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은 우리들에게 여러가지를 새롭게 만들어 줍니다. 해가 바뀌고 새날이 오면서 우리들은 기본적으로 일년씩 더 나이를 먹습니다. 나이든 것을 실감하게 되기도 하고 실감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여러모로 우리는 작년과는 다른 새로운 신체적인 환경에 들어섰습니다. 또한 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은 완연한 변화를 느낍니다. 새로운 반과, 새로운 선생님과 새로운 학교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도 새해 시무식을 하면서 올해의 여러가지 새로운 환경에 직면하게 됩니다. 군복무를 하고 있는 사람은 제대가 가까워져 오기에 더욱 설레기도 할 것입니다. 가정이 있는 사람은 올해 뭔가 가정적으로 새로운 일이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많은 변화들 속에서 우리는 이런 저런 소원을 가집니다. 변화들이 단순히 변화로만 그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 변화가 좋은 것으로 나타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이 우리 민족의 근본적인 종교성이기도 하고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고 해보십시오.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는지 모릅니다.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자녀를 두신 부모님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재미가 없겠습니까? 원하는 것을 주는 즐거움이 있는데 그러면서 더욱 부모님이 있음을 감사하게 될텐데, 이런 저런 것을 구하지 않고 아무 것도 요청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실 마음 속에 거부감이 있기 때문이며 신세진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불편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혹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여러 가지를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이번 주에 저도 기도할 것이 있어서 잠시 기도원에 갔다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며 부르짖고 있더군요. 신년에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이 있고 간구하는 것이 많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보기에 좋아보였습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것이지요. 기도원이 아니더라도 새벽에 특별새벽기도회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특별축복집회를 개최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합니다. 왜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해서 성전에 나아와 기도했겠습니까? 왜 솔로몬이 왕이 된 다음에 천번 번제를 드렸겠습니까? 왜 다니엘이 왕이 금지하는 것을 알면서도 목숨을 걸면서 하루 세 번씩 고국인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했겠습니까? 그들이 미쳤나요? 그들이 정신이 나갔나요? 그들이 비이성적인 사람들입니까?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 정상이 아닌 것이지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정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럴 때 기뻐하시고 그 기도를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나가 아들을 낳았고, 솔로몬이 지혜와 및 모든 풍요로움을 얻었으며, 다니엘이 죽을 때까지 안정적인 지위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잘되는 것이 무의미합니다. 평안한 것이 자랑이 됩니다. 형통한 것이 거만한 이유가 됩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어려움을 겪게 하시고 형통하지 못하게 하시고 문제가 생기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께 다시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어려움과 슬픔과 고통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이며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간구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모습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간구가 다 용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간구하지 않는 모습이 당연하지 않는 모습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과 동일한 이유입니다. 다시 말하면 간구하지 않음이 하나님께 미치지 못함 같이 잘못 간구하는 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간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간구가 아니라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하나님을 부끄럽게 하는 간구가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간구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간구일까요?
오늘 본문에는 세배대의 아들의 어미가 나옵니다. 그녀는 특별히 자신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을 위해 간구하기 위해서 그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나아와 절하였습니다. 축복성회에 아들들을 데리고 나오는 어머니처럼 그렇게 예수님앞에 나온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호의적인 태도에 이 어머니는 기쁘고 기대가 넘쳤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 속에 숨겨둔 가장 은밀한 것을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21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이 소원을 예수님께 말씀드렸을 때 예수님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녀의 소원은 거절당한 것입니다.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는 당당하게 요구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무례하게 부탁을 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원했습니다. 그의 간구의 자세나 태도가 문제가 아니라 내용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별로 고민하지 않은 채 소원과 기도를 드립니다. 물론 그런 간구 중에는 정말 순수하고 거룩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간구 중에는 너무나 원색적이고 이기적이며 하나님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지 않습니다. 기도의 모습과 태도는 받으시지만 기도의 내용을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는 어떻게 기도할 지라도 들으시지 않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그 기도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해서는 절대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 기도를 약간만 바꾸면 그럼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실 것입니다. 기도를 전혀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기도를 하되 기도를 하면서 그 기도 내용을 조금씩 변화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의 기도는 어떻게 바꾸면 좋을까요?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런 간구를 했다는 것이 소문이 난 다음에 제자들은 분개했습니다. 그들이 분개한 이유는 좋은 자리는 자기들이 다 차지하려고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인 박탈감과 자기 마음 속에서도 예수님의 옆자리에 앉고 싶다는 생각이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전히 세배대의 아들의 어머니처럼 그렇게 똑같이 생각하고 있는 제자들을 불러다 놓고 그 소원이 변할 수 있도록 가르치셨습니다. 27절입니다.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은 세상의 집권자들이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남용하는 것을 보게 하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를 그대로 실현하고 있습니다. 적나라하게 원색적으로 노골적으로 요구하며 그렇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뒷돈을 받고 사람을 억울하게 괴롭히고 불의를 행하는 일들을 우리도 싫어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그렇게 욕구 그자체입니다. 정욕 그 자체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에 비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무엇인가요?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좀 다른 것입니다. 어떻게 다른가 하면 크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그런 욕구가 있는 자는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 욕구를 조금 변화시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럴 때 진정으로 큰 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여기 사람들 중에 으뜸이 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면 사람들 중에서 종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따라서 자신의 으뜸이 되고 싶은 욕구를 약간만 바꾸면 그것이 변화되고 그 변화된 모습은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서 마침내 진실로 으뜸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는 욕구를 아예 없애버리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교나 도교에서는 그런 욕심들을 없애기 위한 수양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팔정도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고통의 원인을 없애고 해탈에 이르기 위해 행하는 8가지 방법으로써 ‘1정견 2정사 3정어 4정업 5정명 6정근 7정념 8정정’의 수양방법을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 욕구를 완전히 없애버리려는 시도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고통도 같이 사라진다고 본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살려면 산으로 들어가야 하고 그래도 부족해서 마침내 죽으면 해탈에 이르게 된다고 하는 완전히 비인간적인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그 크고자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없애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고 싶으면 예수님의 방법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되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어 예수님을 본받게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 자신도 바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전도자 무디의 생애를 아시나요? 그는 1837년 매사추세츠 노스필드(North Field)에서 소작농이자 석수인 에드윈 무디(Edwin Moody)와 베시 홀튼(Betsy Holton) 사이에서 여섯 번째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때 아버지가 사고로 별세하면서 빚쟁이들이 와서 가구를 가져갈 정도로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으며, 무디도 더이상 공부를 하지 못하고 어린나이에 농장에서 아동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17세 때인 1854년 시카고에 간 무디는 외삼촌 사무엘 홀튼(Samuel Holton)의 제화점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했는데, 1855년 주일학교 교사 킴볼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된 그는 시카고 빈민가의 어린이들에게 전도하는 어린이 사역을 하였습니다. 1875년 시카고 빈민가에 교회를 설립했는데, 구두판매원출신다운 쉽고 설득력있는 무디의 설교와 감성을 자극하는 가수 아이라 생키(1870년 무디의 전도사업에 참여)의 성가는 많은 이들이 신앙을 갖게 했습니다.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도 전도했는데, 자리가 모자를 정도로 그의 설교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남북전쟁때는 전쟁터에서도 설교했는데 많은 군인들이 무디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설교자로서의 활약상은 청년들이 해외선교 특히, 아시아와 조선선교에 관심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는 가난했고 볼품없는 제화점 영업사업이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로 사람들을 섬기기 시작했을 때 전혀 다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가 구두를 파는 욕심으로만 있었다면 아무 의미가 없었겠지만 복음을 전하는 열정으로 바뀌었을 때에 변화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지막 절 28절은 우리가 닮아야 하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줍니다. “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렇게 사람들을 섬기려 하시고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심으로써 그분은 어떠한 분이 되셨습니까? 가장 큰 분이 되셨고 가장 으뜸이신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욕구를 그대로 기도하지 마시고 그것을 약간 바꾸어서 기도해보십시오. 과정에는 상관없이 결과만 요구하지 마시고 과정에 대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 보십시오. 우리가 정말 섬길 수 있도록, 우리가 정말 우리의 것을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내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지금 당장 얻고 누리려고만 하지 마시고 예수님의 뜻을 따라 섬기며 베풀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올 한해 이러한 변화된 기도제목을 통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크고 존귀한 자로 만드시는 은총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42눅 6;43-45 열매와 나무와 뿌리의 상관관계
2009.6.28. 주. 주일오후 상담 비전
우리는 살아가면서 '상담'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생각해보면 상담은 일반적으로 거의 모든 곳에서 사용되고 있는 셈입니다. 의료상담, 직업상담, 법률상담, 구직상담, 학업상담, 등등 갖다 붙이기만 하면 모든 곳에서 상담이라는 용어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모든 곳에서 사용하는 그 공통된 의미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상담은 아닐 것입니다. 목적을 가지고 의미를 가지고 나누는 대화가 바로 상담이 됩니다. 그렇다면 상담이라는 형식은 사실 교회에서 가장 익숙한 형태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날마다 모이기도 하고 매 주일마다 모이기도 합니다. 그러기를 그가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때부터 시작해서 교회를 떠나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하게 됩니다. 그 어떤 상담보다도 더 오래되었으며 더 효과적이고 더 빈번한 상담이 교회에서의 상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담은 좀더 심리학에서 더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현대사회에서 상담은 교회적인 용어라기 보다는 심리학적인 용어에 더욱 가깝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의학에서 출발한 내담자에 대한 치료가 대화를 통해 이루어질 때 효과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의학에서 분리해서 심리학을 만들었습니다. 그다음 심리학에서 특별히 상담분야에 대한 연구를 거듭하면서 상담학이라는 분야가 또 새롭게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의학, 심리학, 상담학 순서로 일반학문에서 상담이 발전할 때에 교회역사 속에서는 설교, 심방, 성경공부, 제자훈련, 공동체 등으로 상담은 발전되었습니다. 사실은 교회 속에서 상담은 존재하고 있었는데 현대 사회는 너무나 심리학적인 상담에 의존을 하다보니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다시 원래 교회 속에서 존재했던 상담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1960년대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더 이상 상담에 대해서 의학이나 심리학에 빚지지 않고 성경 속에서 교회생활 속에서 상담을 새롭게 정립해 나가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적 상담학인 것입니다.
이 성경적 상담학은 교회에서 사용할 수 있고 현대사회의 당면한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성경 안에서 해답을 찾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교회생활 속에서 보았던 많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며 호환가능하고 언제든지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적 상담학도 학문적인 구성을 가지기 때문에 상담의 목표가 누구냐에 따라서 아주 쉬울 수도 있고 아주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적 상담의 목표가 내가 잘 아는 가족이나 절친한 친구, 이웃이라면 손쉽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반면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이고 그 사람의 연령대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더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간단한 문제로 한 두번의 상담이 필요한 경우라면 쉬울 수 있겠지만 아주 복잡하고 꼬인 문제로서 여러 번의 상담이 필요하다면 역시 어렵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아다시피 마음의 변화와 삶의 변화를 교회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냥 그냥 예배드리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마음이 변하고 뒤이어 삶이 변화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교회가 추구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성경적 상담학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진정한 변화를 이룰 수 있도록 우리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며 제가 부르심을 받은 분야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성경적 상담을 우리 성도님들이 함께 배우시기를 원합니다. 그냥 삶의 지혜와 터득한 통찰로 사람들을 상담하고 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적 상담으로 그렇게 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우리 교회에 오면 노인을 만나거나 장년, 청년, 중고등, 유초등 그 어떤 사람을 만나도 상담이 되고 또 상담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 비전에 우리 모두가 함께 힘을 합쳐서 우리가 교회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효과적이고 목표가 있는 대화를 나누기를 바라고 교회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며 격려하고 하나님의 사람들도 서로 세워나가기를 바랍니다. 이 비전에 우리 모두가 함께 합십하기를 바랍니다.
제가 미국에서 여러 교회를 돌아보는 동안 우리 교회 정체성과 부르심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많은 교회 들 속에서 각자가 자신의 색깔과 의미를 갖는데 우리 교회는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할까? 결론은 바로 우리는 마음의 변화를 이루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 변화가 균형을 맞추어서 삶의 변화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이루는 방법이 바로 성경적 상담학입니다. 이 분야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그것을 제대로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저도 한번은 교수로 초청을 받았지만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현재 상황에서 일반 교회에 접목시키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느 교회를 다니느냐 누가 물으면 개척교회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것입니다. 하지만 그 교회가 마음의 변화와 삶의 변화에 꿈과 비전이 있다 말할 수 있으면 여러분들도 더욱 교회생활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하고도 별다른 변화가 없어보이는데 왜 그것을 계속하려고 하느냐?' '과연 그일이 어떤 열매를 거둘 수 있겠느냐?' 하지만 여러분, 우리 교회는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많은 일을 해왔습니다. 시작이 너무 바닥에서부터 출발해서 그렇지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또한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마음의 변화와 삶의 변화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시간이 걸리고 노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일을 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재능 속에서 여러분들은 이 교회에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냥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 재능을 눈여겨보시고 그 일을 할 만한 곳으로 바로 이곳으로 보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재능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성경적 상담을 통한 마음의 변화의 삶의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제가 있는 동안 오후예배 시간에 이 성경적 상담학을 함께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조금씩이라도 그 내용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 내용을 통해 집약적으로 성경적 상담에 대해서 배우며 우리의 교회생활 속에서, 그리고 우리의 가정생활 속에서 상담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장 먼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성경에서 상담적인 마인드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되면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하나 둘 씩 확장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열매와 나무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더 나아가서 말과 마음의 상관관계이기도 합니다. 쉽게 말하는 이런 것입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또 나무가 좋고 나쁜 것은 그 열매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대로 마음과 말의 관계로 드러납니다. 마음이 나쁘면 나쁜 말이 나오고 마음이 좋으면 좋은 말이 나옵니다. 말은 단지 우리가 입술로 내는 음성뿐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행동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나쁘면 나쁜 행동이 나오고 마음이 좋으면 좋은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들으면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드는 이 원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알려주신 것이고 이것이 바로 성경적인 상담의 시작입니다.
이것은 무엇이 진실인가를 찾아내는 열쇠입니다. 이 원리에 집중할 때에 우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역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원리에 집중하는 것이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서 열매를 살펴보는 것은 당연하지만 마음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은 행동만 보아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설령 악한 말을 했다 하더라도 그가 마음 속에 그렇게 악한 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악한 행동을 은연중에 했을 때에 마음 속으로는 그 속에 좋은 마음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결코 진실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하는 것은 진짜로 좋으냐 나쁘냐입니다. 만약 좋다면 더 좋은 열매를 맺게 할 수 있고 만약 나쁘다면 마음을 변화시켜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게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현재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입니다. 좋고 나쁘고를 따져서 버리고 취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좋고 나쁘고를 따져서 좋은 것은 더 좋게, 나쁜 것은 좋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여기까지 우리가 우리가 이해했다면 나머지 두 가지만 더 이해하면 됩니다. 하나는 무엇이 마음을 나쁘게 하는가 이고 또 다른 하나는 무엇이 마음을 좋게 하느냐라는 것입니다. 나쁘게 된 원인과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변화의 역동성이 무엇인지를 알 때 나쁜 마음을 좋은 행동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좋은 마음은 더 좋은 행동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마음을 나쁘게 하는 것은 문제상황 속에서 생겨납니다. 문제 상황 그 자체가 나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문제 상황 속에서도 좋은 마음은 좋은 행동을 만들어내니까요. 문제상황에 대한 나쁜 행동은 나쁜 결과를 만듭니다. 그리고 이것이 악순환을 가져옵니다. 계속해서 나쁜 행동과 나쁜 결과가 이어지고 그것은 더 큰 문제상황을 만들어냅니다. 이 악순환 속에서 진짜 나쁜 결과를 만드는 것은 그리고 나쁜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은 나쁜 마음입니다. 결국 중요하게 보아야 하는 것은 나쁜 마음입니다. 그것에 집중해야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상황을 바꾼다는 것, 결과를 바꾼다는 것, 행동을 바꾼다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임시적이고 표면적일 뿐입니다. 나중에는 원래 상태로 돌아와버립니다.
그 다음 그렇다면 무엇이 그 마음을 바꾸는 것인가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궁극적인 변화를 가져다 줍니다. 여기서 성경적 상담의 특징이 나타납니다. 성경적이라는 것은 성경의 원리에 따른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원리는 우리 인간이 스스로는 정화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으로는 마음속의 죄악을 없앨 수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공급을 받는 사람은 마음이 변화되고 새로워집니다. 그것이 먼저입니다. 행동의 변화보다도 마음의 변화가 우선되며 그에 따라 행동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연결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마음에 능력을 공급합니다. 그것은 행동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 행동은 동일한 문제 상황에 대해서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좋은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쁜 반응은 나쁜 결과가 나오지만 좋은 반응은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로 인해서 문제 상황 자체가 변해버립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변화를 위해 노력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바입니다. 예레미야는 그러한 삶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17:8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이러한 삶의 변화의 가치를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요? 아버지가 이렇게 변하고 어머니가 이렇게 변하고 아들이 이렇게 변하고 딸이 이렇게 변한다면 그 무엇에 이 기쁨을 비할 수가 있을까요? 직장인이 농부가 주부가 인부가 일꾼이 이렇게 변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알고 이렇게 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은혜에 연결될 때에 새로워집니다. 가끔씩 성경말씀을 가지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단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신천지나 여호와의 증인들이나 혹은 하나님의 교회, 안상홍 증인회나 기타 성경연구로 성도들을 미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는 자들입니다. 성경을 암호풀이책으로 바꾸어서 미래예언서로 바꾸어서 축복주문서 정도로 바꾸어서 이렇게 저렇게 성경을 난도질하면서 자신의 욕심을 채웁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유혹하여 죄악의 길로 끌어당깁니다. 그들이 진실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열매도 없습니다. 오직 지금까지 성경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하는 정통교회에 대한 분노와 교역자에 대한 미움만이 있을 뿐입니다. 자기들이 더 성경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교만과 더 많은 복을 받으리라고 생각하는 오만방자함이 있을 뿐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만 얻을 수 있습니다.그 은혜를 얻는 자들은 받는 사람만이 압니다. 그 은혜를 통해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적상담의 가장 기초적인 원리를 배웠습니다. 이 위에 성경적 상담원리가 하나둘씩 얹혀집니다. 이것은 가장 성경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장 심리학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가장 세속적이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잘 맞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않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들의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받아들이고 안받아들이고는 그 사람들의 선택이겠지만요. 이 상담을 통해 사람들의 변화를 이루는 일에 여러분은 초대받았습니다. 이일에 함께 동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교회의 방침이나 목표라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십분 활용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까지도 될 수 있는 이 거룩한 사역에 함께 참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이일에 앞장서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이일에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우리의 사랑하는 자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계속되는 이 과정 속에서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이 특별한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잘 배우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32욘 2;7-10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2009.8.2.주일. 주일오후예배 / 0상담 비전
지금까지 우리는 ‘어려운 상황’과 ‘나쁜 결과’에 이어지는 ‘나쁜 열매’와 ‘나쁜 뿌리’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본질적으로 누군가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에 그 문제를 해결해주고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과정입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모를 때 그 문제를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또한 그 문제에 대한 마음이 어떤지 모를 때 그 마음을 어떻게 변화시키겠습니까? 마음의 상태를 알아야 그것을 바꿀 수 있습니다. 또한 그래야 진정한 변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문제의 유형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문제의 근원이 되는 마음의 상태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보려고 하는 것은 그 마음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어떻게 변화될 수 있을까요?
일단 중요한 것은 악한 마음에 뿌리에는 스스로 변화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외부로부터 새로운 도움이 와야 합니다. 마치 우리가 독한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었을 때 그 바이러스를 이길 수가 없고 항생제를 복용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으로부터 능력을 이끌어 내려고 한다면 결국은 실패할 것입니다. 하지만 외부로부터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면 다양한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사나 먹는 약이나 기타 등등의 치료를 통해서 우리는 악한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특히 악한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한 마음이 아닙니다. 손상된 마음에서 회복된 마음으로 가야한다는 것이 아니고 악한 마음에서 선한 마음으로 가야합니다. 인간에게 있는 악한 죄성이 고백되어지고 그것을 선하게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바랄 때에 회복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일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악한 마음의 뿌리가 선한 뿌리로 바뀌어지지 않습니다. 은혜가 아니라면 단지 악한 마음의 뿌리가 완화되는 정도이고 혹은 이쪽의 악한 부분이 저쪽으로 옮겨가는 것 뿐입니다. 이런 욕구가 저런 욕구로 바뀔 뿐이고 결국에 시간이 흐른다음에는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제 악한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결코 변하지 않았을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가 다가오니까 그 은혜에 연결되니까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것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욕구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시면서 하나님의 은혜는 악한 마음에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두드립니다. 그럴 때 마음문이 열리고 그 은혜를 받아들입니다. 그런 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은혜가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성경말씀 속에서 요나의 마음 속에 들어가는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요나는 이미 이전에 마음에 들어오는 은혜를 2장에서 경험하였습니다. 그것을 또 다시 4장에서 경험하게 되겠지만 요나서는 그 이전에 먼저 끝이 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나의 회심과 은혜 받는 과정은 2장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4장이후의 요나의 회심은 2장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은 회심은 같은 과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2장에서 요나의 중심적인 회심의 고백은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나와있습니다. 이부분이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만드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요나가 이렇게 마음이 변화되었으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7절 말씀에서 요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삽더니” 그의 영혼은 피곤해 했습니다. 그것은 좋게 표현된 것 뿐이고 사실은 매우 괴로웠습니다. 그 영혼은 너무나 힘들고 어려웠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풍랑으로 몰으셨고 물고기 뱃속으로 집어넣으셨습니다. 이 후에는 박넝쿨을 뺐으셨고 말씀 가운데 나타나셔서 그의 악한 욕심과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지 않는 불충함에 대해서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니 그의 마음은 편하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편하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풍랑이 이는 바다 한복판에 있는 배밑창에 잠들려고 누웠지만 사람들이 그를 깨워버렸습니다. 박넝쿨 밑에서 초막을 짓고 한가롭게 살고 싶었는데 하나님이 뜨거운 태양과 동풍으로 박넝쿨을 말라죽이시고 그의 생활을 힘들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 때 그는 하나님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잊어버리려고 한 것이 아니고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려고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나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요나처럼 고통중에서 하나님을 생각한 다른 사람이 있는데 그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입니다. 탕자는 아버지가 준 재산을 가지고 다 탕진하면서 음란과 쾌락과 유흥을 즐기다가 사람도 잃고 돈도 잃고 나중에는 돼지먹이주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주염열매를 먹다가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는 종들의 부유함을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살던 그 때를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하겠다고 만들었습니다. 아버지를 생각하고 그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하겠다는 것, 그것이 그의 마음의 변화의 시작이었습니다.
요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다는 것은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분의 능력을 생각하면서 그 손아귀로부터 빠져나갈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으면 스스로 죽지도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처음에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물고기가 그를 삼켜서 죽지 않게 한 것입니다. 이른 특별한 은혜를 받으면서 그는 도망갈 수 없으니 차라리 돌아가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주님의 용서를 생각했습니다. 다시 돌아가면 벌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언제든지 용서해 주시고 새로운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기억했습니다. 니느웨사람들도 용서해 주시는 것처럼 선지자였으나 선지자 같지 않았던 자신도 하나님이 용서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했습니다. 이렇게 돌아가려고 하니까 그는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돌아가는 것은 너무나 쉬웠습니다.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그 기도는 순식간에 주님께 이르렀습니다. 눈깜짝할 사이에 성전에 도달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까지 주님을 등지고 있었을 뿐이지 주님은 항상 그의 뒤에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쫓겼을 뿐이지 주님으로부터 멀리 떠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붙잡히고 나니 돌아가는 것은 너무나 쉬웠습니다. 그의 기도는 항상 주님께 닿아 있었고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그가 돌아오는 것을 너무나 간절히 바라셨던 것입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어디 있었을까요? 아버지는 그 시각에도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그 시각에서 마을 입구에 나와 있었습니다. 탕자가 돌아오는 모습은 멀리서 조그맣게 보였지만 아버지는 대번에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오기까지 기다리시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달려나가서 아들을 맞이하였습니다. 아들이 돌아오기를 너무나 너무나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의 악한 마음의 뿌리가 사라지고 그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채워지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주시고 돌아가셨는데,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처소를 예비해 놓으셨는데 그런 우리들이 회개하지 않고 죄악중에 살면서 망하게 되지 않기를 주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좀더 쉽게 말하면 주님이 배양하고 만들고 태어나게 하고 좌우를 분별하게 하고 아끼고 사랑하고 키웠던 우리들을 아끼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이제 이 사랑이 우리의 마음 속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우리의 더러운 욕구를 씻어버립니다. 그 욕구 속에서 우리는 유익을 원했고 편안을 원했고 쾌락을 원했습니다. 더 큰 자극과 더 재미있는 것과 더 좋은 것을 원했습니다. 하지만 물고기 뱃속에서, 박넝쿨이 죽어버린 초막 밑에서, 때로는 병원의 병실 안에서, 누추한 감옥 속에서, 어느 허름하고 누추한 가옥 속에서 이제는 돌아가야 하겠다를 결심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도망다니지 말고 돌아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더라도 아들이라도 부름을 받지 못하더라도 그곳에서 마음편히 살아야 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기도를 드립니다. 뜨거운 눈물의 기도를 드립니다. 뜨거운 회개의 기도를 드립니다. 주님은 그런 기도를 들으십니다. 애통하는 기도, 통회하는 기도, 자복하는 기도를 들으십니다. 헛된 망상 속에서 이것 저것을 요구하는 기도는 물리치시지만 ‘우리가 변하겠습니다’ 라고 ‘우리가 잘못했습니다’라고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이 즉시 받으십니다. 그 기도가 상달되었을 때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무릇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이제 그가 말하는 것은 과거의 모습입니다. 그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던 자는 누구입니까?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린 자는 누구입니까? 그는 자기 자신입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과거의 자신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의 모습은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의 모습은 주께 제사를 드립니다. 지금의 모습은 자신의 서원을 주님께 갚습니다. 만약 주님께 회개를 했다 하더라도 그 기도가 성전에 상달되었다 하더라도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시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할 것입니다. 또 다시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릴 것입니다. 이전에 울고 불고 눈물에 콧물에 범벅이 되었다 하더라도 감사하지 않고 제사를 드리지 않고 서원을 갚지 않으면 다시 원상태가 될 뿐입니다. 아무리 이것을 반복한다 하더라도 삶이 변화하지 않으면 마음도 변화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가 진심으로 서원을 주께 갚을 때, 선지자로서, 주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겠다는 서원을 주께 갚을 때 그는 비로소 변화된 사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혹은 아들로서, 딸로서, 직분자로서, 목회자로서, 직장인으로서 그 서원을 주께 갚을 때 비로소 우리는 변화된 사람입니다. 주님 품에 안긴 사람입니다. 주의 은혜로 충만해진 사람입니다. 다시는 악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요나의 마지막 고백이 이 놀라운 변화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삶의 구원, 영혼의 구원, 생활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만 이루어집니다. 진정한 변화는 참된 마음의 변화는 오직 하나님으로만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요나를 변화시키시는 데 무엇을 사용하셨습니까? 배를 사용하셨고 선장을 사용하셨고 풍랑을 사용하셨고 물고기를 사용하셨습니다. 니느웨에서의 변화를 위해서는 뜨거운 동풍과 박넝쿨을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현재 무엇을 사용하고 계십니까? 그 모든 것이 주님의 변화의 도구인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우리에게 주신 가정이, 우리에게 주신 교회가, 우리에게 주신 학교와 직장과 사회가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그리고 그영역에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일들이, 자연만물들이, 심지어는 악한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의 변화의 도구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참된 변화를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뚫고 오시는 그분의 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때로 도망가다 도망가다 매와 채찍과 인생의 어려움으로 비로소 항복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적절히 돌아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결코 포기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변화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한 이러한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면서 주님의 변화의 도구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변화되기만 하면 새로운 은혜를 주시고 모든 문제를 풀어주실 것입니다. 마치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가 나오는 것처럼 우리를 모든 문제에서 빠져 나오게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2욘 3;1-6 변화된 요나의 성공적인 니느웨 사역
2009.8.9.주일. 주일오후 / 0상담 비전
변화된 사람은 변화되지 않은 사람보다도 더욱 강력한 영향을 미칩니다. 기독교 역사상 많은 신앙의 위인들은 다들 어떤 식으로든지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5만번 이상 기도응답을 받아 유명한 죠지뮬러도 사실은 비행청소년이었습니다. 도둑질을 하다가 감옥에 가기도 하고 신앙생활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던 그는 친구의 인도로 기도모임에 가게 되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성경을 함께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고 모든 필요에 대해서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채워주신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고아들을 불쌍히 여겨서 고아원 사역을 하면서 필요가 생길 때마다 기도노트에 기도를 적고 성경말씀을 붙들면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는 살면서 성경을 200번 정도 읽었다고 합니다. 꼭 기도할 때에는 그에 관련한 성경말씀을 찾고 그 구절을 짚어가면서 기도하였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고 응답을 받은 것이 5만번이 되었던 것입니다. 변화되었기에 가능한 놀라운 사역이었습니다.
그러한 변화의 사람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전에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고, 존 뉴튼은 노예상인이었다가 목사가 되어서 ‘어메이징 그레이스’찬송을 작곡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김익두 목사님이라는 유명한 분이 있었는데 그분은 깡패로 소문나 있었지만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어 탁월한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이러한 변화된 사람들은 전부 과거의 모습을 버리고 새로운 모습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변화는 좋은 것입니다. 변화는 새로운 가능성입니다. 변화는 더 놀라운 일들을 이루게 만듭니다. 그 변화는 애초에 문제가 되었던 한 인간의 삶의 문제의 한계를 벗어납니다. 그 변화의 한계는 끝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개인의 문제로, 가정의 문제로, 종교적인 문제, 학교나 직장이나 사회의 문제로 고민했었던 것일지 모르나 변화된 삶의 열매는 애초의 영역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더 크고 무한한 영역으로 확장됩니다. 그래서 변화는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 보고 있는 이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애초에는 삶의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변화가 시작되었지만 한 바퀴 돌고 난 다음에는 전혀 새로운 변화가 찾아오고 있습니다. <은혜>를 알게 되었고, <결심>을 하게 되었으며, <실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변화는 제한되지 않으며 제한할 법도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금지할 법이 없는 것입니다. 계속 자라나게 됩니다. 이제 오늘은 그 모든 변화의 마지막으로 요나가 어떻게 변화를 이루었는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가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는가를 주목해보려고 합니다. 변화된 요나는 너무나 놀라운 일을 이루었습니다. 그에게는 그런 변화를 통해 이룰 수 있는 커다란 하나님의 사역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볼 때 우리에게도 주님이 주시는 커다란 소망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다음에 무엇을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다시 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절입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이제 요나는 하나님의 명하신 바가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것은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그 명하신 바가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알았던 이유는 스스로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그가 회개하였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진리를 말하는 것은 너무나 쉬웠습니다. 자신의 배운 진리를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경험한 진리에는 확신이 있습니다. 신념이 생깁니다. 그것을 통해 놀라운 사역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요나는 일어나서 니느웨로 갔습니다. 니느웨를 다 돌아다니는 데에는 삼일이 걸렸습니다. 삼일 동안 니느웨에 회개를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날에 그가 회개하지 않으면 40일 후에는 니느웨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너질 것이라고 선포했을 때 백성들은 정말 하나님을 믿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이 퍼져나가 왕에게까지 들리게 되었고 왕도 역시 보좌에서 일어나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도 어려울 것 같던 회개의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회개와 간구의 모습은 눈깜짝할 사이에 왕에게까지 이르렀고 왕조차도 돌이켜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요나가 니느웨에 도착해서 하루만 선포했었어도 온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사역을 통해 니느웨를 구원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의 사역은 가장 성공적으로 가장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며 완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이것이 어떠한 변화의 과정을 거쳤는지 생각해 봅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의 삼일을 보내면서 온전한 마음의 회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물고기 뱃속에서 나와서 다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에 그 모습은 첫 번째 명령을 받았을 때와 동일한 상황입니다. 주님의 명령은 변화되지 않았고 가감되지 않았습니다. 동일한 명령이 두 번째 임한 것입니다. 그럴 때 요나가 보인 행동은 실천이었습니다. 그 실천은 즉시 일어나 니느웨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삼일길이 걸리는 니느웨 사역에서 오직 첫번째 날만 선포하였어도 그들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물론 이 변화는 하나님이 도우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의 순종과 충성이 바로 그 변화를 이루는 고리가 되었습니다. 그전에 요나는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감정에 빠져서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달라지고 나니까 이러한 실천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을 때에 그러한 마음에 새로운 결심이 생겼습니다. 그 결심은 실천을 이룰 수 있게 힘과 능력을 공급했습니다. 하지만 <실천> 자체만으로 당장에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애초의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복되어야 합니다. 반복이 계속 이루어져야 비로소 변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실천 그 자체도 중요한 하나의 열매입니다. 좋은 열매인 것입니다. 하지만 한해만 열매가 맺고 그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매년 좋은 열매가 맺는 것이 아니라고 해보십시오. 반복되지 않으면 별다른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이일을 하고 저일을 하면서 행동으로 마음의 결심을 나타내었지만 내일은 달라지고 또 모레가 달라진다면 결국에는 원래의 문제상황으로 돌아가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가 필요합니다. 변화가 생길 때에 비로소 문제상황이 사라집니다.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문제상황은 다시 반복됩니다.
요나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에서 복음을 증거한 것은 <실천>입니다. 그는 그 일을 통해 하나님 말씀에 충성하였습니다. 지체하지 않았고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그는 순종하여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니느웨에서의 놀라운 회개운동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그는 <변화>를 이룬 것일까요? 온전히 변화되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대로 다시 요나서 4장이 시작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으로 요나서가 끝이 났다면 요나도 완전히 변화된 사람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그곳에서 <사역>을 했을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단지 회개함으로 끝이 나지 않고 용서해 달라고 심판을 정지해 달라고 부르짖는 것이 전부가 아닌 새로운 변화를 이루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행했던 악독이 사라져야 했고 그런 삶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히 니느웨에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말씀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사역>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전도하고, 양육하며 상담하고 봉사하고 교육하고 훈련시켜야 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요나서가 니느웨의 회개로만 끝이 났다면 우리는 아마 그러한 일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서는 다시 4장으로 이어지고 있었고 그 시작은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는 것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요나는 <사역>을 거부하였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요나는 아직도 <변화>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자연히 사역으로 나아가야 그것이 진정한 변화인데 사역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말을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잘못되었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아직도 변화가 되지 않았다는 것뿐입니다. 좀더 설명하자면 진정한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 할 일이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역>입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리고 꾸준히 하나님의 일을 붙들고 사역을 하고 있으면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지속적이고 영속적인 변화입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그 사역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일하는 곳이지 쉬는 곳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만 하는 곳이 그 나라이고 그 일을 하면서 기쁜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의 해결은 변화의 표현인 사역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는 그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예비하고 완전한 변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단순히 애초에 문제였던 상황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 크고 아름다운 변화를 이루게 됩니다. 그것이 선순환이자 <변화>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죠지 뮬러는 자신의 변화 속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며 고아들을 돌보는 봉사의 사역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와 양육, 교육의 사역을 하였습니다. 존 뉴톤은 목사로서 찬양봉사 사역을 했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부흥사로서 전도와 말씀을 가르치는 교육의 사역을 했습니다. 이 모든 사역 속에서 그들은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회심과 변화는 시작에 불과하였고 그들의 놀라운 열매는 한 두번의 혹은 그 이상의 실천으로 국한되지 않았으며 사역 속에서 그들은 지구상의 하나님의 교회에 커다란 유익과 힘이 되었습니다. 바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역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역을 통해 완전한 변화가 완성됩니다. 그래양 비로소 어려운 상황도 끝이 납니다. 요나는 비록 3장에서 끝나지 않고 4장으로 갔지만 그곳에서는 끝이 났습니다. 사역을 통해 비로소 변화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나가 보여준 놀라운 변화의 과정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변화의 과정은 ‘성경적 변화의 역동성’이라고 하는 성경적 상담학의 중요한 과목입니다. 한 과목을 여러 주간에 걸쳐서 말씀 속에서 함께 살펴본 것입니다. 원래 강의 속에서는 요나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 속에서 적절한 예를 들어서 살펴보기 위해 선택한 것입니다. 이말은 요나 뿐만 아니라는 말입니다. 모든 변화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특히 성경적인 변화는 전부 이런 과정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심리학적 변화나 세상적 변화 혹은 기존의 교회양육구조나 성장과 발전에 관한 교회적인 원리들은 다 어느 단계에서 멈춰섭니다. 그것은 상황이나 악순환이 무엇인지를 분석하는 것, 나쁜 열매를 인식하는 것, 혹은 나쁜 뿌리를 깨닫는 것, 또는 하나님의 은혜와 좋은 뿌리를 이해하는 것, 좋은 열매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리고 변화와 그로 인한 결과를 살펴보는 것 등을 언급합니다. 하지만 어떤 것도 이 모든 것을 이어가지는 않습니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과정이 이해되고 진행되지 않는다면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조금씩 밖에 영향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변화되었는지 그리고 왜 변화했는지 잘 모르게 됩니다. 성경적 변화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이것 다음에 저것, 저것 다음에 이것, 이런 식으로 서로 서로 연결되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성경적 상담학에서의 변화의 역동성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이러한 변화의 역동성을 잘 이해하셔서 누군가의 변화를 돕고자 한다면 그 변화가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저는 이 성경적 상담학을 연구하면서 이것을 평신도로서 누구든지 잘 할 수 있도록 여러가지 도표와 과정들을 만들었습니다. 그것들은 전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로 제가 직접 만든 것입니다. 제가 만들었기 때문에 제가 고치는 것이고 제가 고치기 때문에 더욱 발전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역동성 그림’ 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진‘상담챠트’라는 것입니다.
이 챠트를 통해서 우리는 모든 성경적 상담을 하게 됩니다. 역동성 그림은 이해를 돕는 것이고 실제에서는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실제에서는 필요한 상담주제들이 있고 그 모든 상담주제들은 전부 제가 연구해서 만든 것들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이 주신 방법을 통해서 사람들을 변화시킵시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도 변화됩시다. 이 상담챠트가 계속적인 변화의 지도가 되어서 저와 여러분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변화된 우리들이 지도를 가지고 사람들을 변화로 안내하는 하나님의 변화의 안내자들이 됩시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진실한 마음의 변화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만드는 이 일에 동참하시고 연합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주의 일꾼에게 주시는 그 모든 풍성함을 우리 모두에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32욘 4;1-3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선지자
2009.7.12.주일. 주일오후예배/ 0상담 비전
요나는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앗수르의 수도였던 니느웨 성읍에 대해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그의 삶이었고 해야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싫어했습니다. 그 명령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 다른 곳으로 도망쳤습니다. 그가 처음 도망간 곳은 욥바였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거기서 배를 타고 계속 해서 도망갔습니다. 그의 최종 목적지는 다시스였는데 아마 그는 거기 있으면 하나님이 더이상 자신이 이일을 하도록 부르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