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5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1.성령충만이란 감정상태가 아니라 실천행동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아마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령충만이란 말을 많이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혹시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다 하더라도 앞으로 교회생활을
하면서 들어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충만은 우리가 알게 되는 세 번째 하나님의 사역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듣는 것이 성령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세 분은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으로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사역을 행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게 된 다음에
알게 되는 것이 바로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신뒤 40일 동안 세상에 계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올라가실 때에 오실 성령님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그 말씀이 나옵니다.
"행1: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한 충만함을 예언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해서 예언하셨던 것처럼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던 것처럼, 성령님에 대한 이야기도 다 이루어졌습니다. 정말 말씀하신대로 성령을 기다리던 제자들은 전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았다면, 그 다음에 알아야 하는 것은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과 예수님이 이루신 일들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은 따로 따로 나타나셨을까요? 왜 한번에 세 분이 다 나타나시지 않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이 성령님을 보내시면서 차례대로 나타나셨을까요? 이것은 우리의 성장과 발전과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믿음이 생긴 것이고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면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성령님을 알게 되고 그럴 때 성령충만하여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하지
않다면 그것은 아직 영적으로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성령충만에 관심이 없다면 여전히 부모님 밑에서 살아야
하는 어린 학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장성한 자들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에 관심을 갖습니다. 가정에서 독립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일들에 눈을 뜨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하게 하시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감정으로만 갖게 하시지 않고 본격적으로 일을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2.이러한 실천의 덕목에는 충성, 온유, 절제, 경건, 덕행, 우애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자들의 삶
속에는 '실천'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실천에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성령의 열매들이 있습니다. 실천 중에서도 이와
같은 성령의 열매들이 있을 때 그것이 진정한 성령충만한 삶이 됩니다. 그것을 하나 하나 살펴봅니다.
"충성, 온유, 절제, 경건, 덕행, 우애"
'충성'이라는 것은 성령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천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였을 때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을 알게 하십니다. 그럴 때 순종함으로써 충성을 나타내게 됩니다. 성경 말씀에서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이전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들에게
두려워하면서 주님을 부인하던 겁많은 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달라졌습니다. 그는 담대히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성령님께서 그에게 충만하게 은혜를 채워주신 것입니다.
'온유'
또한 베드로는 미움이나 분노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온유했습니다. 그 다음 구절을
보십시오.
"15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베드로는 너희가 술이 취하였다고
사람들이 외쳤지만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온유하게 악한 반응에 대해서 대응했습니다. 그럴때는 정말 화가 하나도 나지 않습니다. 복음을 거부하고 부정하며
부인하는 자들에게 편안한 마음으로 설명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성령님께서 그의 마음에
가득하게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과거 대제사장들의 종을 향하여 칼을 휘두르던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을 성령님께서 굳게 붙들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타이어의 바람 빠진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동차나 자전거의 타이어의 바람이 빠지면 지면과의 마찰이 커지면서 제대로 앞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부드럽게 넘어가야 할 것을 힘들게 힘들게 지나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힘은 힘대로 들고 속력은 속력대로 나지 않는 안타까운 상황이 생깁니다. 성령충만하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 한번을 드려도 마음이 불편합니다. 온유하게
대응을 하지 못합니다. 성령충만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가끔씩 조는 사람을 볼 때 마음이
흔들립니다. 왜 내가 설교하는데 졸고 있을까 마음이 심히 요동칩니다.
졸지 말라고 고함을 지를까, 조는 것에 대해서 지옥의 형벌이 있다고 말해줄까, 내가 그렇게 설교가 지루한가... 별 생각이 다 납니다. 설교를 하면서도 이런 저런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바울이 설교를 하는 중에 유두고라는 청년이3층 난간에서
졸면서 듣다가 떨어져서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난리가 났지만 바울은 침착했습니다. 그는 동요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에게 다가가서 살펴보고
생명이 그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을 살려냈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이러한 온유함이 있는 것입니다.
'절제'
성령에 충만하면 절제하게 됩니다. 그 절제함 속에서 하나님의 하게 하시는 일에 목표를 갖습니다. 절제하지
않았다면 이런 저런 일들로 분주하고 마음이 바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겠지만 절제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주목할 수 있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어떻게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을
때 자녀들은 예언을 할 수 있을까요?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수 있을까요? 늙은이들은 꿈을 꿀 수 있을까요? 자녀들이나 젊은이 늙은이들은 나름
바쁩니다. 할일이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성령충만하게 되면
그런 것들을 조절합니다.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없이
무한정 세상의 일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에 준비되어집니다. 그래서 예언을 하는 '경건'함을
이루고, 환상을 보는 '덕행'을 행하고, 우애를 실천하는 '꿈'을 꿉니다.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충만함을 통해 이루어나가는 구체적인
행동이자 변화의 몸짓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일을 위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3.성령님은 우리가 실천하기를 원할 때 그 일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을까요? 원리는 간단합니다. 타이어에 어떻게 공기를
주입하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스스로는 결코 타이어에 공기를 주입할 수 없습니다. 그 안에 공기를 넣는 기구가 있는 곳으로 가서 타이어에 공기를 넣어 달라고 말하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자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충만하게
하시는 그분께 가서 성령의 충만함을 달라고 간구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각 사람에 맞게끔
수준을 파악하시고 필요한 성령의 충만함을 주십니다.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요엘서의 예언도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여기서 '내가'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위로 하늘에 기사와 아래로 땅에 징조를 베푸십니다. 곧 피를 흘릴 수 있고, 불이 날 수 있고, 연기가 날 수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피에 관한 기사와 징조가, 불에 관한 기사와 징조가, 연기에 관한 기사와 징조를 주님이 알게 하시고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란 주님의 재림의 날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올라가신 그대로 다시 내려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재림을
약속해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재림의 날은 단지 크고 영화로운 날 만이 아닙니다. 죄인들에게는 그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그래서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알게 하시는 모든 충만케 하심이 이러한 심판을 예비하고 미래를 준비하며 진정한 구원을 얻게 하십니다.
이것은 단지 재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림의 심판을 예고해주시는 하나님은, 병의
심판과 실패의 심판과 부도의 심판과 가정해체의 심판과 범죄의 심판에 대해서 미리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도저히 지금 그냥 이러고 있지 못하도록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알게 되면 바빠집니다. 준비하게 되고 대비하게 되고 대피하게 되고 대응하게 됩니다. 그것을
알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의 충만한 은혜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무지하고 어리석고
아무 생각없는 삶 속에 강력하고 확실하며 구체적인 미래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움직이게 되고 실천하게 되며 활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저의 경험 속에서도 이러한 성령님의
충만케 하심이 있었습니다. 중학교 시절 교회에서 수련회를 한다고 했을 때 성령님께서는 두 가지 소망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방언을 받는 것과 다른 하나는 말씀을 이해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수련회에서 그 두가지 다 은사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재수시절, 원하는 대학에 갈수 있을지를 간절히 기도했고 꿈 속에서 그 학교 안에서 합격통지서를 받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이후로 군대를 갈때에도 대학을 졸업할 때에도 신대원에 들어갈 때에도 첫 사역지에 나아갈 때에도 항상 주님은
이모저모로 충만함을 주셨습니다. 그 충만함을 얻기까지 기도도 많이 했지만 그래서 정말 딱 충만하게 되었을
때 항상 비로소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성령님은 이렇게 사모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얻고자 하는 자에게 베푸십니다. 부어달라고 간구하는
자에게 주님은 매몰차게 안된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영혼의 목마름 속에서 실천의 무지함 속에서 갈바를
알지 못해 괴로워하면서 주님께 의지할 때에 주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면서 구체적인 실천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4.우리는 성령충만할 때에 가장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성령충만이 이렇게도 중요하고 필수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세대는 구원의 확신으로만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정말 성령충만함이
필요없습니까? 성령충만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까? 구원의 확신만
충만하면 괜찮습니까?
여러분의 삶속에 다른 어느때보다도 '충성'했던 적이 있다면 그때는 성령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온유'했던 적이
있다면 성령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절제'하는 삶을 살던 때가
있었다면 성령충만했기 때문입니다. '경건'했던 때가 있었습니까? 그 때 여러분은 성령충만했습니다! '덕행'하던 시기가 있었나요. 성령충만했었던 것이고, '우애'하던 때가 있었습니까?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때는 놀랍게도 성령충만했던 때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러한 실천이 필요하다면
성령의 충만을 사모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또 풍성히 부어주실 것입니다. 너무 넘쳐서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혼자서 누리기에는 감당이 안되서 옆사람에게도 그 은혜가 흘러갈 것입니다. 그러면 옆 사람은 이상하게
생각하겠지요. 이 사람이 술에 취했나? 정말 술에 취한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에 충만한 것입니다.
이 5월 가정의 달에 성령으로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가정이 여러분의 성령충만함으로 화목하고 화평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결심)
59약1; 26-27경건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이루어진다_1
2012.5.20.주. 주일오전, 주제설교-충만
*개요[55충만] {6서신서} <A적용> [5은혜]-[7실천]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1.경건의 의미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삶의 변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령충만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성령충만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령충만을 받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성령충만함을 받을 때
생겨나는 일들은 삶의 변화입니다. 또한 이러한 삶의 변화를 얻고자 할 때 필요한 것은 성령충만함입니다. 이러한 현재적인 충만함과 동행하심을 받을 때에 우리는 삶의 순간 순간에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사역의 핵심은 과거와 미래가 아니라 바로 현재에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손을 잡아주시지
않습니다. 우리 발을 붙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을
잡아주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마음이 기울어지지 않도록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굳건한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잡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순간 순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자전거 타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처음 제가 저희 딸에게 자전거를 가르칠 때 우리는 공원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균형 잡는 법을 알려주었습니다. 몸이 오른쪽으로 쓰러질것
같으면 왼쪽으로, 왼쪽으로 쓰러질 것 같으면 오른쪽으로 기울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안좋았습니다. 몸을 왼쪽으로 기울이면서 오른쪽으로
쓰러졌던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자전거를 배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나아가면서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면 오른쪽으로 핸들을 돌리고 왼쪽으로 기울어지면 왼쪽으로 돌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핸들이 마구 흔들리다가 결국에는 넘어졌습니다. 혼자 힘으로는
아무리해도 안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한 방법이
제가 뒤에서 목을 잡아주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제가 목을 굳게 잡아주고(목을 조른 것이 아니라), 균형을 잡아주니까 그제서야 중심을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앞으로 넘어지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우리 딸은 아빠가 목을 잡아줘서 균형을 쉽게 잡을 수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딸이 스스로 자전거를 타게 된 것은 두말할 나위없는 기쁨이었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천국에 갈 수도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성령을 의지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 균형을 유지합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로 그렇게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삶의 모습 중 하나가 바로 '경건'입니다.
2.고넬료는 바로 그렇게 경건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경건의 정의를 어떻게
내릴 수 있습니까? 거룩하게 사는 것,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 조단조단 이야기하는 것,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떤 분들은 이런 경건을 영성이라는 말과 혼동합니다. 영성이라는
말은 그 자체가 성경적 용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어로 'spirituality'라고
하는데 그 기원은 5세기 경으로 성직자나 수도사들이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 이후에는 주로 카톨릭을 통해서 전해 내려왔고, 최근에는 개신교회도 이러한 영성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성의 근본적인 의미는 성경적인 가치와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신학자들이 말하고 있는 영성의
의미는 '한 사람의 행동이 유래된 태도나 정신의 바탕이 되는 어떤 종교적 또는 윤리적 가치'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또한,
더 넓게는 영성이란 특별한 종교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영성은 물론
선, 불교, 유대교, 이슬람
영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는 물론 기독교 영성을
의미하겠지만 그 자체의 의미가 너무나 범용적이기 때문에 다소 생소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경건은 이러한
영성의 의미와는 다릅니다. 그것은 지극히 구체적인 삶 속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경건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경건이 경건하다는 생각과 자기
마음에의 집중에만 해당된다면 그것은 헛된 경건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혀를 재갈 먹이고 자기 마음을 속이지
않는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경건이라고 합니다. 혀에 재갈을 먹이는 것은 통제를 가하는 것입니다. 마스크를 씌우는 것이 아니고 마개를 덮는 것이 아닙니다. 할 말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지 않는 통제가 되는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경건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마음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 말이나
막 하면서 마음과는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이런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보아야 좀더 구체적인 경건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에서는 경건한 사람 중의 하나로 '고넬료'를 말하고 있습니다. 고넬료에
대한 설명을 보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행10:1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그는 경건하였다고 했습니다. 경건에 대한 성경의 설명대로라면 그의 혀는 재갈 먹여진 것 같습니다. 또한
마음을 속이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경건하여서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말은, 그의 혀는 도대체 어떤 용도로 쓰여진 것일까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말을 하였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백성을 구제하면서 하나님께 항상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든지 간에 자기 영성만 추구하면서 살아간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일체 관계를 맺지 않으면서 심지어는 가족도 버리면서 산속에 들어가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간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백부장으로 군대를 맡아서 수고하면서 경건했습니다. 그의 말로 온 집은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의 말로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경건한 것입니다.
경건하다는 성경의 표현은 영어로 'religious'라고 합니다. 종교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일견 거부감이 들수 있수도 있지만 만약 우리의 경건이 우리 믿는 기독교의 의미를 온전히 나타내는 삶이라면 그런
경건은 대환영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합니다. 또한 그런 말과 행동을 하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보여주는 '경건'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생겨나는 '경건'입니다.
3.하나님은 우리를 교회에서 만나고 삶에서 만나시기를 원하십니다.
무엇이 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산속에 들어가 속세를 떠나서 영성을 추구하는 것과 삶속에서 경건을 이루는 것,
무엇이 더 어렵겠습니까? 사람마다 다르겠지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성을 쌓으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경건을 행하라고 하신다는 점입니다.
"딤전4:7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8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9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만하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건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영성은 선택이지만 경건은 필수입니다. 이러한 경건을 이루기 위해서 성령충만을 필요로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없이 경건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산소통이 없이 바다로 내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잠수를 아무리 잘한다 하더라도 산소가 없이는 오래 바다밑에서 작업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산소통이 있고 그러한 공급이 있을 때만이 바다밑에서 해야하는 작업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성령충만해야
하는 이유도 그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경건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때 그것은 경건의 능력을 가지게 되고 모습을 이루게 되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경건에는 비밀이 있기 때문입니다.
"딤전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경건의 비밀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그분은 육신으로 나타나셨지만 영으로 의롭다 함을 입으셨습니다. 천사들이 그분을 보았습니다. 천하만국에서 전파되셨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주님이 되셨고 영광 가운데서 승천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경건의 비밀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런 경건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분의 삶을
닮는 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조용히 산속에 들어가셔서 한평생 영성을 추구하다가 죽으신
분이 예수님이 아니라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의 죄를 위해 죽으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경건을 통해 예수님의 모습을 이 세상에서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그렇게 하나님 나라에
갈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경건의 모습을 갖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