 공격을 감행하는 상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