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1.사람들은 주님이 고통당하신 것을 불쌍히 여기기는 하지만 자신들이 죄지은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활절이 가까이 오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부활절은 전적으로 예수님에 관한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마스에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부활절에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화적으로 우리나라는 기독교문화가 아니기 때문에 부활절이 사회적으로 갖는 의미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 아직 부활절은 발렌타인데이나 빼빼로 데이보다도 못한 것 같습니다.
반면, 외국 기독교 국가에서는 부활절은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그 날을 기념하고 의미있게 보내기 위해서 다양한 행사와 활동이 준비되고 홍보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절의 예수님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그 생각은 사람마다 다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활절 전의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그 고통에 대해서 주목합니다. 그래서 고난주간에 더 큰 의미를 둡니다. 그 고난에 동참하며 함께 아파하고 괴로워합니다. 2000년전의 예수님의
고난이 자신에게도 느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부활하신
이후의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그 기쁨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부활절에 더 큰 의미를 둡니다. 고난에 동참하는 분들에게는 부활이란 고난의 끝이라는 의미를 가질 뿐이지만 부활에 동참하는 분들에게 부활이란
새로운 기쁨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더 큰 희락과 화평과 감사를 갖고자 합니다. 또한 새롭게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움과 축복됨을 경험하면서 그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데에 주력합니다. 그래서 결국 고난에 동참을 하던, 혹은 부활에 동참을 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감상과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들에게
전혀 다른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당하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슬피 우는 자들에게
해주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나를 위해서 울지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서 울라’라는 것이었습니다.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그들은 예수님이 채찍에 맞고
가시 면류관을 쓰며 손으로 매맞음을 당한 다음에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에 박히기 위해서 무거운 십자가를 끌고 가는 것을 보면서 따라오던 여자들이었습니다. 그 여자들은 예수님이 이렇게 불쌍하게 매맞고 고통당하며 결국에는 십자가에 달리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예수님이 불쌍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렇게 불쌍하게 여기는 예수님은 도리어 사람들이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고 기억해 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왜 예수님은 정반대로 너 자신과 너의 가족들을 생각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2.주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가 저지른 죄와 그 죄의 결과들을 미리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에서 밝혀집니다. 예수님은 앞을 내다보고 계십니다. 미래에
어떤 일이 있을지를 알고 계십니다. 지금 현재의 일은 예수님이 매맞고 채찍질 당하고 고문당한 뒤 십자가에
달려서 마침내 죽임을 당하시는 것이지만 앞으로의 일은 바로 예수님을 위해서 울고 있던 그들 자신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임하는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들이 어떤 일을 당하게 된다는 것일까요?
“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날이 이르게 되면 그들은 말하게
될 것입니다. 수태를 못한 이가 복이 있다, 수태를 했더라도
출산을 하지 못한 이가 복이 있다, 출산을 했더라도 차라리 젖을 먹이지 못한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차라리 어려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더 복이 있고 지금보다 더 나았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로우면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그들은 또 말하게 됩니다. ‘산들이 우리 위에 무너져 내려서 죽었으면 좋겠다, 작은 산들이
우리 위에 덮여져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게 됩니다, 사건과
사고로 인해서 죽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욱 부러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들에게는 어떤 일이 있기에
그런 것을 원하는 것일까요?
뿐만 아닙니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다시 말해서 아주 나무가 푸르르고
무성해도 그렇게 원한다면,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즉, 나무가 아주 메마르고 앙상하게 되었을 때에는 얼마나 더 괴롭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변 상황이 아주 넉넉하고 편안해도 그렇게 죽고 싶어 할 것이고, 주변 상황이 더
열악하고 척박하게 되면 더욱 그렇게 죽고 싶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상황과 상관없이 그들은 삶을 힘들어
하고 괴로워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그분이 얼마나 미래를 정확하게 내다 보시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렇게 너희에게 만들어
주겠다, 너희가 그러한 극도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미래에 너희가 그렇게 될 것이고, 나는 너희가 그렇게 될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미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미래에 그들이 얼마나 울고 얼마나 괴로워하며 얼마나 슬퍼할 것인가를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에 나의 고통과 괴로움에 대해서 울지 말고 미래의 너희 자신과 너희의 자녀들을 생각하면서 울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고통 당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위해서 고통당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정말로 바라보시는 것은 바로 앞으로 일어나게
될 고통으로 나아가고 있는 그들과 그들의 자녀였던 것입니다.
3.사람들은 현재 자신들의 고통으로 인해 괴로워하지만 그 실체는 하나님께 지은 죄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시던
그 ‘보라 날이 이르면’이라는 말씀이 정말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말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만약에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만약에 내가 학교에 가지 않았다면, 만약에
내가 입사하지 않았다면, 만약에 내가 결혼하지 않았다면, 만약에
내가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또한 사람들은 말합니다. ‘산이 무너져 내렸으면, 사고라도 났으면, 눈깜짝할 사이에 이세상을 떠났으면, 전쟁이라도 났으면, 종말이라도 왔으면, 예수님이라도 왔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주변환경이 넉넉하고 살만해도 그렇고 주변환경이 열악하고 고통스러워도 그렇습니다. 어디에나 세상에 대한
소망과 기대가 사라진 때가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이
죽으신지 2000여년이나 지났지만 왜 여전히 우리에게는 이렇게 우리 스스로 괴로워하고 절망하며 좌절하는
삶이 존재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했던 그 무엇때문에 일어난 우리의 죄때문입니다. 그 죄가 우리로 하여금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하게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넘어서지 말아야 하는 선을 넘게 만들고,
우리의 죄가 결코 이루어져서는 안되는 일을 이루고 싶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형제가
형제를 해치고, 자매가 자매를 해치며, 자녀가 부모를 해치고, 부모가 자녀를 해치며, 친구가 친구를, 이웃이 이웃을, 선배가 후배를, 후배가
선배를 해치는 일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어디에서도 우리 마음 속 깊은 속에서 원하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을 찾을 수 없고, 오직 그 속에 유익과 편안과 쾌락만을 원하게 될 때 우리는 끔찍한 상태에 이르게
되고 그속에서 미워하고 분노하고 절망하며 그로 인해서 자포자기한 나머지 산들에 대해서 우리 위에 무너지라, 작은
산들에 대해서 우리를 덮으라라고 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이 모든 일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죄를 인해서 주님이 행하시는 일은 미리 용서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되어질 일을 안다면 왜 막지 않으셨느냐구요? 그것을 막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다만
귀찮아질 일을 미리 ‘예방’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행하신 일은 바로 앞으로 죄악가운데서 고통하게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서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온전히 죄악으로 인해 스스로 살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선하게 될
의욕을 상실해 버린 그 불쌍한 세상 사람들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서
울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참된 주님의 용서하심을 받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4.우리는 그 죽으심의 의미를 기억하며 주님의 십자가 밑으로 들어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부활절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고난에 참예하던, 아니면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며 부활에 참예하던,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그냥4월의 첫 번째 주와 두 번째 주를 바쁘게 보내던 그 모든 것이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어떻게
시간을 보낸다 하더라도 우리의 죄를 위해 미리 피흘리신 주님의 용서하심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 시간이
다 지나간 다음에, 아니 그 시간이 진행되고 있을 때에 우리는 여전히 죽고 싶어 하고, 죽이고 싶어 하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입니다. 단 한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런 미련도 후회도 없을 것입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으면서 죄악을 저지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진심으로
우리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우리 자녀를 사랑한다면 겉으로만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고 끝내지 않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죄사함이 우리에게 부어지기를 또 다시 눈물을 흘리며 간구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울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그토록 피흘리시며 고통당하시며 죽으셨지만 여전히 죄가운데
있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우리 자녀를 위해서 울어야 합니다. 그들의 죄를 위해서 주님은 몸버려 피흘려 죽으셨지만 전혀 그 용서하심으로 나아오지 못하고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그 어리석은 자녀들을 위해서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또한 그 모든 기대와 소망에도 불구하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그들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주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래 전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렇게 죄지으리라는 것을 아시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우리 때문에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 자신의 죄나 잘못으로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죄와 그 죄악의 결과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의 죄를 보아야 합니다. 조금의 용서도 없이 가혹하고 매정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나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 고난 주간, 그리고 다가오는 부활절에 우리가 받은 죄사함을 기억하는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안타까운 형편을 미리 아시고 흘리신 그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와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서 울며 주님이 주신 온전한 죄사함의 감격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인들이
단지 예수님을 불쌍히 여기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26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우리도 주님을 불쌍히 여길
때가 아니라 주님의 길을 따라가고자 할때
그 십자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저 주님을 불쌍하게만 쳐다 보며 안타까워하는 여자들이
아니라 담대하게 그 십자가 안으로 들어와 함께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그 죄사함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이시간 우리 모두에게 넘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나눔: 당신의 욕구로 인해서 일어난 죄를 온전히 사해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당신의 마음속의 욕구는 어떻게 달라지겠습니까?
41막16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의 변화_1
9-18 / 2012.4.8.주, 부활주일-주제설교
*개요[54용서] {5복음서} <3분석> [6결심]-[7실천]
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11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12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1.부활은 영광스러운 예식이 아니라 개인적인 관계형성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절을 맞이하였습니다. 이 부활절을 거룩하고 영광스럽고 화려하고 성대하게 보내는 것이 일반적인 풍경입니다. 특별한 순서와 특별한 행사와 특별한 모든 시간들이 이 부활절을 그렇게 특별하게 만듭니다. 아마 대부분의 교회가 부활절을 그렇게 보낼 것입니다. 부활절을 우울하고
평범하며 초라하게 보내고자 하는 교회는 없을 것입니다. 힘이 닿는 대로 이 부활절을 어떻게 해서든지
기쁘고 감사하게 보내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절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슬퍼함도 잠시였고 그분은 죽으신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망권세를 이기셨고 모든 절망과 두려움을 이기셨습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 되시며 죄없으시며 어떤 권세도 그를 누를 수 없음을 부활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부활은 놀랍고 감사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속에서 부활은 사못
분위기가 다릅니다. 부활의 순간에는 아무런 찬양도 아무런 영광스러움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혹시 그 영광스러움이 새벽에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성경에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나심에는 천사들의 찬양이 울려퍼졌고 그것이 목자들을 통해서 증거되었지만 부활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변화된 것이라고는 오직 무덤의 돌이 옮겨져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온 여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무덤의 돌이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는 부활체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나타나는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요? 그것은 은밀함입니다. 그리고
개별적인 만남입니다. 예루살렘이 떠들썩하지도 않았고, 대제사장들이나
군병들에게 분명히 나타난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의 사건은 한 사람, 한 사람씩 살아나신 주님이 친히 만나주시면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부활의 성격은 관계적이었고, 개별적이었으며, 또한 내면적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부활을 통해서 정말로 하려고 하셨던 것이 사실은, 그
부활의 소식을 친히 온 세상에 선포하시면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부활하심을 부인하고 의심하며 낙심했던 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씩 만나서
그들을 용서해 주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2.예수님은 각 사람들이 부활을 믿지 않음을 고백하고 용서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까? 어쩌면 여전히 여러분들도 주님이 죽으시기 전에 무슨
말씀을 했었는지 기억을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3일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구요. 마태복음20장입니다.
“마20:18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19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주님은 이 외에도 마태복음 16,17장, 누가복음9,13,18,24장에서 반복적으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이 사실을 대제사장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마27: 62그 이튿날은 예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가로되 63주여 저 유혹하던 자가 살았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뉘인 무덤에 무거운 돌을 옮겨놓는 것 뿐만 아니라 군병들을 시켜 그 무덤을 지키게 했던 것입니다. 그정도로
예수님이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여자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르기
위해서 향품을 사다놓았습니다. 그들은 다시 부활하신다는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막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그들은 애는 썼지만 정말로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는 것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더군다나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았습니다. 요한복음에서 그녀는 자신앞에 있는 분이 동산지기인줄 알고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떼를 썼던
것입니다.
“요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15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안타까운 것은 여자들만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더욱 한심합니다. 여자들이 그러고 있는 동안 그 부활의
아침에, 3일째 된 바로 그날 아침에 그들은 뭐하고 있었는 줄 아십니까? 10절을 보십시오.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
그들중 아무도 혹시 예수님이
부활하시지는 않을까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들은 그냥 슬퍼하며 울고 애통해하며 절망해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주님이 부활하리라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이 주님의 부활하심을 믿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믿지 않았음을 회개하고 용서해주기를 원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전에 알던 랍오니, 선생님이 아니었습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던 같은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구세주였습니다. 그분은
성자 하나님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의 죄를 사해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제자들은 믿지 않음을 회개해야 했고 주님은 그 믿지 않음을 용서해 주십니다. 그것을 다
용서하시는 이유는 그 죄값을 자신이 다 치루셨기 때문입니다. 애초부터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3.부활을 믿는 믿음은 용서의 고백을 행하는 것이고, 용서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부활하신 뒤에
하신 일은 온전히 그 부활하심을 믿지 않은 자들을 용서해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을 만나시고 그들을
용서해주셔서 그들이 믿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바로 다시 살아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일에는 모종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제자들편에서의 불신입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11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그들은 직접 본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직접 본 마리아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전해 듣는 자들은 도저히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살아나리라는 예수님의 말도 믿을 수가 없었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셔서 만났다는 마리아의 말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강하게 부인하며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만나셔서 그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며 믿게 하셨습니다. 그 두 제자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예수님이 자신에게 나타나신 것을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제자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들의 의심과 절망은 너무나 컸습니다.
“12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오늘날, 이러한 씨름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우리가운데 계신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도 믿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되어진 모든 것을 믿습니다. 또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도
믿습니다. 앞으로 죽으면 천국가는 것도 믿으니까요. 그래서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합니다.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은 단, 현재뿐입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행동합니다. 믿었다면 그렇게 살지 않았겠지만 믿지 않았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다닙니다. 예수님 바로 앞에서 예수님을 달라고 떼를 씁니다.
하나님은 이미 충만한 은혜로 함께 하시지만 그것은 부족하고 모자랍니다. 원하는 것은 내가
향품을 바를 수 있는 예수님의 시신일 뿐인 것입니다. 내가 순종하고 섬겨야 하는 살아계신 예수님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시신을 원하고 있습니다.
또는, 여전히 제자들처럼 슬퍼하며 울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데 예수님은
지금도 역사하시는데 예수님은 바로 이 순간에도 그분의 뜻을 놀랍게 이루고 계시는데 그들은 다 끝난 것처럼,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절망하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고,
하나님이 자신을 미워하신다고, 하나님이 자신을 저주하셨다고 울면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리셨지만, 그 부활의 기쁨을 가지고
우리 옆에 계시지만, 우리는 그렇게 슬퍼하느라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이제, 주님의 씨름을 보십시오. 주님은 결국 제자들이 다 있는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행하십니다.
“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주님은 지금까지 그들에게 그렇게
믿음이 없었던 것에 대해서 꾸짖으십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해서 이미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꾸짖으십니다.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그들의 거부와 불신을 꾸짖으십니다. 주님 앞에서 그들이 했던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용서를 구했습니다. 믿지 않았음을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들을 용서하시면서 하신 말씀은 이제는 부활을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4.우리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부활의 이름을 나타내는 자들이 됩시다.
우리는 주님을 믿지 않았던
지난 날의 삶에 대해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믿지 않았던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다. 용서의 고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아무런 처벌도
내리지 않으시고 우리의 믿음없음을 용서해 주십니다. 오히려 더욱 사랑해주십니다. 우리는 그 용서 속에서 더욱 분명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셔서 우리 가운데 계심이 분명하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용서의 고백으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어져서 용서의 삶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러한 용서의 삶이 진정한 믿음의 모습이라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