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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상담교육] 2012년 1학기 성경공부교재


영혼을 살리는 상담설교
(2012-1)

윤홍식 목사





 
하나님의 은혜

“1계획”

 
49엡 4: 1-6 부르심의 한 소망을 가진 자들_1

2012.1.1.주, 주일오전

*개요: 주제설교 [51계획]  {6서신서} <C분석> [51계획]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아가사 크리스티라는 추리소설작가가 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라는 책에는 각기 초대장을 받고 한 외딴 섬에 방문한 여덟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은 왜 누가 나를 이 섬으로 초대했는가를 알지도 못하고 그저 초대장만을 받고 그 섬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점차 자신이 이 섬에 왜 초대되었는지를 깨달아가게 됩니다. 이 책에서 초대의 목적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초대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심판을 위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을 받으면서 각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한 해의 시작에 1월 1일 첫 날에 교회로 모였습니다. 이곳에는 동일하게 이곳 이 장소로 초대를 받은 다른 성도들이 있습니다. 비슷한 의문을 가지고 우리가 이곳에 왜 모이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누가 우리를 이곳에 부른 것일까요? 그는 왜 우리를 이곳에 부른 것일까요? 우리의 죄를 생각나게 하려고 일까요? 그래서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을 받게 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곳에 모였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방법을 달리 하시면서 우리 각자를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한 교회로 모아주셨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저 부모가 데리고 와서 왔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저 배우자에 의해 끌려왔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저 친구나 이웃의 권함을 받고 왔을 뿐이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그저 궁금해서 내 발로 왔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초대장을 받고 어딘가 초대되어 갔다면, 초대장이 나를 부른 것입니까? 아니지요! 초대장은 결코 누군가를 스스로 초대할 수 없습니다. 초대장은 또한 초대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와 환경도 마련할 수 없습니다. 초대장은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도구일뿐입니다. 여러분을 데리고 왔다고 하는 그 사람은 혹은 그 환경은 그저 초대장일뿐입니다. 이곳에 교회가 서 있는 것 자체도 그냥 초대장일뿐입니다. 여러분을 이끈 사람이 환경이 여러분을 이끈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들과 환경을 통해서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곳에 나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성경 속에서 발견합니다. 사실 성경 전체가 하나의 초대장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그분의 사람들을 통해서 기록하셨고 그 속에는 하나님께서 왜 사람들을 부르셨는지에 대한 이유가 나와있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분명히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느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의 목적은 명확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 목적이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라고 나와있기는 하지만 명확하게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이것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이 구절부터 계속 반복되는 한 단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계속 반복되는 한 단어란 ‘하나’라는 말입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것은 그 다음 구절에도 계속 반복됩니다. 5절을 보십시오.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왜 계속해서 하나이요, 하나이요, 하나이요만 반복하는 것일까요?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일까요? 그 다음 구절이 그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이것이 바로 그 이유였습니다. 하나님은 하나가 되고 싶으신 것입니다. 만유란 이 세상 모든 모든 존재들 혹은 사람들 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만유위에 계십니다. 만유를 통일하십니다. 만유 가운데 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 위에 계시는 것이고 우리를 통일하시고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이 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바로 이것을 위해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또한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1절 말씀에는 이를 이룰 수 있는 중요한 방법이 나오고 있습니다.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그것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 부름을 다른 말로 하면 ‘목적, 목표, 소명, 비전’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소명과 비전에 합당하게 살다보면, 또는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다보면 우리는 주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있고 또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비유하면 좋을까요? 응원을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거리응원과 TV응원, 그리고 경기장 응원 등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함께 동일한 팀을 응원할 때에 응원하는 사람들은 전부 하나가 됩니다. 반대로 다른 팀을 응원하는 사람과는 둘이 됩니다. 또한 응원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갈립니다. 오직 같은 편을 응원하는 사람들과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저의 고등학교 시절 학교 축구부가 전국대회 4강에 나간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며칠 동안 열심히 연습을 하고 효창운동장에서 4강 대회에 참여해서 응원을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4강에서 지고 말았습니다. 비록 시합에서는 졌지만 우리 팀이 이기기를 응원했을 때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대학 시절 연례행사로 라이벌 대학과 체육대회를 하는데 이때에도 응원연습을 하면서 또한 경기장에 가서 응원하면서 학교 학생들은 전부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졸업후 우리나라가 국제경기에 참여할 때 우리나라가 이기기를 TV를 보면서 응원할 때에 역시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재미있기도 합니다. 내가 경기를 보면 진다는 징크스를 만들어서 억지로 보지 않으면서 이기기를 원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사실 그 모든 것이 한 팀을 응원하고 있고 동일한 목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럴 때 정말 하나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올해 주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주 안에서 우리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도 원하고 우리도 원하는 그 목표를 이루고자 할 때 주님과 우리가 하나가 됩니다. 그 목표를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이유인 것입니다.
그렇게 목표를 위해 노력하면서 하나가 되려고 할 때 지켜야 할 일이 있습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기 위해서 노력할 때 해야하는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을 지키지 않으면 목표가 동일했었더라도 온전히 하나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2,3절을 읽어봅니다.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자,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겸손과 온유로 오래 참음으로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목표가 동일했었더라도 그 모든 노력의 시간들이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들로 변해버립니다.
예를 들어, 응원연습을 하는데 가혹하게 시킨다고 해 보십시오. 매질과 기합으로 응원을 하게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응원이 흥겨울 까요? 응원을 통해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니오! 오히려 더욱 갈라질 것입니다. 응원이 아니라 더욱 야유와 혐오로 변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용하시는 방법을 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해야 하고 온유해야 합니다. 오래 참아야 합니다. 서로 용납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목표를 이루게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크면 다 하나가 되는 것일까요? 그 큰 교회가 하나님과 하나입니까? 그들이 서로 하나가 되었습니까? 교회가 작으면 하나가 되는 것일까요? 그 작은 교회가 하나님과 하나입니까? 그들이 서로 하나가 되었습니까? 아니라는 것을 잘 알지 않습니까? 그것을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만들어가야 하는 교회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의 목표를 가지십시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합시다. 그래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을 이룹시다. 그럴 때 우리가 받은 초대는 너무나 귀한 것이 되고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 되며 너무나 감사한 것이 될 것입니다.
올 한해 동일한 목표로 비전으로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가시는 우리 신형교회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묵상: 당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인도하심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창37: 5-11 나의 꿈, 하나님의 꿈

2012. 1. 8. 주, 주일오전

*개요: 주제설교 [51계획]  {1오경} <A적용> [4욕구]-[5은혜]

  5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10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11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우리는 올해 교회의 설립목표에 따른 구체적인 비전을 세우고 그 비전에 더욱 집중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교회의 4대 비전을 말씀드렸고 이 4대 비전을 이루는 일에 더욱 하나가 되어서 함께 주의 일을 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교회의 설립목표는 신앙과 삶의 변화를 이루는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4대 비전은 ‘전도, 성경, 상담, 영어’입니다. 특별히 전도와 성경은 신앙의 변화를 이루기 위한 비전이고 상담과 영어는 삶의 변화를 이루기 위한 비전입니다. 전도와 성경이 신앙의 변화를 이루기 위한 비전이라는 것에는 다 공감을 하실 것입니다. 또한 상담과 영어도 그것이 삶의 변화를 이루기 위해 필요하다는 점에 있어서도 역시 공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분들은 상담은 상담소에서 하면 되고, 영어는 학원에서 하면 되지 왜 교회가 상담과 영어를 비전으로 삼느냐고 의문을 가지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역사 속에서 볼 때 외국 선교사님들이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력은 단지 신앙의 변화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외국 선교사님들은 우리나라에서 오직 전도하는 것과 성경을 가르치는 일만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의사로서 의술을 가르쳤으며 외국인으로서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또한 교육의 전반적인 분야에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눈을 띄워주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상담과 영어는 교회가 맡아서 감당한다면 일반 상담소나 학원에서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열매를 얻게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비전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노력 속에는 두 가지 종류의 꿈이 있습니다. 또한 모든 비전에 대한 고민과 노력이 이러한 종류가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꿈과 하나님의 꿈입니다. 어떤 비전이든지 그것인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나의 꿈입니다. 그것만 이루어지면 그 비전은 성취된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꿈은 이와는 다릅니다.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계속 이어집니다. 끝이 없이 이어집니다. 나 자신의 꿈의 한계를 넘어서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비전의 사람 요셉에게서 그가 두 가지 꿈을 다 이루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는 어떻게 그 자신의 꿈과 하나님의 꿈을 모두 이룰 수 있었는가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요셉이 비전의 사람으로 유명한 이유는 그가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성경인물도 요셉과 같이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게 되는 사람의 예는 흔치 않습니다. 어렸을 때 요셉이 꾼 꿈은 두 가지 였습니다. 7절 말씀을 보십시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이것이 첫 번째 꿈이었고 이어서 며칠 후 또다시 꿈을 꾸었습니다. 9절입니다.
“9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이 꿈을 꾸고 이 꿈을 형제들에게 말함으로 인해서 요셉은 위로 열한 명의 형들에게서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다들 배다른 형제들이었기 때문에 어린 요셉에게 아버지, 어머니와 자기들이 절을 한다는 꿈의 내용은 결코 기분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질투와 시기심으로 인해서 요셉은 형제들에게 결박당한 뒤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고, 그곳에서 종으로 살면서 모진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요셉은 애굽의 왕이었던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는 애굽을 다스리는 총리가 되었고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바로의 꿈에는 애굽 인근 지역에 임하는 일곱해 풍년과 일곱해 흉년에 대한 예언이 나타났는데 정말 그대로 일곱해 풍년 이후에 일곱해 흉년이 임하게 되었고 애굽은 물론이고 인근 지역사람들까지도 먹을 것이 없어서 애굽으로 곡식을 사기 위해 찾아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과거 요셉을 팔았던 형들이 먹을 것을 사기 위해 애굽에 왔을 때 총리였던 요셉은 비로소 자신의 꿈이 이루어진 것을 깨달았습니다. 꿈대로 형들과 부모가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며 곡식을 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으로 요셉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면 그럭저럭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되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셉의 비전을 여기까지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꿈을 이루는 사람으로 말이지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요셉의 비전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말합니다. ‘꿈은 이루어진다!’ ‘나도 열심히 노력해서 꿈을 이루어야지!’ ‘하나님, 내꿈을 이루어주십시오!’

정말 어떤 때에 그들은 그 꿈을 이루기도 합니다. 원하는 학교에 입학하기도 하고 원하는 직장에 취직하기도 합니다. 멋진 배우자와 결혼하기도 하고 좋은 집에 살며 좋은 차를 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전부 자기의 꿈에 불과합니다. 그런 사람은 결국 고생해서 자신의 원하는 것을 이룬 지극히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사람 이외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비전의 사람 요셉은 그저 자기 자신의 꿈만을 이룬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의 꿈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어떤 하나님의 꿈을 이루었던 것일까요? 그에 대한 하나님의 꿈이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요셉이 보았던 첫 번째 꿈의 내용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는 두 번의 꿈을 꾸었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의 꿈이고 두 번째는 자신의 꿈이었습니다.
“7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비록 두 번째는 눈에 보이는 대로 구체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그에게 첫 번째 꿈의 내용은 모호했습니다. 과연 그가 본 자기가 묶은 단은 일어서고 형제들의 단은 그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라는 것이 무슨 의미였을까요?
요셉은 그 꿈의 의미를 나중에서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았을때 그는 고백했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로 한 것이지요. 그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자 했을 때 왜 자신의 꿈도 이루어졌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꿈을 이루었을 때에 그는 진정한 비전의 사람이 되었고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 모범적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가 이룬 하나님의 꿈의 내용을 들어보십시오.
“창45:9 당신들은 속히 아버지께로 올라가서 고하기를 아버지의 아들 요셉의 말에 하나님이 나를 애굽 전국의 주로 세우셨으니 내게로 지체말고 내려오사 10 아버지의 아들들과 아버지의 손자들과 아버지의 양과 소와 모든 소유가 고센 땅에 있어서 나와 가깝게 하소서 11 흉년이 아직 다섯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속과 아버지의 모든 소속이 결핍할까 하나이다 하더라 하소서”

하나님의 꿈은 요셉이 세운 단으로 인해 모두가 먹고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냥 요셉만 잘 되고 애굽총리로 거들먹거리고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아버지 야곱과 어머니들과 그 온 형제와 가족이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요셉은 그 하나님의 꿈을 깨달았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그 온 가족을 위해 살아가는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꿈도 이와 같습니다. 나 혼자만 잘 살고 나 혼자만 넉넉하고 나 혼자만 평안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꿈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쩌면 나의 꿈일 수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정말 그런 꿈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나만의 꿈은 있으나 마나 한 꿈입니다. 욕심을 위해 살았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살았고 그러다가 언젠가는 죽는 허망한 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꿈을 바라본다면 나의 꿈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학교에 합격하면 그 학교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내가 직장에 취직하면 그 직장에 다니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내가 가정을 시작하게 되면 나의 가정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꿈이었고 자신만의 꿈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국의 뉴잉글랜드라는 곳에서 한 동네에 같이 자란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신앙적인 여인과 결혼해서 신혼 초기부터 철저하게 기독교적 원리에 입각해서 그리스도인의 가정을 형성해 갔습니다. 그리고 어떤 학자가 이 사람의 가계를 추적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오늘날까지 617명의 후손을 두었는데 대학의 총장을 지냈던 사람이 12명, 교수가 75명, 의사가 60명, 성직자가 100명, 군대 장교가 75명, 저술가가 80명, 변호사가 100 명, 판사가 30명, 공무원이 80명, 하원의원이 3명, 상원의원이 1명, 미국 의 부통령을 1명 배출했습니다.

 같은 때에 뉴잉글랜드에서 그와 같이 자란 동네 친구였던 다른 한 사람은 신앙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방탕했던 여인과 결합하여 나중에 자신도 신앙을 저버려 그의 사람됨이 점차 잘못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후손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1292명의 후손을 두었는데 유아로 사망한 사람이 309명, 직업적인 거지가 310명, 불구자가 440명, 매춘부가 50명, 도둑이60명, 살인자가 70명,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이 53명이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의 이름은 조나단 에드워즈였습니다. 미국 초기 청교도 역사 속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위대한 신앙인이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맥스 쥬크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비전을 가지고 살 때에 이 세상에서 열매를 맺으며 결실을 거두며 보람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전이 자기 자신의 비전이라면 열매를 거둔다 하더라도 자기만의 별볼일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비전이 하나님의 비전이라면 하나님의 꿈이라면 그것은 놀라운 열매를 거두게 할 것입니다. 나의 거두어들인 단으로 다른 사람들에 도움을 주려고 할 때 그 유익은 놀랍게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러한 비전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나만의 신앙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신앙으로, 나만의 성경이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성경이해로, 나만의 마음의 평안함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마음의 평안함으로, 나만의 영어실력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영어실력으로 더 퍼져나가기를 원합니다.
이일에 여러분 모두가 함께 동참하시기를 원합니다. 이 비전을 함께 이루어가면서 우리가 하나가 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서 의미있고 가치있고 보람된 사람을 함께 살아나가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묵상: 하나님은 당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꿈은 무엇이며,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창39: 14-23 비전의 시작, 비전의 성취  

2012.1.15.주, 주일오전

*개요: 주제설교 [51계획]  {1오경} <A적용> [2분류]-[3감정]

  14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도다 그가 나를 겁간코자 내게로 들어오기로 내가 크게 소리질렀더니
  15 그가 나의 소리질러 부름을 듣고 그 옷을 내게 버려 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16 그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17 이 말로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코자 내게로 들어왔기로
  18 내가 소리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 옷을 내게 버려 두고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19 주인이 그 아내가 자기에게 고하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비전을 이루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비전이란 다시 말해서 각 개인이 원하는 꿈인데, 그런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 이런 꿈이 있습니다. 거창하게 비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소박하게 작은 소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꿈의 크기가 크건 작건 간에 누구에게나 다 꿈이 있고 소원이 있습니다. 커서 아빠가 되겠다고 말하는 소년의 꿈이나 아니면 커서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하는 소년의 꿈이나 크기와 의미의 차이가 있을 뿐 꿈의 성질에서는 다 동일한 것입니다.

이러한 비전, 꿈, 소원에 대해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꿈을 이루는 것으로 중단하지 말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자들이 되자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꿈을 통해서 영원토록 이어지는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가자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꿈의 성취는 언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꿈의 성취라고 했을 때 그 꿈은 언제 이루어진 것일까요?

요셉의 경우도 생각해 봅시다. 그는 언제 그 꿈을 이룬 것일까요? 그가 총리가 되었을 때 꿈을 이룬 것일까요? 아니면 총리가 된 다음에 가족들을 애굽으로 데리고 오리고 했을 때 이루어진 것일까요? 물론 그런 일들 속에서 요셉의 마음과 그의 생각이 어떠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언제부터 그렇게 하나님의 꿈을 이룰 생각을 하였을까요? 원래 요셉은 그런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말입니다.

원래 요셉이 어떠한 자였는가를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변화 되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원래 요셉의 본성과 어릴적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37:2 야곱의 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 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여기서 야곱의 약전이라는 말은 그의 시대 혹은 그의 자녀들의 전기가 이러하다는 말입니다.  그속에서 요셉은 다른 형제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라헬의 아들로서 동생 베냐민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라헬은 일찌기 동생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고 에브랏에 묻혔습니다. 죽은 아내에 대한 연민인지 요셉은 다른 형제들보다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없이 배 다른 형제들 밑에서 요셉은 동생 베냐민과 함께 외롭게 힘을 다해 살아가는 자였고, 그러다 보니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그의 모습은 시기와 미움을 불러 일으키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요셉이 완전히 변화된 것은 그가 애굽에 종으로 끌려간 뒤에 보디발의 집에서 시종이 되어 살아갈 때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 속에서 그의 비전과 꿈이 형성되는 중요한 계기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주인이었던 보디발의 아내가 시종이었던 그를 성적으로 유혹하였던 일입니다. 이것은 요셉에게 최대의 시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반드시 넘어가야만 하는 시험이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여주인의 요구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바로 그가 비전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고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많은 경우 꿈과 비전을 세워서 노력합니다. 하지만 역시 많은 경우 그 꿈을 이루는데 실패합니다. 꿈이 크면 클수록, 비전이 높으면 높을 수록 시험과 난관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험과 난관의 종류로 경험하는 것은 물질의 유혹과 안락의 유혹과 성의 유혹이 있습니다. 가장 은밀하면서도 가장 쉽게 다가오는 이러한 유혹들로 인해 우리가 넘어질 때 비전은 사라지고 꿈도 사라지고 물질의 노예와 안락함의 노예와 성욕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유혹은 나이를 따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욕구의 노예가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공자가 말했던 지학(15), 이립(30), 불혹(40), 지천명(50), 이순(60), 종심(70)은 공자는 그랬을지 몰라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당했던 유혹도 매우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유혹을 이겨내었습니다. 그가 그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는 여주인이 이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9절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 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상황을 조금 다르게 해석하면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금한 것이 없지만 금한 것이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때로는 남의 아내, 남의 남편, 남의 물건, 남의 소유 등이 금하여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우리가 못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에 근거한 우상숭배, 살인, 불효, 이혼, 간음, 뇌물, 도적질 등등이 우리가 해서는 안되는 일이고 그런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께 죄를 짓게 되지 않으려고 우리도 몸부림칩니다.

결국 요셉은 그 유혹을 이겨내었습니다. 그는 옷을 잡고 끌어 당기는 여주인에게 옷을 버려두고 도망해버렸습니다. 그는 이로써 자신의 꿈을 지켰습니다. 자신의 비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냥 눈 한번 딱 감고 이 죄를 져버리자고 했으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더이상 비전을 이룰 힘을 잃어버렸을 텐데 그는 하나님 앞에 성실했고 죄를 짓지 않았으며 꿈을 이루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개인적인 죄를 짓지 않은 것은 성결한 삶을 살아간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주님 앞에서 죄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이룬 것이지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원대한 꿈을 이루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요셉이 정말 하나님의 꿈을 이룬 것은 그 다음에 나타납니다. 그것은 그 여주인이 자기를 억울하게 고발하였을 때 일어납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17 이 말로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코자 내게로 들어 왔기로 18 내가 소리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보십시오. 적반하장으로 그 여주인은 도리어 요셉을 범인으로 몰아붙이고 그를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자신이 그 모든 일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 때 요셉은 사실대로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자신이 그런 것이 아니라 여주인이 그런 것이라고 따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묵묵히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일로 인해 그는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에 갇혔습니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는 누군가를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억울함과 자신의 비통함과 자신의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더 위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보다 다른 사람의 상황과 형편을 더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원래 남의 잘못을 고자질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본인은 똑똑하고 실력이 있어도 그로 인해서 미움과 질투를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변했습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유익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자기의 것을 잃어버려도 말입니다. 그가 누굴까요? 요셉이 보호하였고 지켜주었던 그 사람은 누굴까요? 그는 바로 자기가 섬기던 보디발 장군입니다. 비록 보디발 장군은 화를 내면서 요셉을 옥에 넣었지만 요셉은 바로 그를 위해서 희생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은 이런 것입니다. 그런 희생적인 마음이 하나님의 소원, 하나님의 꿈과 일치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도 이 세상을 위해서 자기 아들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하나님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시고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시고 그로 인해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 아들은 세상의 죄로 인해 죽으셨지만 그로 인해 살아날 사람들을 생각하시면서 무한한 희생을 하셨습니다. 그러셨던 하나님의 꿈이 바로 요셉의 꿈이 되었습니다. 요셉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버리고 희생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요셉을 사랑하셨습니다. 자신과 꿈과 소원이 동일해진 요셉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20절 하반절부터 보십시오.
“20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게 하셨더라”
바로 그 감옥에서 요셉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온전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비전에 대해서, 꿈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나 허황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노력만 하면, 나만 열심히 하면, 조건없이 꿈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냥 앉아서 꿈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할 때만이 그 꿈이 이루어집니다. 앞으로 꿈이 이루어질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 현재 그 꿈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할 수 있습니다.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를 다 아실 것입니다. 흥부의 박씨로 인한 성공담을 들은 놀부는 자기도 그 박씨를 가져보겠다고 멀쩡한 제비다리를 부러뜨리고 고쳐줍니다. 박씨를 얻기는 하지만 그 박씨에는 도깨비가 들어있어서 박이 터지자 튀어나와서는 놀부 부부를 흠씬 두들겨 주었다는 것입니다. 박씨의 획득이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됐건 박씨만 얻으면 된다는 마음은 놀부심보일 뿐입니다. 진정으로 마음이 변화되지 않고서는 나의 꿈도, 하나님의 꿈도 이룰 수 없습니다. 그 비전의 시작은 바로 나의 희생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섬김으로 비롯됩니다.

사랑의 철가방으로 유명한 짜장면집 주인인 박권용씨는 처음 짜장면 기술을 배울 때 물만 떠오고 청소만 해야 해서 처음엔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자신이 짜장면집을 차리면 그 때에도 물을 떠오고 청소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열심히 그 일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양파만 깎고 식재료만 다듬을 때에도 역시 그랬습니다. 결국 기술을 가르쳐주던 사장님의 마음에 들어서 모든 기술을 전수받고 그로 인해서 최고의 짜장면을 만드는 방법을 터득했다고 합니다. 더욱 훌륭한 것은 그렇게 배운 짜장면집 기술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비전과 하나님의 비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꿈을 이루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꿈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까? 진정으로 우리가 희생하고 헌신하는 길 만이 우리가 우리의 꿈도 이루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방법입니다. 이를 위해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조금만 줄이고 내가 해야 하는 것을 더 늘여 봅시다. 또한 나만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다른 사람을 섬기며 배려하고 그를 위해 줍시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대상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내 가족이 그 대상이며, 우리 교회성도들이 그 대상입니다. 그것이 잘 되면 학교로, 회사로, 사회로 더욱 확장될 수 있을 것입니다.

비전의 시작은 바로 지금부터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더욱 절제하면서 하나님의 꿈을 향해 나아갈 때 하나님을 섬기며 다른 사람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비전의 시작임을 기억하면서 그러한 비전의 성취를 함께 만들어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묵상: 내가 지금 바라보아야 하는 내 자신의 꿈보다 더 먼저 바라보아야 하는 하나님의 비전은 무엇이며 그 비전을 향해 나아가면 어떻게 자신의 비전도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2출3: 7-12 내가 누구관대 이스라엘을 인도하리이까_1

2012.1.22.주. 주일오전

*개요: 주제설교 [51계획]  {1오경} <A적용> [7실천]-[8사역]

 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8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9 이제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꿈과 비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꿈과 하나님의 꿈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꿈을 이룰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이루는 것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비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긍정적인 반응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인 반응입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이 일에 동의하며 눈이 반짝 반짝 하는 사람들이지만 다른 한 부류는 하나님의 꿈을 위해 노력하는 일에 별로 내켜하지 않고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입니다. 연령과 학력과 지역과 성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꿈과 비전에 대해서 동의하거나 부정하는 두 가지 태도를 취합니다.

하나님의 꿈과 비전에 동의를 하는 것은 그로 인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소망이 있기 때문에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부정하는 태도입니다. 이렇게 여기에 대해서 부정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삶에 대해서 의심과 절망과 거부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꿈과 비전이라는 용어 자체가 변화되고 발전된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지만 어쩌면 현재가 너무나 고단하고 괴로운 사람들에게는 그런 미래를 보는 것조차 힘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새로운 꿈, 소망 등등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로 가당치도 않은 일이 되어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삶에 안주하고 만족해 하는 사람들에게도 역시 꿈과 비전은 부담스러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현재가 만족하고 더 큰 변화를 바라지 않는데 꿈과 비전이 이루어질 수 있는  미래에 대한 노력이나 애씀은 그리 내키지 않는 일이 되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꿈과 비전을 거부할 때 삶은 아무런 변화없이 흘러가고 현재의 모든 모습은 나빠지면 나빠졌지 결코 좋아지지 않는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보통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자기 자신의 꿈과 비전을 갖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인데 하물며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갖는 것은 얼마나 더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성경말씀은 다릅니다. 자신의 꿈과 비전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가지면  오히려 자신의 꿈과 비전도 이루어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고 하십니다. 그 구체적인 예는 바로 하나님의 꿈과 비전으로 부르심을 받았던 모세에게서 나타납니다.
 
이 당시 모세는 애굽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도망쳐 나와서 광야에서 양떼를 치고 있었습니다. 그가 왜 애굽에서 도망쳐 나와야 했는가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조금 거슬러서 그의 인생을 보아야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사람이었지만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입양되었습니다. 그후에 모세는 바로의 자녀로 자랐고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받는 학대와 고통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을 치는 장면을 목격하였고 격분한 나머지 그 애굽 사람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그 일이 탄로나서 그는 애굽을 떠나 광야에서 도망쳐 살게 되었고 그 때 나이가 40세였습니다. 그 후에 그는 그곳에서 만난 십브라라는 여인과 결혼한 후에 그 장인의 양떼를 맡아서 치면서 지냈습니다.   

시간은 흘러 그의 나이가 80세가 되었고, 하루는 그가 양떼를 이끌고 호렙산에 이르렀을 때에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비전을 주신 것입니다. 그 비전의 내용이 10절에 나타납니다.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꿈과 비전을 모세에게 말씀하셨을 때 모세의 반응은 부정적인 것이었습니다. 11절에 그의 대답이 나타납니다.
“11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이러한 모세의 거부는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4장 10절, 13절에 이어지는 그의 거부가 나옵니다.
“4:10 모세가 여호와게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4:13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그는 전형적으로 꿈과 비전에 부정적인 사람이었고 특히나 하나님의 꿈과 비전에는 더욱 절망적이었습니다. 그가 신속하게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미 사람을 한 사람 죽였고 도망자의 몸으로 살고 있었고 하루 하루 양떼를 돌보느라 정신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현재는 너무나 비참했고 암울했으며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받아들이기에는 그의 상태가 너무 부족했었습니다.

이런 설명이 너무 부정적이었나요? 그렇다면, 그의 삶을 좀더 긍정적으로 바라봅시다. 그는 나름 보람있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양떼를 키우는 것도 재미가 있었고 아내와 결혼해서 살아가는 것도 즐거웠습니다. 이미 금쪽같은 아들도 낳아서 키우고 있었고 지금은 양떼를 몰아서 새로운 목초지인 호렙산까지 진출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은 그것을 다 버리고 애굽으로 돌아가서 지도자 노릇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감당하기에는 현재는 너무나 편안하고 안락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꿈과 비전은 그의 꿈과 비전과 충돌되고 있었습니다. 그의 꿈이 부정적으로는 그저 하루 하루 먹고 사는 것이고 어떻게 해서든지 삶을 버텨나가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긍정적으로는 그의 꿈과 비전은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안정된 기반과 화목하고 행복한 삶을 계속 영위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것은 정확히 하나님의 꿈과 비전에 충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꿈과 비전이란 결국 그 자신의 꿈과 비전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의 꿈과 비전을 이루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꿈과 비전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지금 그의 소원과 소망을 내려 놓으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갈등 때문에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포기하고 외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을 이루기 보다는 그냥 자신의 원하는 것을 이루며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래서 모세도 그렇게 하나님의 꿈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거기에서 그냥 포기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비전을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거부하고 기피하던 모세를 끈질기게 설득하시고 설득하셔서 마침내 모세가 하나님의 꿈을 따라서 애굽으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세를 포기하지 않고 그가 하나님의 꿈을 받아들이도록 붙드신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전에 그가 학대받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안타까워할 때에는 지도자로 부르지 않으시고 이제서야 지도자가 되라고 부르시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모세가 자기의 꿈을 버리고 하나님의 꿈을 따르고자 했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비전을 이룰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었을 때에는 아직 제대로된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급하였고 분노가 많았으며 자기의 의지가 너무 강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굽 사람도 때려서 죽이게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때에는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에는 너무나 자신의 꿈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도망자의 삶을 살고 나름 정착하여서 양떼를 키우고 있었을 때 주님이 그를 부르셨던 때에는 그가 자신의 꿈을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꿈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그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꿈을 버리면서 희생하며 헌신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가 혈기 왕성할 때 그를 부르시지 않았고, 그가 혈기가 다 빠져나가서 자신의 소박한 일에 안주하고 있을 때에 그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박한 일조차도 버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그럴 때만이 하나님의 일을 제일 잘 할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에 모세를 설득하셨고 마침내 그가 자신의 일을 버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선택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모세는 그 이후에 하나님의 일을 너무나 잘 해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게 되면서 비로소 하나님이 하라는 일을 그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면서 장정만 60만이 되는 거대한 이스라엘 민족을 서슬이 퍼런 바로에게서 빼내어 애굽에서 나오는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현재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볼 때에도 동일한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꿈과 소망이 더 중요해 보이고 그것이 더 시급해 보이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더 우선시하라고 하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꿈과 비전은 그렇게 자신의 꿈과 비전을 버리고 나아오는 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성급하게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이루기를 원하는 자들을 통해서 그 일을 이루시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꿈과 하나님의 꿈이 동일하다고 생각할 때에는 하나님은 좀 기다리십니다. 내버려 두시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그가 자신의 꿈과 하나님의 꿈의 차이를 깨달았을 때 하나님은 부르십니다. 자신의 꿈을 버리고 하나님의 꿈을 붙들라고 하십니다. 그 때의 희생과 헌신 속에서 비로소 그는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렇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우리 자신의 꿈과 비전은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요? 우리가 우리의 꿈과 비전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붙들게 되면 우리 자신의 꿈과 비전은 정말 물거품이 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비전을 붙들 때 우리의 비전도 함께 성취되게 됩니다. 더 완전하게 성취되어집니다. 모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비전은 무엇이었습니까? 3장 1절을 보십시오.
“3:1 모세가 그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무리를 치더니 그 무리를 광야 서편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이것이 그가 하고자 했던 일이었는데 하나님의 꿈을 따르게 되면서 이 개인적인 꿈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보십시오. 12절입니다.
“12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그의 꿈은 양이 아니라 사람들을 데리고 호렙산에 서게 됨으로써 온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루었던 하나님의 꿈은 사실 바로 자기 자신의 꿈이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장막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자가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장막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서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온전한 꿈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베드로도 원래 고기를 낚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꿈을 위해 나아갔을 때 그는 사람을 낚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누가는 원래 직업이 병을 고치는 의사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복음을 붙들었을 때 영혼을 고치고 살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꿈을 버리고 하나님의 꿈을 이루고자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짐과 함께 우리의 꿈도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의 꿈도 하나님의 꿈을 먼저 이루고자 할 때 그 속에서 성취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꿈을 붙드시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여러분의 꿈을 잠시 내려놓고 하나님을 먼저 우선 순위로 두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루고자 노력하십시오. 그러한 희생과 헌신 속에서 여러분은 충성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온유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절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비로소 여러분 자신의 꿈도 이루게 만들 것입니다.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이 다가왔습니다. 여러 사람들, 친지와 가족들을 만나면서 어쩌면 여러분들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은 여러분 자신의 꿈을 확인할 지도 모릅니다. 또는 이미 이룬 꿈을 만끽할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깨닫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의 꿈을 생각해 보십시오. 명절은 그저 지나갈 뿐이지만 하나님의 꿈을 깨닫는다면 그리고 그 꿈이 이루어지기를 정말로 바라고 나의 꿈을 포기할 수 있다면 그 희생과 헌신 속에서 하나님의 꿈은 놀랍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음으로 나와 내 가족이 구원을 받게 하시리라는 하나님의 꿈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복음화되고 우리 가족이 복음화되고 우리 친척이 복음화되는 놀라운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이 바로 하나님의 꿈을 따라나서기로 결단할 때에 여러분의 삶 속에 아름답게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묵상: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비전은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포기해야 하는 자신의 비전은 무엇인가요?  
 









6수1: 6-11 하나님의 비전과 함께 하라_1

2012.1.29.주, 주일오전

*개요: 주제설교 [51계획] {2역사서} <B관점> [6결심]-[7실천]

  6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10 이에 여호수아가 백성의 유사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11 진중에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예비하라 삼 일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얻게 하시는 땅을 얻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 하라

여러분 혹시 마틴 루터 킹 목사님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분은 인종차별이 심했던 미국 사회에서 50,60년대 인권운동을 주도하고 복음의 사회적인 책임을 강조하면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던 현대사의 유명한 인물입니다. 그는 ‘나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통해 미국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정표를 남겼습니다. 그는 단지 연설만 멋있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꿈을 위해서 살았고 그 꿈을 위해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기려서 미국은 지금도 그의 생일(1월 15일)에 가장 가까운 1월 세번째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 2세의 날로 명명하고 공휴일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꿈은 놀랍게도 온 나라를 온전히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이러한 꿈은 자기 자신의 꿈과 비교조차 되지 않습니다. 내가 잘 되는 것, 내가 높아지는 것, 내가 편안한 것, 이런 꿈은 자신의 꿈입니다. 그 꿈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 꿈은 결코 나눌 수도 없습니다. 말하기도 부끄러운 꿈입니다. 그냥 혼자서만 간직하고 있다가 혼자서만 누리는 꿈입니다. 그리고 그가 사라짐과 함께 사라지는 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꿈은 다릅니다. 그 꿈 속에는 여러 사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함께 꿈을 꿀 수 있습니다. 그 꿈을 꾸는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 커집니다. 그 꿈을 꾸는 사람마다 그 꿈으로 인해서 유익을 누리고 혜택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 꿈에는 더 많은 사람이 동참하고 마침내 한 나라가 다 동참하기도 합니다. 미국이 그랬듯이 말입니다. 그런 꿈을 누가 가질 수 있을까요? 한 개인만 꾸는 꿈이 아닌, 한 가정만 꾸는 꿈이 아닌, 한 동네만 꾸는 꿈이 아닌, 한 지역만 꾸는 꿈이 아닌, 한 나라가 꾸는 꿈, 한 민족이 꾸는 꿈, 그런 꿈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그렇게 거대한 꿈은 오직 하나님 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만이 가장 정직하고 가장 올바르고 가장 진실하게 거대한 꿈을 갖게 하시며 그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오늘 성경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그런 꿈을 주시는 것이 나타납니다. 6절 말씀입니다.
“6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바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온 이스라엘 민족이 누릴 수 있는 원대한 꿈을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여호수아 에게처럼 우리들에게도 놀라운 꿈을 주고 계십니다. 그 꿈을 품고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 꿈은 우리의 생각을 넓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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