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라사대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우리는 새해 새로운 소망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가지고 있습니다.많은 사람들이 새해계획을 세우며 새해 소망을 말합니다. 우리는 새해 기도제목을 하나님께드렸습니다. 이러한 소망에 대해서 마침내 그 소망을 이룬 한 사람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사람은 소망을 가졌고 그 소망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나아갔으며 마침내 하나님 안에서 그 소망을 이루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디매오’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이 사람에 대해서 마가복음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막10: 46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렀더니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누가복음에서 이 사람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마가복음에는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바디매오는 디매오의 아들이었는데 거지였고 소경이었습니다. 그는하루 하루 동냥으로 먹고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날마다 길가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독립적으로 돈을 벌어 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늘 다른 사람에게의존하면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도 동냥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시선을 갖지 않습니까? 왜 자기 힘으로 살지 못하는가?
그러나 바디매오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고자 해도 살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소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날마다 그렇게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 바디매오에게 하루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많은 무리가 부산하게 지나가는 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그는 그 소리가무슨 소리인지 궁금했습니다.
“35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일이냐고 물은대”
그는 말로만 듣던 예수님이 자기 근처를 지나가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들었던 예수님의 이적은 가히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통해 문둥병자가 나았고 배에 가스가 차서 부어오르는 고창병자가 나았습니다. 귀신들려 허리가 꼬부라진사람이 나았고, 혈루증있던 여자가 나았고, 죽었던 소녀가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한 기적을 일으키신 분이 바로 옆에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디매오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도 있는 그분이 바로 옆에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디매오는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렇게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안에서 가능성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향해 나아가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소망을 붙들고자 합니다. 그래서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소망을 붙들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눈을 뜨고는 있지만 예수님을 쳐다만 보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육신의 눈은 떴으나 영적인 눈은 감긴 자들입니다. 그래서 웅성거리면서 쳐다보기만 했지, 소리를 지르면서 환호하기만 했지, 뭔가 자신만의 특별한 행동을 취한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눈앞에서 자신의 구세주를 놓친 셈입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음속에굳게 결심했습니다. 이제부터 그 예수님께로 나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그는 그 순간적인 결심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는 주님께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그 상황에서 어떻게 주님께 나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사실 암담합니다. 그는 정확한 방향도 모릅니다. 그는 돕는 사람도 없습니다. 누가 예수님인지를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사방이 사람 천지이고 게다가 그는 앞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주님을 찾아 그 주님께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할수 있단 말입니까?
더군다나 사람들은 그가 예수님을 찾으려 한다는 것을 알면 싫어할 것입니다. 그리고 틀림없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고 그분에게로 나아가겠다고 하면 제지할 것입니다. 그렇게 제지를 받으면 결국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생각해 보면 거지이면서 소경이었던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별다른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보통 사람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38절입니다.
“38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그가 선택한 방법은 앉은 자리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는 길이었지만 그는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앉아서 냅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것은예수님을 간절히 만나고 싶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절박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사람들에게 요청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디서들을 지 모르는 예수님 바로 그분에게 간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나를 불쌍히 여기면 내가 그분을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고, 그것은 앞이 안 보이고 사람들의 제지를 받게 될 상황에서 할 수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가 예수님을 부르자 돌아온 것은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부끄러움도 마다한채 간절하고 절박하게 주님을 불렀을 때 돌아온 것은 사람들의 비난이었습니다.
“39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잠잠하라 하되…”
사람들은 시끄럽게 떠드는 바디매오를 꾸짖었습니다. 그를제지시켰습니다. 그는 아무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한낱거지였고 한낱 소경이었습니다. 몸도 성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도 보잘 것 없는 그에게 예수님이 주실 수있는 관심이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사람을 만날 분위기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관심과 초점을 한몸에 받고 있는 유명인 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정도 되면 그만둘 법도 한대, 그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계속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그러한 그의 모습은 그의 절박함을 보여주었습니다. 반대에도비난에도 멸시에도 굴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그가 얼마나 간절하고 열심이 있으며 얼마나 예수님을 사모하는 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이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불렀습니다.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라사대”
이제 비로소 소경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가까이서 만나고 예수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얻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의 질문을 받았습니다.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원하느냐…”
주님은 그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자신을 외쳐 불렀고 사람들의 제지에도 간곡하게 자신을 만나고 싶어하던 그에게 바로 그가 원하던 질문을 해 주셨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원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고생고생을 한 것입니다. 그 원함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런 수고를 애써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가 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 앞에서 그가예수님께 해주기를 원한다고 고백한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어쩌면 그의 절박한 필요는 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거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모를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몸이 아플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가구한것은 오직 눈으로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장 필요한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에게 모든 필요를 다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한가지를 말해야만 했습니다.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시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가장 필요하고 가장 시급하며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말해야 했습니다. 그리고그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누구에게 요구했는가를 보십시오. 그는예수님에게 자신의 눈으로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보기를 원한다고 말한 이유는 예수님이보게 해주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간구를 했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그는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소리를 듣고 그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믿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만나기위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소리를 질렀습니다. 사람들이 못하게 할 때 그는 중단하지 않고 계속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들어주실 줄을 믿고 쉬지 않고중단하지 않고 더 크게 질렀습니다. 그에게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주님께서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했을때, ‘보기를 원하나이다’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말을 듣고 바디매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42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그에게 믿음이란 무엇이었습니까? 그에게 믿음이란 여리고근처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던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믿음이란 앉아 있는곳에서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믿음이란 그것을 제지하는 사람들에 의해 중단되지않고 계속 해서 주님께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믿음이란 자신의 가장 절박한 필요인 ‘보기를 원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믿음은 결코 말로만 하는 믿음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으로 나오는 믿음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그 믿음대로 되게 하셨습니다.
믿음이 있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었기때문에 된 것입니다. 믿는 그 자신의 행동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믿었던 대상인 예수님이 진실로 그를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는 눈이 나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눈이 나았다고말씀하시지 않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중의적인 표현입니다. 삶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눈이 나은 것이고, 영혼의 구원을 받았기때문에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가 눈이 나은 다음에 어떤 삶을 살았는 지를 보십시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그의 삶은 구체적이고 분명했습니다. 믿었기 때문에좇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믿었기 때문에 순종하고 따라는 것이 쉬웠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좇을 때 그것은 주님을 믿기때문입니다. 주님을 믿을 때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럴때 주님은 우리 모두를 믿음이 있는 자, 구원받은 자로 받아주십니다.
여러분은 이 바디매오의 삶 중에서 어디에 해당하십니까? 부디주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분명한 구원자이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고 따르면 반드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 믿음은바로 우리의 소원 속에 들어있습니다. 간구하는 것을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끝까지 따라 나아가서 반드시주님 안에서 소원을 이루십시오.
올 한해를 새롭게 출발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주님을 향해서 나아감으로써 마침내 모두가 주님이 주시는 온전한 구원을 누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여러분의 믿음의 대상이 주님께서 여러분 각자를 결국 긍휼히 여기셨음을 온전히 경험하게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관점적 해석
1. 자신: 당신자신에게 대해서 깨닫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2. 타인: 다른 사람에 대해서 깨닫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3. 하나님: 하나님에대해서 깨닫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4. 사탄: 사탄에대해서 깨닫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41막7; 24-30 은혜를 받는 이유_1
2013.1.13.주. 주일오전. 주제설교-계획
*개요 {5복음서} <3분석> [5은혜]-[6결심]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나 숨길 수 없더라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28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오늘날 기독교가 너무나 기복적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우려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우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처럼 만사형통과 부귀영화만을목표로 하는 종교로 보여진다면 가슴아픈 일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구원을 받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우리의 행복과 편안을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통해 소원을 이루는 것은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의목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간구와 소원을 들으십니다. 그것은 마치 부모님이 자녀의 간구를 들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간구를들으니까 부모님인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시기 때문에 간구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이 중요한 우선 순위의차이가 기독교를 기독교 답게 만듭니다. 우리의 신앙을 자기 중심적으로 만들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만들게합니다.
하나님과의 이러한 온전한 관계속에서 이루어지는 소원과는 다르게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은채로 갖게되는 소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럴때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님을 알지 못합니다. 비록 아무리 주님을 따르고 바라본다 하더라도 진정한관계에서의 주님이 아니라 단순한 소원성취로서의 주님을 볼 때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본문에 나오는 네 가지 장면을 통해서 바로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이 말씀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저 소원성취의 통로로만 생각하려고 할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나타나시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고 또 찾았으나 예수님은 숨고 또 숨으셨던 것입니다. 24절입니다.
“24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나 숨길 수 없더라”
이런 상황이 생기는 것은 예수님은 사람들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숨으십니다. 그 상황에서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오고자하면 할 수록 그들은 자기 목표에 더욱 집착했습니다. 주님은 복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싶었지만 사람들은병만 낫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수로보니게 여인은 좀 달랐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그 여인도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기는 왔지만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과 이야기를 하기 원했고 손을 잡기를 원했지만 그녀는 예수님 앞에서 발 아래엎드렸습니다. 그 여인이 이렇게 발아래 엎드린 것은 단지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습니다. 25절입니다.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녀가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린 것은 예수님께 간절한 소원이 있기도 하였지만,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자각했기 때문도 있습니다. 그녀의 위치는 다른사람들보다 더욱 열악한 상태였습니다. 성경은 이 여인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먼저 그 여인은 헬라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이 아니었던것입니다. 또한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수로보니게족속에 대해서 모르는 상태에서 이러한 장면을 보면 아마 이방인으로서 무척 신분이 낮은 사람이었나보다 생각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사전을 보면 전혀 다릅니다. 수로보니게 족속은 옛 시리아제국을 다스렸던 페니키아 후예로서 귀족 중에서도 귀족입니다. 지체 높고 자긍심 강한 상류층 여인이었던것입니다. 그런 여인이 예수님께 와서 발아래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는 이유는 자신의 딸 때문이었습니다. 딸이 귀신들렸고 그 귀신을 쫓아내어 주기를 원했습니다. 딸만 아니라면이렇게 올 사람이 아니었지만 딸때문에 딸의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 예수님께 머리를 숙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런 행동 만으로도 예수님은 고맙게 생각하고 기특하게 생각해서 그를 도와 주었을지 모릅니다. 아마 우리 같으면 그랬을 것입니다. 이렇게 부유하고 지체높은 가문의어머니가 이렇게 겸손하게 요청하면 저같으면 같이 엎드려서 그 문제를 도와주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이 여전히 예수님을 수단과 도구로만 생각해서 진정한관계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자신의 목표에만 몰입하는 사람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여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계셨지만, 그 속마음을 밖으로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무엇을 더욱 원하시는 분인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누가 들어도 그것은 거부였고, 그것은 모멸스러웠으며, 그것은 인내심의 한계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누가 들어도도저히 단순히 예수님을 도구나 수단으로 생각하는 한 절대로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여인은 여기에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여인은 그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28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인은 개들과 아이들의 관계를 비유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음을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고백했습니다. 은혜를 당당하게 내놓으라는 게 아니라 그 은혜를 비천한 모습으로 구걸하고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자신은 상위에 있는 아이들이아니었습니다. 은혜의 잔칫상에 앉아있는 아이들이 있지만 그것은 자신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은 그 상 아래에 있는 개들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의부스러기라도 얻기를 원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녀는 헬라인이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족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 이순간 만큼은 상 아래있는 개들과 같았습니다. 그래서엎드리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간구하고 있었습니다. 그와 예수님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였고,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상위에 있는 주인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중심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내십니다. 이전부터 알고 계셨으나 이일이 왜 일어나는 지를 알려주셔야 했기때문에 그 이유를 알려주십니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이 말을 하였으니’ 그 여인이 이말을 한 것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녀의 속마음이 다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 진실한마음, 예수님께 대한 무한한 존경과 의지의 마음이 그녀의 이 고백 속에서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단지 엎드리거나 눕거나 앉거나 뛰거나 어떤 포즈를 취한다 하더라도 나타날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의 고백만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믿는 자의 고백은 베드로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요한복음 6장의 한대목입니다.
“요6: 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다른 사람들이 다 떠날 때 베드로에게 주님은 너희도 떠날 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는가를 고백했습니다. 그것이그의 본심이었고 그 말씀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진정한 관계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저희 부부는 우리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묻습니다. 누군가를무척 좋아하고 따른다고 한다면 장난스럽게 묻습니다. ‘너, 그집가서살래?’ 그러면 안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 엄마, 아빠라서 그런다고 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자녀와 관계가 형성된 것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다. 소원을 들어주고 소원을안들어주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진정한 관계가 형성이 되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소원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진정한 가치는 소원에 있지 않고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진정한 관계를 통해 주님의 도우심을 얻은 이 여인의 이후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돌아가라, 귀신이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고 하신 말씀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녀가집에 가서 보니 정말로 귀신이 딸에게서 나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았을까요? 30절을 보십시오.
“30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아이가 침상에 누워있었습니다. 귀신이 나간 상태가되었습니다. 귀신이 들어왔던 상태는 어땠을까요? 잠잠히 침상에누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귀신이 들어가서 그를 조종하고 자극하고 격동시켰기 때문에 그는 이리 저리휘둘렸었습니다. 그러나 그 귀신이 나가고 나니 그 아이는 다시 잠잠해지고 편안히 침상에 누워 있을 수가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결과가 나타나게 된 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그 귀신을 내어쫓았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이 그의 삶에 임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은혜를 얻습니다. 그능력을 힘입게 됩니다. 악한 영을 몰아낼 수 있는 것은 더 큰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집에 들어온 도둑을 물리칠 수 있는 이유는 그 도둑을 붙잡는 경찰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는 이유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올 한해 소원이 있습니까? 간구의 제목이 있습니다. 바라시는 것이 있습니까? 그 기도제목을 가지고 주님과 함께 하십시오. 주님을 심부름꾼 취급하지 마시고, 램프의 요정 대하듯이 하지 마시고, 그분을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십시오. 그분의 은혜 속에 거하기를사모하십시오. 그럴 때 주님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을고백할 때 주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이 말을 하였으니, 내가 너와함께 하겠다’
마음속의 깊은 소원을 가지고 주님과 연합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과 함께 함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악한 습관도 물리치고 세상적인 생각도 버리고 경건함과 온전함 속에서 살아가는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관점적 해석
1. 자신: 당신자신에게 대해서 깨닫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2. 타인: 다른 사람에 대해서 깨닫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3. 하나님: 하나님에대해서 깨닫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4. 사탄: 사탄에대해서 깨닫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43요5; 2-10 삼십팔년된 병자 이야기_1
2013.1.20.주. 주일오전. 주제설교-계획
*개요 {5복음서} <2시점> [2분류]-[5은혜]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들고 걸어 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월이 시작된지 벌써 절반이 지났습니다. 이 희망찬 새해 첫번째 달에 미래에 대한 계획과 소망을가지고 출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무런 계획이나 소망이 없이 한해를 시작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럴때 그런 사람들은 그저 반복적인 삶을 살 뿐입니다. 발전이나 상승보다는 현상유지나 혹은 퇴보에 더 가까운사람들입니다. 비행기가 날아갈 때에 기수를 아래로 내리면서 하늘로 점차 떠올라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늘로 올라가려면 기수를 높이 듭니다. 그와 같이 인생에서 기수를높이지 않고는 그 인생이 발전하는 경우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사실 인간에게는 소망과 계획이 필요한 법이지만 그런 미래에 대한 생각을 준비하지 않는사람들은 점차 낮아지고 있습니다. 소망과 계획을 세웠다 하더라도 어려움이 닥치는데 그런 목표가 아예없다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가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미래를 준비하면서 목표와 소망을 가지려고 합니다.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하고 다가올 홍수를 준비하면서 위험을 피하려고 본능적으로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를모른다는 것입니다. 준비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알겠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그리고 그럴 때 아무 생각없이 무방비한 상태에서 어려움에 닥치게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자신에게 정말 무엇이 필요한지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또한 스스로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잘 모르고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런 사람들이 나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많은 병자와 소경과 절뚝발이와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서 베데스다라는 못의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고있었습니다.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물이 동할 때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 병이 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병이 나을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천사가 그 물에 내려오기 때문이고 가장 먼저 물에 들어오는 자는 하나님의 천사의 능력을 통해 병이 낫는 것이었습니다.
천사가 물에 내려왔을 때 먼저 그 물에 들어가게 되면 병이 나을 수 있는 이유는 그 천사가 하나님의천사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병이 낫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목표가 현재는 어떻게 변질되어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가장먼저 물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애초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병이 낫는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사람의 노력으로물에 들어가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목표가 변질되었고 사람들은 점차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모르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무엇이 되고 말았습니까? 그것은먼저 물에 들어가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주님을 만나고 있는 38년된 병자도 마찬가지의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5절부터 보십시오.
“5 거기 삼십 팔년 된 병자가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병이 벌써 오랜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 병자가 원한 것은 낫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있기만을 바랬을 뿐입니다. 자신을 낫게 하실 수 있는 예수님이 자기를 찾아오셔서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묻고 계시는 그 순간에도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어리석을 때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어떻게 바라보실까요? 주님의 눈으로 이 병자를 바라보십시오. 그 병자는 어리석었습니다. 정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자신은 자신의 상황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오직 자신을 못에 넣어줄 사람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그런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물으십니다. 그 물음이 무색할 정도로 이 병자는 집요하게 원하는 것은 내게필요한 것은 오직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것을 생각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았던 주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은 항상 그들의 진정한 필요에 대해서말씀하셨습니다.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에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너희들이 마시려는 잔은 이미 예정되어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소경 바디매오 에게도 주님은 네 눈이 나았느니라 하시지 않고 ‘네믿음이 너를 구원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수로보니게여인에게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고하셨습니다. 그 모든 말씀들이 단지 예수님 좌우편에 서는 것, 눈이낫는 것, 귀신이 떠나가는 것 이상의 궁극적인 영적인 필요를 채워주시는 말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이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는그것을 주님은 채워주시고 그로 인해서 결국에는 우리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느껴지는 것까지도 채워주십니다.
이제 자신을 못에 넣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이 삼십팔년된 병자에게 주님이 하신말씀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님께서 분명 진정한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기억할 때 그 말씀이 어떻게그 병자의 진정한 필요를 채워주고 있습니까? 8절입니다.
“8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주님은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여기 너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있느니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네 병이 나았느니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지금 단계에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 바로 네 자리를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그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생기면, 그래서 물이 동할 때 빨리 들어갈 수 있으면, 그래서병이 나을 수 있다면, 그 다음에 자리를 들고 집으로 걸어갈 수있게 되겠지만, 주님은 그 모든 중간 과정을 생략하신채 지금 당장 자리를 들고 집으로 걸어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그에게 궁극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삼십팔년된 병자에게도 주님은 그의 궁극적인 필요에 대해서 채워주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님은 가장필요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대한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그러나 그말씀은 우리에게 가장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합니다. 바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여러분은 동의하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나는 앉은뱅이가 아니고, 삼십팔년된 병자도 아니고, 물에 들어가기를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지도 않은데 왜 이 말씀을 나에게 주십니까?라고 의아해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생각해보면 바로 오늘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제 병자의 입장에서 주님의 말씀이 어떻게 들리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는 지금 오랫동안 베데스다 연못에서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언제나 너무 늦게 물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자신보다 늘 건강하고 재빠른 사람들이 물에 먼저 들어갔습니다. 그런 삶은 오래 되어서 이젠 자리를 깔고 앉아있습니다. 아예 주저앉아버린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은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38년이지났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다가오신 예수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었지만,낫고자 한다고 대답하기 보다는 현재의 어려움에 대해서 더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 어려움들이결국은 그 자신의 목표를 다 잊어버리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마음은 있어도 환경이 따라주지 않는다고생각하는 그 절망감이 이제는 낫고 싶다는 생각까지도 잊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그 때 주님은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그에게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9절을보십시오.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그가 나아버린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는 그 순간그는 나았습니다. 이미 자신을 얽어매고 있던 모든 어려움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할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순간 결정해야 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순종하지 않을 것인가입니다. 이 자리에서 정말 그대로 일어나 버리면 그것은 순종하는 것이 됩니다. 또한그 순종은 새로운 문제를 낳게 됩니다. 바로 안식일에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걷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늘 안식일에는 아무도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신대로 일어나게되면, 그리고 자리를 들고 걷게 되면, 몇 발짝 띠는 것과동시에 안식일 규례를 어기게 됩니다. 그런 위험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 속에 있었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생겨나는 많은 크고 작은 마찰 들이 있습니다. 하지만그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주님이 주시는그 온전하게 하심이 더 좋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알지 못했지만 나중에 알게 된 주님이 주신 그 온전한구원이 더 감사하고 기뻤기 때문에 그는 바로 그 순종을 이루어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오던 혹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아오시던 우리는 항상 주님의 말씀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께 나아왔더라도 우리는 주님의 더 궁극적인 채워주심에 대해서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일 때 진정한 충만을 얻게 됩니다. 또한 주님이우리에게 찾아오셨을 때에도 주님은 우리에게 궁극적인 채우심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 말씀에순종할 때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로 나아가거나 혹은 주님이 우리에게로나아오시거나 이점은 동일합니다.
그 순종은 항상 뭔가 희생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38년동안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38년동안 한번도 하려고 한 적이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또한 38년동안 항상 할 수 없었던 일이기도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고 나서 주님은 그것을 하게 하십니다. 새로운능력을 주십니다. 새로운 열심을 주십니다. 새로운 목표를주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것이 어색해서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한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게 됩니다.
그것이 만약 한번도 대든 적이 없는 부모님께 처음으로 자신은 부모님의 뜻을 어기고 교회를 가겠다고말하는 것이라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이 만약 한번도 빠진 적이 없는 제사를 중단하고 주님을 섬기기로 결정하는것이라면 어떻겠습니까? 그것이 만약 한번도 머리를 숙인 적이 없는 교회에 나아가서 머리를 숙이는 것이라면어떻겠습니까? 그것이 만약 한번도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용서해 달라고 말한 적이 없는 가족들에게 바로 그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주님이 이것을 말씀하실 때 이미 그 능력을 주셨습니다. 다만자신이 그 능력을 부인할 때 그 능력은 안나타날 뿐입니다. 다리에 힘은 주어졌으나 지금 일어나면 대혼란을일으킬 것 같아서 그냥 자리에 앉아 있기로 결심한다면 결국은 일어나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은 이미 안정이 되었지만, 화도 전혀 나지않지만, 두렵지도 않지만, 그런 내색을 하면 버릇들까봐, 우습게 여길까봐, 오히려 계속 화를 내는 척을 하고 두려워 하는척을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38년을 그렇게 살았고, 앞으로39년을 향해 나아가는 것 뿐입니다. 악순환의 세월에39년, 40년, 41년을 지속될 것입니다. 오직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은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원망만 하면서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서야 하겠습니다. 38년의악순환은 이제 끝을 내야 하겠습니다. 그 계기는 너무나 놀랍게도 ‘일어나네 자리를 들고 일어서라’는 주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그말씀을 듣는 그 순간 더이상 그럴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고, 병이 나았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그냥 순종하면 됩니다. 일어날 수 있는 대로 일어나고들수 있는대로 자리를 들면 됩니다. 그리고 걸어가면 됩니다. 못하는것이 아닙니다. 못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못한다고 해야만한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 뿐입니다.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일을 이루고 계십니다. 바로 우리들을 통해 주님은 38년된 병을 끝내버리십니다.
이러한 은혜를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이야기가 단순히 몸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님을 깨달을 때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몸과 마음의문제에 대한 이야기일때 우리는 모두 38년된 병자이고, 우리는모두 이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순종하려는 모습입니다. 설사 내게 정말 어떤 병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께 순종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역사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미래를바꾸시는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십시오. 그래서 진정한 필요를 채워주시는주님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그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은혜로 충만하게 되십시오. 그러한 여러분들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관점적 해석
1. 자신: 당신자신에게 대해서 깨닫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2. 타인: 다른 사람에 대해서 깨닫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3. 하나님: 하나님에대해서 깨닫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4. 사탄: 사탄에대해서 깨닫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42눅23; 39-46 간절한 부탁을 들어주시는 주님_1
2013.1.27.주. 주일오전. 주제설교-계획
*개요 {5복음서} <2관점> [4욕구]-[5은혜]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44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찢어지더라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우리는 한달동안 새해의 소망과 기도제목에 관한 말씀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소망이 있는 사람, 간구를 하는 사람, 그것이 올바른 간구이건 혹은 어리석은 간구이건 간에 하나님께 뭔가를 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만나게 된 사람들은 병자, 환자, 귀신들린 사람, 권력욕을 가진 사람 등등 이었습니다. 누군가는 그런 말을 하더군요. 이제 그런 사람들은 좀 그만 보면좋겠다구요. 그런데 죄송하게도 오늘 보고자 하는 사람은 이 모든 구차함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양쪽에 달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의모습 속에서 우리들은 인생의 마지막, 더 달라고 할 것도 없을 것 같은 시간에 예수님과 상관하고 있는자들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때로 배불러서 아무것도 먹고싶어하지 않을 때가 있지만 그러나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배가 고파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환자, 병자, 귀신들린 사람, 그리고 그 가족 등등이 되고 싶어 하지 않지만 세상을 살다보면 어떤 식으로든지 다시 배고프게 됩니다. 다시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외면하려고만 하지 말고 오늘 이시간을통해서 그 결핍과 허기짐과 문제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