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성경연구] 창세기 성경공부<주일오후-10.23>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창조하심의 능력과 권능은 이후의 모든 다른 창조와 섭리와 심판의 충분한 가능성을 알게 합니다. 우리가 그 창조를 온전히 받아들일 때에 지금도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르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1. 천지창조의 순간과 그 놀라움 2.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신비 3. 창조에 숨겨져 있는 섭리와 다스리심 4. 하나님 만이 가지시는 심판의 권한
성경말씀의 가장 첫 시작은 천지를 창조하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은 단지 성경의 시작일 뿐 아니라 모든 만물의 시작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이 시작이후로부터 존재하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시작의 순간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는 기회가 됩니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서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천지창조의 순간에서 우리는 그 단순함 속에서 오묘한 진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시작에 하나님께서 공간과 지표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창조의 각 단계들을 하나씩 실행해 나가십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였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던 것은 주님의 창조가 완성되지 않은 모습일 뿐입니다. 이미 땅과 흑암을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 다음 단계들을 실행해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신께서는 그 모든 단계에 동참하고 계십니다. 이어질 놀라운 창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자재를 쌓아놓는 것과 같습니다. 공사를 시작하기 위해 인부들이 준비해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후로는 놀라운 역사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타나는 창조의 능력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빛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빛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과 의도대로 정확히 빛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는 빛의 구성과 성질과 특징이 전부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연히 빛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그 모든 것이 만들어졌고 이는 모두 주님 자신의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능력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 빛을 어두움과 나누셨습니다. 빛이 닿는 곳과 빛이 닿지 않는 곳을 직접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빛이 있는 곳은 빛이 없는 곳과 나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의도대로 만드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셔서 낮과 밤이라고 칭하셨습니다. 어두움이 임함으로 밤이 되는 저녁과 다시 빛이 나타나면서 낮이되는 아침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의 운행을 빛과 어두움의 교차로 구분하셨습니다. 이 모든 기준과 규칙은 전부 하나님이 만드신 것으로 그로써 ‘ 첫째 날’이라는 시간개념이 시작되었습니다.
지금까지에서 잠시 언급하였지만 창조에는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이 나타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단지 창조 그 자체에 신기해하고 혹은 당연시 여길 때에 사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창조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5절까지만의 창조를 보아도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루시는 힘을 봅니다. 그리고 만물을 만드시는 능력을 깨닫습니다. 그 주도면밀하신 계획과 그 일에 연합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것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이루어졌고 이는 모든 세계의 기준과 시작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관념, 생각, 존재의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이 펼쳐놓으신 그 틀 안에 있습니다. 공간을 하나님을 지으셨고 시간을 만드셨기 때문에 공간과 시간에 있는 모든 존재들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우신 분이겠습니까!
그 틀안에 사는 우리들을 하나님은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듯 주님은 이 세계안을 거니십니다. 그리고 그 세계 안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모든 행동과 생각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십니다. 그것이 그분의 권리이자 능력입니다. 우리는 이 공간과 시간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분의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우리를 압도하는 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해 함께 묵상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창18;32-33 멸망을 막기 위한 사람의 수
* 2008-06-02, 주일오후, 4사역참여
오전에 우리가 살펴본 롯은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 속에서 살아남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있기 전 이미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있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로 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먼저 들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 그곳을 위해 간절히 탄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처음에 의인 오십명이 그곳에 있다면 정말로 그 성을 멸하시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멸하시지 말라고 간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오십 명이 있다면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다시 45명을 제시하였고 그것도 하나님은 받아들이셨습니다. 또 아브라함은 40인을 제안하였고 그것도 들어주셨으며 30인을 제안했을 때 그것도 들어주셨습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아브라함은 수를 줄여나갔으며 20명을 제안했고 하나님은 그것도 들어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떠나가시려는 하나님을 붙들고 그가 제안한 것은 10명이었습니다. 그의 간절한 간청이 오늘 성경말씀에 잘 나타나나고 있습니다.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여기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허락하십니다. 열명만 찾아도 그 온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협상은 여기서 끝이 나고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로 가셨고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지막 조건은 바로 의인 열명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이 달려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곳에 의인 열명은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하였습니다. 과연 의인이 몇 명이 있었길래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하였을까요? 그리고 소돔성을 멸망시키지 않는 일에 악인의 변화가능성이 아니라 왜 의인이 필요한 것일까요? 의인의 존재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의문은 몇 명의 의인이 있었는지를 생각해 볼 때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소돔성에 들어갔을 때에 그를 맞이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롯이었습니다. 그는 첫 번째 의인이었습니다. 그가 자기 집으로 가시자고 간청할 때 천사들은 거부했습니다. 길에서 노숙을 하려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래야 가장 잘 소돔성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롯은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강청했고 그제서야 그들은 롯을 따라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쌌습니다. 그리고 그 나그네들을 내 놓으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이 나그네들을 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위기상황에서 두 번째 의인이 나타납니다. 바로 롯의 두 딸이었습니다. 롯은 두 딸을 내놓으며 그 나그네는 그냥 놔두라고 했습니다. 두 딸은 나그네들을 위해서 희생당할 각오를 하였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몸을 희생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더 이상 의인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세 명의 의인으로는 폭도로 변한 소돔성 사람들의 분노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나그네들이 자신들에게 법관이 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가타부타 하는 것,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 이게 옳다 저게 옳다 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냥 자신들의 본능대로 감정대로 욕구대로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의 제지와 만류는 소용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롯의 문을 깨트리려고 했습니다. 이제는 단지 나그네들만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롯과 그 두 딸까지 해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죄악의 검은 물결이 넘쳐 흘렀고 더 이상 의인의 존재나 역할로는 그 검은 물결을 막아설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상황이 여기까지 이른 것을 본 천사들은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이 성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의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 들였고 문밖의 모든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해버렸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소돔성의 재앙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이후에 진행된 일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다음 날 날이 밝기 전까지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내려서 소돔과 고모라성은 이세상에서 자취를 감춰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애초에 제기했던 문제에 대한 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돔성에 있던 의인은 총 3명이었습니다. 그들이 의인이었던 이유는 희생과 헌신의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냥 어떤 삶을 살았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은 사실 별다른 소용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런 것은 중요한 순간에 어떤 역할을 하기 위한 사전준비일 뿐이었습니다. 어떤 위치에 있다는 것,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은 단지 정말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행동을 나타내기 위한 준비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정말 옳은 일을 한 사람이 진짜 의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의인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의인이란 세상에 있는 악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넘치는 악을 막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제시키고 중지시킬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열명이 필요했습니다. 그랬다면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나그네로 변장한 천사들에게 행하고자 했던 그 악한 일을 막을 수 있었다면 소돔성은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 숫자가 부족했고 어쩔 수 없이 그 세 명을 밖으로 빼내고 성을 멸망시킬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합리적이고 정당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소돔성은 자신의 행한 일에 대한 댓가를 치루었습니다. 악인은 자신의 악가운데 멸망하였습니다.
우리는 의인입니까, 악인입니까? 우리는 행동하는 의인입니까, 침묵하는 의인입니까? 진짜 의인이 아닐 수 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쪼록 세상을 변화시키는 의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의인은 군중을 설득하는 사람입니다. 군중의 일원이 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군중에 이끌리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 성난 군중을 자제시킬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멸망을 막기 위한 사람의 수에 바로 우리들이 포함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비록 멸망을 막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재앙을 피하고 그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의인이 되어서 사회와 교회와 가정과 자신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창19;12-16 세 가지 미스테리
* 2008-06-02, 주일오전, 영접체험
여러분은 미스테리를 좋아하십니까? 미스테리란 비밀이나 수수께기, 혹은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나 현상,사물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미스테리가 있습니다. 과연 인간이 정말 달에 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나 종종 하늘에서 나타나는 UFO의 정체에 대한 의문, 혹은 영국의 스톤헨지나 종종 땅에 생기는 기묘하고도 신비한 자국들 등이 그 미스테리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미스테리는 우리의 궁금증을 자극해서 미스테리 영화는 손에 땀을 쥐고 보게 하며 미스테리 소설은 특별히 그런 류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많은 미스테리가 존재하지만 별로 관심이 없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냥 잊혀질 뿐일 것입니다. 잠깐동안은 궁금했지만 바쁘고 정신이 없다보면 그런 것이 궁금했는지조차 모르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미스테리 중에는 아무리 바빠도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미스테리가 있습니다. 나와 상관없는 먼 나라의 이야기들이야 그것이 왜 어떻게 생겨났는지 혹은 어떻게 된 일인지 확실히 안다 하더라도 별다른 의미가 없겠지만 나와 상관이 있는 일들에 대한 미스테리는 반드시 생각해보고 풀어야만 하는 문제가 됩니다. 예를 들면 이번 중국 지진에서 일어났던 일로서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저수지의 수위가 크게 줄었고, 수천마리의 두꺼비떼가 무리를 지어 이동했으며, 동물원에서 기린이 벽에다 머리를 박는가 하면, 코끼리가 코를 심하게 흔들어댔다고 합니다. 몇 년 전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쓰나미 재난에서도 역시 동일하게 코끼리들이 산으로 도망쳐 버렸습니다. 이런 미스테리는 우리가 절대로 그냥 넘어가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커다란 재앙의 전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전조가 끝나고 재앙이 닥쳤을 때에는 너무 늦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 재앙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맛보았을 때에는 이미 피할 수가 없게 되어 버립니다.
오늘 성경에는 바로 이와 같은 우리의 삶에 직결되는 너무나 중요한 미스테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창 결혼 준비를 하고 애쓰고 있던 롯의 예비 사위들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결혼을 얼마 앞두고 있던 예비 신랑이었습니다. 아마 그들이 살고 있는 성에서 그들은 가족들과 친구들과 여러 지인들을 초청해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서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롯이 그들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롯의 사위들에게 장인인 롯의 말은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였을까요? 그곳은 바다가 가까운 것도 아니었고 산을 끼고 있던 것도 아닙니다. 그곳은 평지였습니다. 날씨도 화창하고 한번도 자연재해로 뭔가 큰 일이 일어나본 적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이 멸하여진다는 말입니까? 장인이 뭔가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이 이상해져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요? 아니면 지금 사위들을 데리고 농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사위들은 장인인 롯의 말을 그냥 무시해버렸습니다. 그들은 농담처럼 여겼다고 했을 때에 그 의미는 ‘tsaw-khak’,‘mock’이고 그것은 웃기거나 조롱하거나 비웃거나 업신여기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웃기려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인은 재앙을 예고해 주었지만 그들은 그 경고를 그냥 무시해 버렸던 것입니다. 장인인 롯이 그 사위들에게 했던 경고는 첫 번째 미스테리입니다. 왜 장인은 자신들에게 그런 말을 하였을까요? 전혀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말하였는데 정말 롯은 왜 그랬을까요?
그는 방금 전 자신의 집에 머물던 천사로부터 이 성을 멸하러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이 진짜 신빙성 있는 이야기였을까요?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그 천사들이 자신을 해치려던 비류들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나그네의 모습으로 롯이 살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 왔는데 비류들은 진짜 나그네인 줄 알고 그들을 겁탈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남자였지만 이미 동성애가 만연한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이런 악한 일이 자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그네를 내놓으라고 롯의 집을 에워싼 비류들을 천사들은 그 눈을 멀게 해버렸습니다. 그걸 모두 본 롯은 천사들의 말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위들이라도 피신을 시키려고 그들을 찾아왔던 것이고 다급하게 그 성에서 도망가라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두 번째 미스테리가 나타납니다. 그러면 왜 사위들은 장인의 말을 믿지 않았을까요? 자신의 장인이면 어느정도 신뢰할 만한 사람일텐데 왜 그냥 무시해버렸을까요? 또한 왜 그들은 롯에게 성에서 도망가야 하는 이유조차 묻지 않았을까요? 만약 물었다면 천사의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한층 더 신뢰할 만했을 텐데 그들은 왜 그러지 않았을가요? 그들은 성밖으로 나가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었을까요? 그런 도망을 귀찮아 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지금 너무 바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장인을 사실은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들은 농담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일까요? 부분적인 이유야 여러가지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동성애가 판을 치고 모든 그 당시 있을 수 있는 악이 넘쳐나는 곳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였지만 그들은 그곳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 성에서 도망치라는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2005년도에 ‘상담전도법’이라는 논문으로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상담학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계속 ‘상담전도’라는 분야를 연구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가졌던 가장 큰 고민은 이었이었습니다. 바로‘사람들은 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가?’였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할까?’라는 고민이 아니었기 때문에 별다른 전도의 열매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거부하는 이유’에 대해서 연구를 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에게는 미스테리가 될 지 모릅니다. 왜 이렇게 좋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왜 무시해 버릴까 이런 궁금증이 여러분에게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구구절절한 이유에서 사람마다 다 차이는 있습니다만 공통의 이유는 더 사랑하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분명히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근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해 버립니다. 농담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혹은 농담정도로만 받아들여도 양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전달하는 일에 대해서 저주하며 욕설을 퍼붓고 인격적인 모욕을 가합니다. 그러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너무너무나 싫어하고 증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들, 사람들에 대해서 싸그리 무시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정도가 아니라면 복음을 거부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알고 해결해 줄 때에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미스테리는 이와는 좀 다른 분야입니다. 이 미스테리의 시작은 15,16절에 있습니다. “15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가로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16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롯과 아내와 두 딸만이 소돔성을 빠져나오려고 했는데 그들은 꾸물거렸습니다. 빨리 빨리 움직이지 않고 더디움직였습니다. 아마 그 아내가 여전히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 저것 챙기는 게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체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입니다. 그로 인한 결과는 모두 롯과 그 가족이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들의 행위의 댓가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밖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순식간에 그들은 성을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성경에서는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롯과 그 가족에게 인자를 더하셨을까요? 왜 그냥 자신의 어리석음 속에 내버려 두지 않으셨을 까요? 왜 손을 잡아 이끌어 주셔서 좀더 쉽게 성을 빠져 나올 수 있게 해 주셨을까요?
그것은 롯이 아브라함을 따라서 갈대아 우르를 떠났던 아브라함의 조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가 살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믿었고 가나안으로 와서 살았습니다. 그 때 조카 롯에게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롯은 그 순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아브라함을 믿었습니다. 그 순간은 그랬습니다. 그래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왔습니다. 가나안에 와서 아브라함과 롯이 각각 부요하게 되었을 때 둘은 각각 헤어져서 롯은 도시였던 소돔과 고모라로 갔고 아브라함은 변두리였던 들판으로 갔던 것입니다. 여하튼 롯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자를 얻은 이유는 그가 아브라함을 믿었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롯에게 인자를 더하셨습니다. 그의 손을 잡아 이끌어 주셔서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정말 미스테리입니다. 하지만 전혀 이유가 없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부모를 따라 혹은 친구를 따라 혹은 이웃을 따라 나온 그 발걸음이 복되어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자 할 때에 그분은 손을 잡아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우리의 능력으로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믿을 수 있게 해주시기 때문에 주님을 믿게 됩니다. 인자를 더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있는 이 미스테리를 그냥 지나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속에 담긴 정말 중요한 의미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다가 이 세상과 함께 멸망한 사위들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입어 구원을 받는 롯과 같은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때로 여러분에게 주님을 믿을 만한 충분한 믿음이 없을 때에라도 하나님께서 인자에 인자를 더하여 주셔서 믿을 수 있게 하시고 성밖으로 인도하여 주셔서 심판을 면하고 재앙을 피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온전한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26,하나님을 만난 이삭 날짜: 2007-11-25 주일오전 본문: 창세기 26:23-32 (구36) 요약: 이삭은 하나님을 만나서 사람과 상황의 형통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형통함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와 계시고 이제 우리가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럴 때 장막을 하나님의 만난 곳에서 펼칠 수 있고 그곳에서 정착하여 축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구성: 1. 이삭은 하나님을 만나서 복을 받았고 그로 인해서 사람과 상황의 형통함을 얻었다. B2 2. 우리도 하나님을 만날 때에 우리 삶에서 사람과 상황의 형통함을 얻을 수 있다. A1 3. 하나님은 우리를 이전부터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축복의 말씀을 해 주신다. C3 4. 우리가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장막을 칠 때에 그 축복이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A3 주제: 은혜, 평안, 실천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문제에 부딪칩니다. 하지만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딱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과 ‘상황’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좋아도 사람이 문제를 일으킨다면 결코 어려움에서 헤어나올 수 없습니다. 또한 아무리 사람과의 관계가 좋아도 상황이 뒷받침을 해주지 않는다면 결코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삶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되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라도 알 것입니다. 결코 자신의 노력만으로 모든 것을 공급받을 수 없습니다. 결국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고 또한 상황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의 노력은 잠시 접어두고서 생각할 때에 다른 사람의 도움과 상황의 도움을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여러분께 그 도움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만난다면 사람의 문제와 상황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상황을 다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의 예를 들어 이것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그는 이삭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지금 말씀드린 것과 같은 ‘사람’의 문제와 ‘상황’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로인해서 그는 계속 ‘사람’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고 그리고 계속해서 다른 ‘상황’을 찾고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장소를 옮겨다니고 있었고 계속해서 새로운 우물을 파고 있었습니다. 한 우물을 파지 않았고 한 곳에 정착하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사람과 상황의 문제가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 장소에서 그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밤에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난 하나님은 이삭에게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나님은 왜 이삭에게 복을 주실까요? 그것은 그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전부터 하나님은 이삭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아버지 아브라함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전도를 할 때에 꼭 물어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주변에 믿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주변에 누군가 믿는 사람이 있을 때 그는 결코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의 주변에 있는 그 사람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바로 하나님은 그 사람을 알고 계십니다. 그는 아무개 성도의 남편입니다. 아무개 성도의 아내입니다. 아무개 성도의 아들입니다. 아무개 성도의 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삭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만나게 될 때에 하나님은 일단 축복을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를 좋게 보셨고 축복을 해주기를 원합니다.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친구가, 이웃이, 옆집 사람이, 지나가던 사람이 여러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초청에 응했기 때문에 이곳에 있습니다. 여러분을 인도한 그 사람을 하나님은 아시기 때문에 결국 여러분도 하나님의 아신 바가 되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을 만나면 복을 받을까요? 하나님의 복은 정말 효력이 있는 것일까요? 말로만 하는 축복은 아닐까요? 이삭의 경우는 어땠는지 한번 보십시오. 그는 정말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람과 상황의 문제가 해결되는 유익을 누렸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아비멜렉이 아훗삿과 비골과 더불어 이삭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이전에 이삭을 이 땅에서 떠나가라라고 하던 자입니다. 그런데 그의 태도가 바뀌었습니다. 그는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그들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심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는다면 별 볼일 없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문제가 다릅니다. 사람들이 이삭을 업신여기거나 소홀히 여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와서 알아서 처신했습니다. 이삭과 적이 되는 것을 무서워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이렇게 되어서 이삭은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삭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상황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우물을 파왔습니다. 하지만 그 우물은 곧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투기 싫어서 그냥 줘버렸습니다. 그리고 다른 우물을 파고 있었습니다. 경쟁을 싫어하는 성격이 쟁투를 피하는 마음이 계속해서 다른 분야를 개척하게는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해서 노력한 우물에서 아직 물은 나오고 있지 않았습니다. 애는 쓰고 있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마음의 평안을 얻었을 때에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절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하여 마침내 기쁨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종들이 나아와서 물을 얻었다고 보고한 것입니다. 또한 이일은 바로 사람의 문제가 해결된 바로 그날에 함께 일어났습니다.
세계적인 부호 록펠러에게 있었던 위기는 바로 이러한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는 친구의 권유로 광산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기를 다해 원금을 모두 날렸습니다. 광부들은 폭도로 변해 밀린 임금을 요구했습니다. 빚 독촉에 시달리던 록펠러는 너무 괴로워 '자살'을 떠올렸습니다. 기업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해온 록펠러는 황량한 폐광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없음을 믿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왔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 주십시오.” 록펠러는 통곡했습니다. 그때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위로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때가 되면 열매를 거두리라, 더 깊이 파라.” 록펠러는 이 말씀을 믿고 폐광을 더 깊이 파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록펠러가 제정신이 아니라며 수군거렸습니다. 그 때 갑자기 황금대신 '검은 물'이 분수처럼 공중으로 솟구쳤습니다. 그것은 바로 석유였습니다. 자살 직전의 록펠러는 유전을 발견해 일약 거부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사람’의 문제와 ‘상황’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으면 해결될 수도 있고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반드시 해결됩니다. 또한 더 크게 해결됩니다. 바로 하나님을 얻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삭에게 밤에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만나주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만나고자 한다면 만날 수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여러분, 사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만나서 듣게 될 것은 오늘 우리가 읽은 바로 이 말씀입니다.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이미 우리가 이 말씀을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정말 문제는 이것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냥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이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과 참으로 만나게 됩니다. 주님이 손을 내미셨고 우리가 그 손을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이삭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그냥 지나쳤었지만 이삭이 이 말씀을 들은 다음에 무엇을 했는지 다시 한번 주의깊게 살펴봅시다.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그곳에 단을 쌓고 장막을 친 것이 그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 눌러앉았던 것입니다. 그에게 나타나셨던 바로 그곳에 그는 오랜 유랑의 짐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정착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진정으로 주님을 만난 것에 대한 증거가 되었습니다. 경험이 주님을 만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경험은 사실 늘 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만남은 내가 장막을 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남이며 그것이 동행입니다.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이 무슨 만남입니까? 진정한 만남이란 그 다음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번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잠깐 구경하러 왔을 지라도 하나님을 만나고서는 아예 눌러 앉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합시다. 우리의 장막은 이곳에 쳐져 있습니까? 우리는 이곳에 장막을 쳤습니까? 정말 이곳이 주님을 만나고 단을 쌓으며 장막을 치고 다시 우물을 팔 수 있는 곳입니까? 아니면 또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합니까? 주님을 정말로 만난다면 어디에서든지 정착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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